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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원의 산증인, 배병심 장로와의 대담
최은수 교수의 역사 현장 탐방
2023년 11월 06일 (월) 14:18:50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Berkeley GTU 연구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 조지아 연구소(AGSI)와 남장로교 연구소(SPSI) 대표
 

“함께 하시고 은혜로 인도한 60년의 역사 실감합니다”

 

   
최은수 교수

배병심 장로는 미국 남장로교 파송 의료 선교사들이 설립한 의료기관 여러 곳에서 근무했으며, 여수 애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법인 사무국장 겸 병원 행정국장 역임, 애양원 초대 역사박물관장 역임, 현재 사회복지법인 애양원 법인 이사이다. 여수 애양원의 산증인 배 장로는 통해 애양원의 역사와 목적, 그리고 각종 하나님의 역사를 나누었다.
 

최은수 교수: 애양원 역사관 초대 관장으로 수고하신 배병심 장로님의 신앙 배경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배병심 장로

배병심 장로: 저는 1938년 9월 1일에 담양군 대전면 갑향리에서 8남매 중 4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 광주앙림교회 중등부 주일학교 교사(아버지 제자)에게 저를 소개하여 본격적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광주양림교회는 제 신앙의 첫 시작이었고 2007년에 막내아들이 이 교회 출신 신부와 결혼식을 하게 되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57년 3월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입학, 고등부 기독학생회(Hi-Y, 광주YMCA산하) 활동, 3학년 회장 역임하였지요. 교회 활동은 광주YMCA강당 이층에서 임시로 광주계림교회에서 시무 하셨던 오동옥 목사(광주YMCA이사)님을 초빙 “중부교회”이름으로 개척하였는데, 성가대 주일학교 반사로 봉사하던 중 오동옥 목사님을 통해 세례를 받았지요.

1962년1월1일 여성숙 선생님과 함께 목포의원 (포싸이트 선교사가 사역했던 옛 프렌취병원 건물)에서 의료 관련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순천선교부 결핵진료소 방사선실 근무, 아동결핵병원을 거쳐서, 1973년부터 애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지요. 순천제일교회에 등록한 후 장로로 임직을 받고 섬기다가 현재는 원로 장로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가대 관련해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애양원, 교회, 방송국 등 다양한 성가대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최은수 교수: 장로님이 애양원과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배병심 장로: 광주제중병원 내과 과장 여성숙 선생님께서 평소에 YMCA 사무실을 자주 방문하셨고, 김천배 총무님을 비롯하여 최흥종 목사님, 백영흠 목사님 때로 함석헌 선생님 등과의 교감이 있었습니다. 이 무렵 여성숙 선생님이 광주 제중병원을 사임하고 목포에 전 “프렌치병원”(포싸이트 의사가 사역했던 선교병원) 건물에 KCWS(기독교 세계봉사회) 지원을 받아 목포지역 결핵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세워진 병원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직전에는 광주 제중병원 카딩턴 원장님이 전주예수병원에 근무 중인 최선이 선생님을 보내어 원장으로 근무했는데, 그분이 케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어 후임으로 여성숙 선생께서 부임하게 되었지요.
 

여성숙 선생님이 목포병원으로 갈 계획 가운데 새로운 직원이 필요하던 차에 평소 내가 일하고 있는 상황들을 예사롭게 보았던 탓인지, 특별히 김천배 총무님께 나를 천거해 줄 것을 부탁해서, 저는 학교 재학 중이라 사양을 했지만, 당시 친구들도 확실한 직장이 보장된 특별혜택을 사양할 이유가 없다며 권유했고, 중부교회 오동옥 목사님께서도 여성숙 선생님이 믿을 만하고 좋은 분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었어요.
 

결국 여러 차례 권유로 수락하고 선생님께서 사전에 교섭해 놓은 서울 국립보건연구원에서 소정의 방사선사 제4기 교육과정을 정식 이수 과정으로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1961년 8월 역시 여성숙 선생님께서 준비해 놓은 광주제중병원 방사선과 실습 근무,
 

임시 숙소인 남자직원 기숙사에 내가 다니고 있는 광주중부교회 김상수전도사와 함께, 평소 형님 동생 하며 친근하게 지내오던 형과 룸메이트로 더욱 친근한 관계로 실습 과정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수 애양원 예배당 전경

여수애양재활병원 토풀 원장께서 목포 섬 지역 소아마비 후유증 장애 아동 환자 교통 편의를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천주교 계통 “목포성코롬반병원” 수술실을 이용하곤 했지요. 수술팀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목포의원 여성숙 선생님을 방문한 자리에서 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토풀 선교사님께서 마침 자기 병원 여수애양병원에 면허증 소유자인 방사선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저와 면담 후 서로 간에 합의가 되어 1973년 2월 1일부로 근무키로 합의가 되었지요. 이렇게 애양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1973년 1월 목포결핵병원을 사임하고 우선 혼자 몸으로 목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 신풍역에 내려서 약 5KM 거리의 애양원에 도착 하고보니, 1961년 광주YMCA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을 때, 광주 고등부 기독학생(Hi-Y) 여름방학 웤 켐프 지도자로 참여했는데, 애양원을 중심으로 주일 예배를 애양원교회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새삼 상기되었지요.
 

결핵환자 진료업무로 보냈던 10여 년 생활과 세월에 익숙해 있다고 자부했지만, 결핵과 한센병의 차이점을 굳이 의학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둘 다 전염병으로 현미경 상 균도 비슷하여 식별 난이도가 전문가 아니면 식별하기가 어려운데, 결핵은 대부분 공기전염병으로 호흡기를 통해서 감염되고, 한센병은 접촉성 피부전염병으로 특별한 사명감과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은수 교수: 시대별로 애양원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배병심 장로: 애양원의 역사는 1909년 광주 제중병원(현 기독병원)선교사 오웬(Owen, Clament Carrington 미국. 의사이며 목사 1898-1909) 전남 화순 지역에서 선교활동 도중 과로로 인한 급성폐렴이 발생해 위급상황이었어요. 목포 프렌취병원 선교사 포싸이트(Forsythe, Wley Hamilton. 1904-1912)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하였습니다. 그가 조랑말을 타고 광주로 급하게 오는 도중 “영산포” 지역으로 당도했을 무렵, 길가 언덕 밑에 온 몸에 상처투성으로 악취가 심하고 다 죽어가고 있는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였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자기가 타고 온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서 늦은 시간에 도착했지요. 위급했던 오웬 의사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장례식도 마친 안타까운 상황이었고, 데려온 한센병 환자를 치료 해주어야 할 입원실마저도 거부를 당하게 되는 실정에 마침 병원 건물 벽돌 굽던 빈 가마 토굴을 임시로 환자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소천하신 오웬 선교사 사모님께서 슬픈 와중에도 이 불쌍한 나환자 치료를 위해 오 웬 선교사님이 사용했던 침대를 제공하게 되고 당시 제중병원 윌슨 원장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의 여러 가지 협력의 동기가 시발점이 되어 우리나라 한센병 치료 병원 애양원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일목요연하게 연대별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수 애양원 발전에 기여한 미 남장로교 파송 의료 선교사들. 우측으로부터 보의사, 우월순, 보이열, 도성래 원장

1909년 포싸이트 선교사가 길가에 쓰러져있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데서 애양원의 설립 동기가 됨

1909~1910 미국 남장로교회 재정지원으로 광주에 한센병환자를 위한 진료소를 세우다.

1911. 4. 25 당시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서 우월순(R.M Wilson, M.D)선교사 (1911~1940 원장직 역임)에 의해 광주 나병원으로 시작

1913 한센병환자 교회, 봉선리교회 설립

1915 한센병환자 교육을 위한 봉선리 초등학교 설립, 폐교

1915~1916 원장; 타마자(J.V.N. Talmage) U.S.A Reverend, 1922~1923,1940~1942,

원장직 역임,

1923 조선총독부 사립병원 취제규칙에 의하여 정식 병원 인가

1926 비더울프 나병원으로 개칭

1927~1928 현 여천군 율촌면 신풍리 소재지로 단계적 이주,

교회와 병사를 짓고 재원자 600여명을 수용 신앙과 진료로 돌봄

1935, 3,15 애양원으로 개칭, 재원자 749명

1938 미감아 수용시설, 한센병 환자 자녀 격리 수용

1942~1943 원장; 안동길조 (Anto) 일본 Administrator

1943~1945 원장; 소송활 (Komatz) 일본 Administrator

1945, 9,10~10,15 원장; 손양원 한국 Reverend

1945, 10,16~1946 원장; 최경동 한국 의사

1946~1948 원장; 강대헌 한국 의사

1946, 9, 8 한센병환자를 위한 성산중학교 개교, 1971년 폐교

1948, 4,11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로 운영권 이관 (일본 및 군정청으로부터)

              개원자 1000여명

1948~1949 원장; 보이열 (Elmer T. Boyer) U.S.A Reverend, 1950~1965 역임

음성 나환자 자립 생활 활동 여천지역과 전북 남원 산성 지역에 정착촌 설립 보성농원,(여천 지역은 애양원 부근이라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지 않았지만 전북 남원은 주민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치어 어려움이 많았던 스토리와 성공 사례 생략!)

1949~1950 원장; 원가리 (Kelly Unger) U.S.A Reverend,

1952 미감아 수용을 위한 명성보육원 설치, (보이열 원장)

1955 4, 12 한센병환자를 위한 한성신학교 설립, 1962년 폐교

1956 8, 21 재단법인 애양원 인가

1959 10, 23 미국 총각의사 27세, (Stanley C. Topple) 애양원에 부임 1965 ~ 1978 2, 28일 까지 원장직 재임 1981년 한국 이임

1962 8, 1 전북 남원과 전남 여천에 한센병 음성환자 227명을 퇴원시켜 정착장 설립

1966  나 이동진료반 운영을 시작, 나관리 직원을 여수시, 순천시, 여천시, 여천군, 승주군, 광양군, 고흥군, 보성군 보건소에 파송 나병교육과 재가, 나환자 진료 및 신환자 발견에 박차

1967 8, 3 재단법인 여수애양재활병원으로 개칭, 미국남장로교 유지재단과 토풀 원장 미국 모 교회(Decature Presbyterian Church)후원금으로 현대식 병원 신축 (연건평 439평),

일반 지체장애자와 한센병 환자에 대한 편견을 없게하기 위한 재활치료 목적

1972 4, 1 고령불구 나환자 독신합숙소(평안사) 구 병원 건물 개조, 한센병환자 양로대책수립

1973 간이 상수도 시설, 병원용수와 수용환자 급수 해결,

지금 까지 지하수에 의존했던 병원용수를 비롯하여 수용환자 전체 인구 1500 여명의 식수난을, 노우암(Clarence G. Durham) 미국 행정관이, 여천 석유화 학공단 지역으로 가는 공업용수 송수관(사용 거리 약 10km 지점)에서 애양원 상수도 사용 할 수 있도록 교섭과 공사비용 미국 교단에 요청하여 해결

1974,3,1 나환자와 지체장애자의 사회재활을 위한 재활직업보도소를 설치하고 양재교 육을 실시함,  2008년 12월 폐소

1976 5,6 음성나환자 205명 법인부지 현지정착, (토풀 원장 한국 이름 도성래를 딴

도성농원, 도성마을,)

1976 5,6 경남 진주시까지 나 이동진료사업 화장, 인근의 많은 한센환자를 치료함,

1999년 사업 종료,

1977 미국교회 기증금으로 병원 본관 상,하층 110평 증축(연 건평 540평)

1978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로부터 본 재단으로 운영권 이전,

도성래(Stanley C, Topple) 원장직을 본인 의사로 사임 환자 진료만 전담키로,

1978 3, 1 유경운 부원장, 원장으로 부임, 1995년 5월 30일 정년퇴임,

1979 간호사 기숙사, 의지제작실, 제2병동, 준공

1980 내빈관 60평 준공, (외국인 단기선교사 숙소)

1981 도성래 명예원장 추대, 미국 본국으로 이임,

1983년 서울의대 정형외과 출신 김인권 의사 국립소록도나병원 공중보건의사 복무 후 여수애양재활병원 부임,

1984 제2병동 10실추가 신축(46평)

1985 노우암 노혜련(Clarence, Gunn 더함 )선교사 (애양원 미국행정관)직을 사임,

미국으로 귀국 후 미국에서 WRF (Wilson Rehabilitation Faundaition)

애양원 지원 단체 관리 운영

1986 평안양로원 신축(750평), 제2병동 22실추가 신축(98평), 성서암송반 신축(24평)

수양관(토풀하우스)개축(250평),

1988 3, 21 사회복지법인 애양원으로 변경

1990 6, 1 병원 본관 3차 증축(연 건평 896평) 및 기구 보강

1992 평안양로원 증축(218평), 병원본관 예배실 증축(65평),

재활직업보도소 증축(60평), (순천매곡동 구 서교부 부지 내)

1995 5,30 김인권 부원장 원장으로 부임,

1996 병원 본관 전체 보수공사

1998 입원 및 외래환자를 위한 통나무식당 신축

1999 12 애양원 역사박물관 (구 병원건물) 신 개축(245평

2000 6, 24 애양원 역사박물관 및 토풀하우스 개관

2001 6 23 ~ 200110, 3층 입원실 증축 준공(320평) 및 1층과 2층 개보수

2003 병원 보수공사(2병동, 물리치료실, 의지실, 간호기숙사,) 및 MR실 증축

2004 11 세탁실 개축

2005 5 집중치료실 (ICU)설치

       11 공식적 외원 마감

       12 간이상수도 시설 확충 및 정수장 신설

           대체 에너지 태양열설치(수술실 및 간호기숙사 옥상)

2007 9 전자의무 기록시스템 구축(EMR & OCS)

2008 12 애양평안양로원 리모델링

2009 4, 24~25, 애양원 100주년 기념예배 및 겸행사

2010 6 병원 신관 신축 (5층 1,724평) 연면적 5.699.9m) chd 병상수 187

2010 6 본관 리모델링 (내과, 물리치료실, 의지실, 진단영상의학과, 진단검사의학과

2012 1 간이상수도 폐쇄, 여수시공용상수도 공급

2012 5 한센환자 수용시설 여자부 잔여병사 14동 치유의숲으로 리모델링

(연 면적 4.965.72)

2013 2 미안마 교회 설립 및 차량구입 지원

2013 6 최신형 MRI 1.5 T, Siemens 회사 설치

2014 5 미안마 불우 아동을 위한 고아원 지원사업

2015 4. 25 애양원 한센기념관 준공 및 개관 기념예배

2015 9 병원 A동 (구관) 내. 외부 수리, B동(신관)보수

2016 3 김인권 원장 정년퇴임, 및 명예원장 추대

2016 3 이의상 부원장 원장 취임1

 

   

여수 애양원 발전에 실제적으로 가장 큰 기여를 한 우월순 선교사. 지금도 여수 애양원 정문에 윌슨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윌슨 선교사의 자녀들도 부친과 같이 의료 선교사로 섬긴바 있다.

최은수 교수: 가까이에서 본 미 남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배병심 장로:

1961 닥터 카딩턴(고허번)

7월 국립 보건연구원에서 방사선사 제4기 교육을 수료를 마치고 여성숙 선생님께서 주선 해 놓은 광주제중병원 방사선과에서 소정의 실습 과정에 카딩턴 원장님을 가끔씩 대면하게 되었지요. 인자하시고 부지런한 모습이 퍽 이상적인 기억되지만 본래 광주에서 “거지대장 선교사”로 특별히 결핵환자들의 아버지로 소문이 나 있어 퍽 호감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원장실이 방사선실과 가까운 곳으로 직원들이 급하게 뛰어다니며 원장실 책상 위에 카메라를 두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카메라가 없어졌다며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카딩턴 원장님께서 직원들에게 “그 카메라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간 것 같으니 소란 피우지 마시오!” 하시며 너그러운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1967 순천 선교부 휴 린튼(인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얼마간 광주 개인 병원에서 일 하고 있을 무렵에, 순천 선교부 휴 린튼(인휴) 선교사 부인 로이스 린톤 선교사가 운영하는 순천결핵진료소에서 방사선사로 일하게 되면서 인연이 되어 우리 가족과의 교제가 최근까지 지속되어 왔습니다.
 

1973 ~1981 토풀(도성래)원장

첫인상은 눈매가 좀 들어간 편이지만 온화하고 따뜻한 전형적인 미국 신사로 보여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애양병원에 부임 후 어느 날 엑스레이실에 다리 부분에 상처가 심한 한센병 환자 상처부위에서 악취가 심했지만, 촬영을 마치고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2월 초순이라 아직 찬바람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창 설치된 창문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토풀 원장님이 큰 소리로 “미스터 배, 돈 나갑니다.” 하시기에 무슨 소리인지를 몰랐었는데 비싼 보일러 기름으로 보온을 하고 있는데 창문을 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절약정신은 귀감이 되고도 남았지요.
 

수술 도중 엑스레이를 촬영해야 할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데 당시 아래층 엑스레이 기계 시설이 2차 대전 당시 미군 야전병원에서 사용했던 핔커 회사제품 아주적은 용량 30MA 포타불용 기계 한 대로 그 많은 외래환자 촬영뿐만 아니라 이층수술실로 직원들을 동원하여 계단을 통해 운반하여 세팅해서 촬영 후 필름 카세트를 들고 뛰어와 아래층 암실에서 급하게 현상 처리된 필름을 땀을 펄펄 흘리며 뛰어갔는데도 그런 모든 과정상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는데도 토풀 원장님은 “미스터 배, 핑퐁치고 왔습니까?”라고 위트있게 말하곤 하셨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애양병원 역사상 최초 면허소지자로 취업했던 나에게 토풀 원장님이 한 가지 업무만 맡아서 일하면 병원이 손해를 보게 되니까 당신은 능력이 있음으로 의료기 관리와 의약품 취급, 환자교육용 및 선교보고 자료용 사진 촬영까지 다양한 책임을 맡도록 해서 외래환자 진료도 많은데 사실상 감당하기가 조금은 버거웠지만 그래도 나를 신임해준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당시 병원에서 소비되는 의료용품이나 의약품은 80% 물량이 미국 지원 단체를 통해서 공급이 되고 나머지 부족분은 시중 도매약품 상을 통해서 구입 보충 소모 실정인데, 재고를 파악한 후, 리스트를 만들어 구입 분을 원장님 전결 로 시중 순천시내권 2곳 여수시내권 1곳의 의약품 도매상을 통해 견적서를 받은 후, 원장님이 직접 값이 싼 품목을 일일이 체크해서 구입해 오도록 싸인 받은 내용대로 구입해, 더함 행정관 검수를 받은 후, 입고 관리를 해왔으며, 엄격한 규칙과 절약 정신으로 업무 처리를 해 왔기에 오늘날 역사박물관에 많은 전시용 자료들이 보존되었다고 봅니다,

 

1973~1985년, 크라렌스 건, 더함, (노우암) 부부선교사

1961년 한국 선교사로 광주에서 사역하다가 1965년 순천 선교부로 이직, 주로 애양원 행정관직을 맡아 주 3일(월, 수, 토,) 오전에만 병원 외국업무와 부인 Helen Ruth Keeble Durham(노헤련)은 외국 수입 물품 총괄했습니다. 노우암 목사님은 체구가 크고 목소리도 유난이 큰 편이다. 성격은 온화한 편이지만 성격이 급하고 매사가 철저하게 정확한 편이라 오해를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병원 뒤편 바닷가 한센병 환자 마을에 전기 합선으로 집에 화제가 날 뻔한 상황에서 목사님이 보고를 받고 급하게 뛰어가 방안에 있는 휴스박스(두꺼비집)을 폐쇄 하는 과정에서, 목사님이 안방에 신발을 신체 들어 간 것이 자기들을 무시해서 그렇다고 억울하다고 환자들에게 하소연하면서, 집단으로 환자들이 몰려나와 노목사 몰아내자는 항의 시위가 병원 앞뜰에서 크게 일어났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남장로회 순천선교부 사무와 외국 관련 사무는 주로 자택(1973년경 보이열 선교사가 살았던 매곡동 사택을 그대로 선교부 부지내 제일 높은 곳에 복원)에서 처리하고 병원에 출근한 날은 직원 아침 예배가 끝난 후, 언제나 나를 행정관 사무실에 면담하며 그날 내가 처리해야 할 특별한 업무지시와 보고를 해야 했기에 접촉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내가 애양병원에 부임해서 처음으로 직원 성가대를 조직하여 월요일 아침 예배시간만 외부 교회 목사님이 예배 인도로 직원 성가대 찬양을 얼마간 우리 직원들 자체적으로 해 왔는데, 토플 원장님께서 노혜련 사모님이 피아노 전공하신 분으로 직원 성가대 지도를 받으면서, 성가대가 활성화되고 틈틈이 시내 각 교회 순회 찬양과 인근 군부대 위문찬양 양로원을 비롯하여 결핵 요양소 등 다양하게 활동을 재미있게 해 왔으며, 매년 성탄절에는 노우암 목사님 댁에 성가대 전원을 초대해 선물과 맛있는 음식(미국식 뷔페)을 준비해 화려한 파티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함께 업무 처리를 하는 동안 늘 좋은 관계로 서로 협력 하며 일해 왔기에 그분들이 떠난 후, 미국에서 WRF(Wilson Rehabilitation Foundation )애양원을 후원하는 단독 법인을 만들어 관리 하면서 나와 계속적인 업무처리 연락이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미국 방문 4회 할 때마다 살고 계시는 곳을 방문하도록 하여 항상 공항에 마중 해 주어 도움을 주었지요. 특별히 우리 부부가 2000년도에 애양원 역사 자료를 발굴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거주하고 계신 테네시주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마운틴까지 사모님께서 운전해서 로이스 린튼 댁에 숙소를 정하고 미국 남장로교 세계선교 자료관에서 함께 자료 작업을 도와주셨던 그 고마움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비. 개신교는 역사적 유산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역사는 역사를 부르고, 생명은 생명을 부른다’

최은수 교수: 애양원 역사관을 개설하게 된 동기 과정, 그리고 목적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배병심 장로: 광주 봉성리 나병원에서 이주하면서 1926년도에 건축되고 1928년부터 사용된 초창기 구 병원 건물이 1968년도에 현대식 신축 건물로 이전되어 1972년 평안양로원으로 사용하다가 1992년 제2평안양로원을 증축 후 이전 통합 관리되었습니다. 구 병원 건물을 특별한 용도 없이 일부 창고 용도로 사용하다가 병원에서 오래된 의료기구 등 수리가 불가능한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미국 선교단체에서 기증품으로 보내왔던 기구, 즉 요긴하게 사용한 역사성이 있는 귀중한 기구들을 보관하게 됩니다. 이후 구 병원 건물처리문제를 논의 중,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등의 특별 관리문제로 여러 차례 계속 논의되었습니다.
 

구 병원 건물 용도를, 1안, 수리 후 제2 수양관, 2안, 유지비 예산문제로 건물 자체를 폐기, 3안, 수리 후 애양원 역사박물관, 잠정 합의 후, 결국 논의 끝에 100년의 역사 자료관으로 사용키로 합의되었습니다.
 

최은수 교수: 애양원이 나아가야 할 전망과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배병심 장로: 애양원의 역사는 110년째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여기까지 인도되어왔습니다. 그동안의 역사를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1973년 2월 1일부로 처음 부임 아침 8시45분 조회예배 시간에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시킨 토플 원장님께서 부족한 나를 너무도 과분하게 소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큰 모험과 희망을 안고 이곳에 내가 평생직장으로 몸담고 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 생각해 보면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은혜로 인도함 따라서 왔다는 사실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 더 실감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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