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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땅에 들어온 남장로교 선교사들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➀
2023년 10월 02일 (월) 22:45:22 백종근 목사 whitebell0127@gmail.com

백종근 목사/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은퇴

   
 하위렴 선교사의 활동을 담은 책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예기치 않았던 하위렴의 선교행적을 만나게 되면서 내친김에 책으로 엮어 보았다. '조선 선교사 하위렴의 선교행전'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에 등장하는 하위렴 선교사는 구한말 열강의 침탈에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지던 조선에 들어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호남선교의 기틀을 다져온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그의 연보(年譜)를 따라가며 전기형식을 취해 조선에서의 그의 사역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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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연히 우리나라 지역별 복음화율의 통계를 훑어보다가 놀란 적이 있다. 왜냐하면, 군산, 익산, 김제를 포함한 이 일대가 여타 지역에 비해 유난히 높은 복음화율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30%를 웃도는 이 지역의 높은 복음화율은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이 지역의 복음화율이 그렇게 높은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이 지역에서 펼쳤던 선교사들의 선교전략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게도 이 지역은 초기선교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 지역이었다.

1861년 남북전쟁으로 분열된 미국은 심지어 교단까지도 남과 북으로 갈라놓고 있었지만 내한한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일치를 표방하며 장로교 공의회를 결성하고 협력했으나 문화적 토양에 대응하는 방식과 그들이 펼쳤던 선교전략만큼은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그렇다면 이 지역 선교를 맡았던 남장로교만의 특징적인 배경과 대응 방식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호남 땅에서 활약한 선교사들은 남북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남부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세대가 지나고 있었지만 아물지 않은 상흔으로 얼룩진 남부의 선교사들이 호남 땅에 들어온 것 역시 절묘한 조우였다. 열강의 다툼 속에 국권을 상실해가는 조선을 바라보며 동학으로 피폐해진 호남 땅의 백성들이 겪는 좌절과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준비된 정서가 있었을뿐더러 자신들이 위로를 찾았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도 똑같은 위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둘째, 복음에 대한 집단의 반응 정도를 수용성이라 정의한다면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동학농민항쟁의 아픈 역사가 사뭇 깊게 드리워져 있고 일제의 수탈에 저항의 몸부림을 쳤던 이 지역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고조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처음부터 적극적인 팀 사역(복음, 의료, 교육)으로 대처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구역에 스테이션을 설치하고 거점을 중심으로 한 선교를 펼쳤다. 그 거점 중심 선교가 더 성공적인 선교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스테이션 운용에 익숙한 그들만의 독특한 지역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척 시대부터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했던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는 아시엔다(아시엔다(Hacienda)는 스페인어로 대항해시대 중남미에서 시행했던 대토지 소유제도를 지칭)와 유사한 스테이션 운용 자체가 이미 그들이 오랫동안 공유해 왔던 일상의 문화였다. 이런 이유에서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스테이션 시스템을 그들은 손쉽게 적용할 수가 있었다.

   
군산, 익산. 김제 복음화율이 그렇게 높은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이 지역에서 펼쳤던 선교사들의 선교전략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게도 이 지역은 초기선교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 지역이었다. 사진은 전킨 선교사의 가족.

이와 같은 남장로교만의 독특한 배경과 대응 방식을 바탕으로 이 지역에 부임한 선교사들은 호남선교에 효율적인 거점으로 일단 전주와 군산을 물망에 올렸다. 전주는 전라도의 수부首府였기 때문에 지부 설를,  당연히 여겼고, 군산은 선교 물자를 공급하는 물류의 통로라는 이유에서였다. 수로(水路))의 유리한 조건을 가진 군산은 배를 이용해 접근이 쉽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육상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물길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놀랍게도 이미 선교사들은 개항 이전부터 수탈로 얼룩진 탁류(濁流))의 금강이 아니라 전도선에 복음을 태우고 너른 호남평야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실어 나를 수 있는 희망의 물줄기로 보고 있었다.

이렇듯 그들만의 배경과 방식으로 대응한 선교전략이 맞아떨어지며 이 지역 선교는 빠르게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Ⅱ.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하위렴 선교사의 사역을 정리하면서, 그의 역할과 비중에 주목하고 그가 가시화했던 남장로교 선교전략이 이 지역 선교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의료, 교육, 복음 사역 등의 분야에서 전천후 사역을 할 만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선교사였으나 공교롭게도 그가 사역했던 3개 선교지부 어디서도 스테이션 조성이라는 마뜩잖은 일이 맡겨지고 있었다. 전문적 지식이나 안목이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역이었으나 그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그의 역량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완수해 냈다.

병원과 학교건축 그리고 교회 설립 등을 포함한 유형의 선교기지 조성은 물론 나아가 공의회와 노회 설립에도 깊숙이 관여해 교회조직과 제도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도 그의 수완(手腕)은 빛을 발했다. 이처럼 그가 구축한 유무형의 인프라를 통해 그 이후의 호남선교는 발길이 훨씬 수월해지고 있었다.

이렇듯 그는 남장로교의 선교 기반을 다듬어 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예기치 않은 시련이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7인의 개척선교사였던 아내 데이비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선교 초기부터 그의 사역에 위기를 맞아 군산지부의 전킨과 사역지를 교환하기도 하고, 얼마 후 에드먼즈와 재혼하면서 그의 선교 여정에 재시동을 걸었으나 무리한 사역은 그의 섬약한 체질을 끊임없이 괴롭히기도 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부진했던 목포지부가 맡겨지고 있을 때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교회, 학교, 병원 등 어는 것 하나도 빠짐이 없이 정상화시키는 동안 자신은 물론 아내 에드먼즈마저 다시 병고에 시달리면서 또 한차례 시련이 찾아왔다.

1912년 미국에 돌아가 3년 가까운 치료와 요양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이때가 선교사로서 그의 진퇴를 결정해야 할 만큼 그에게 닥친 최대의 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으로 복귀해 몇 해 만에 군산 선교를 정점에 올려놓으며 기염을 토했다.

1922년 군산지부를 방문했던 해리 로디스(Harry A. Rhodes)목사(프린스턴 신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회 위원, 연희전문학교 교수, 조선 예수교서회 편집위원 등으로 활약했다.)는 이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 25년 동안 군산에서 거둔 놀라운 결실은 씨뿌리고, 가꾸고, 돋우며 수고한 모든 사역자의 결과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Harry A. Rhodes, "A Visit to Kunsan" The Presbyterian Survey, Vol. 14, No. 7, Jul. 1924, pp. 476-477)

 

관할지역의 크기나 스테이션의 위치 등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75개의 교회에 5,000여 명의 교세를 일구고, 성인 세례교인만 1,500명에 이르는 부흥에 크게 놀라워하면서 손배돈과 동역하며 전국 남장로교 병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뤄낸 야소병원에 와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복음을 들고 외길을 줄달음쳐 사명을 완수한다고 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증인의 사역은 바로 그분의 임재와 함께 부어지는 능력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위렴 선교사가 시련을 딛고 이 땅에서 이뤄낸 사역의 결과물들 역시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조선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 그 자체였다.

하위렴 선교사가 조선 땅에 쏟아부은 고귀한 헌신의 자취를 추적하며 그의 선교 여정을 드러내 보고자 한 것은 전체적인 한국 선교역사를 바라보게 하는 귀중한 단서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키워낸 맹아(萌芽)))로부터 그렇게 풍성한 결실을 수확하면서도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송구스러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백종근(白鐘根) 목사는 전북 군산에서 출생하였다. 한양대 공업화화과(BS), 동 대학원(MS), 산업연구원(KIET)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M. Div)를 획득하고 미국장로교(PCUSA) Covenant Presbytery에서 안수를 받았다.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하여 목회 사역을 내려놓았다. • 저서: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 ,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 『예수가 울다』 설교집이 있다. • Email: whitebell01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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