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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예배 개혁의 과제
이승구 교수 진단
2022년 02월 25일 (금) 10:07:14 이승구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코로나 19가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비대면예배가 이뤄지면서, 예배에 대한 개념이 무너졌다. 더구나 지식과 과학의 발달, 그리고 인터넷의 빠른 속도의 증가와 함께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가상공간도 출현하고 있다. 교회의 공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바르게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성경적인 예배에 대한 경계를 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2월 22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한국장로교총연합회에서 주관한 ‘칼빈의 개혁주의신앙과 예배회복’이라는 세미나에서 이런 고민을 다루었다. 이 세미나에서 발제한 이승구 교수의 ‘공예배의 방향: 칼빈과 개혁신학의 성경적 입장에서 본 한국교회 예배 개혁의 과제’라는 발제문을 전제한다. 이 발제문을 통해 한국교회가 고민해야 할 예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편집자 주-
 

공예배의 방향:
칼빈과 개혁신학의 성경적 입장에서 본
한국 교회 예배 개혁의 과제
1)

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이승구 교수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이 세상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장소에서보다 예배가 많이 행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많은 예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우려를 한다.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고 예배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목회와 신학」 374호 (2012년 4월호)의 특집 논문들과 컨퍼런스 보도 등이 이를 여실(如實)히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2) 우리 모두는 이 땅의 예배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이멀징 예배(emerging worship)를 포함한 여러 대안 예배에 대해서도 개방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루터파적인 모델을 활용한 성찬 예배나 WCC의 한 위원회가 제안한 BEM(세례와 성찬에 대한 통일안, the Lima Text) 제안들이 나타나고 많은 이들이 이것을 따라 갈 때 한국교회의 예배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또 심각한 걱정이 들게 된다.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충심으로 동의하면서 과연 어떻게 나아가야 우려할만한 제안을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예배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 갈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에 종교개혁시대 개혁자들의 노력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개혁자들(reformers)의 제안과 모범을 참고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어떤 것인지를 살피고, 과거 교회가 이런 성경적 예배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바를 살펴보고서 이런 성경적 예배를 하기 위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들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3)
 

1. 예배에 대한 성경적 이해

예배란 무엇인가? 엄격하게 말해서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에 감사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존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서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προσκυνέω)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이 말해주고 있는 우주적 예배의 정황(계 5:13)을 미리 이 땅에서 선취하여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최후의 할렐루야 찬양은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 가운데서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하늘에 천사들과 온전케 된 성도들과 다 함께 모여서 그 천상의 예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4) 이런 우주적 예배에 참여하는 교회의 예배는 (1) 무엇보다 구속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하는 것이고,5) 또한 (2) 하나님께서 예배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당위이다.6) 그러므로 기독교회가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카슨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성경적 종교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성, 다시 말해서 예배”이기 때문이다.7) 그러나 역사상에서 교회가 그 예배를 주께 드리는 방식을 이해해 온 것은 상당히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비교적 공식적인 예배의 형태를 강조하던 고전적 예배 유형과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를 강조하는 유형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유형은 시대에 따라서 진자 운동을 하면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 가는 방식으로 진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예배 유형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우나 대개 회당 예배의 형태와 비슷한 형태의 예배가 드려지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무질서한 형태의 예배가 나타나기도 해서 바울은 모든 것을 질서 있고 단정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특히, 고전 14:40). 그 권면에 따라 예배가 일정한 형식에 따라 드려지다가 그것이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의식화하는 경향을 가지자, 다시 자유로운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의 자유스러운 예배(free worship)와 극단의 퀘이커적인 예배 형태도 나타났다. 다시 근자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말미암아 예배에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강조하는 추세가 나타나는가 하면, 전통적 예배 형식과 전통적 예배의 개념을 깨고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 등으로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실험하는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예배는 비교적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예배가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려지게 된다는 것은 개혁 교회와 장로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 소망교회 예배 모습(소망교회 홈페이지 캡쳐, 자료 화면) 

그러나 이렇게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와 루터파와 개혁파의 예배 이해를 비교할 때, 천주교회는 예배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요소들은 모두 사용하며 특히 과거의 전통 가운데서 의미 있게 사용되어 온 것의 계속적인 사용을 지향하여 나가는 데 비해서, 동방정교회와 루터파 교회는 그 가운데서 성경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요소들은(예를 들어서, 상[像, image] 숭배) 제거하고,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은 요소들에 대해서는 소위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여기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는데 반해서, 개혁 교회에서는 오직 성경이 규정한 것만을 중심으로 하여 주께 예배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 개혁 교회의 예배 이해의 독특성이 있다. 칼빈은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던 것이다.8) 사실 그는 하나님께 명령하신 것을 넘어서 교회가 어떤 새로운 규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거부했다. 사람들과 교회의 “자의적인 주권의 주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침해이다.”9) 이런 칼빈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은 금해진 것이다”는 원칙이 준수되었다.10) 그러므로 개혁파에서는 예배의 요소들과 예배의 방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해서 주께 드리려고 노력해 왔다.

이런 원칙에 따르는 개혁파 선배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첫째로, 개혁 교회는 다른 모든 바른 교회들과 함께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질 수 있는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προσκυνέω) 것이므로,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삶과 십자가의 구속에 의존해서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데, 이는 오직 성령에 의존할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그들의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기독교에서는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고, 사람의 의라도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것이므로 이것으로 하나님께 감히 나아가 경배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에만 의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 안에서 나의 영이 주께 경배해야 한다. 이것이 “영으로”(우리말 개역 성경에 “신령으로”라고 번역된 ἐν πνεύματι) 경배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모든 진정한 예배는 이런 뜻에서 성령님 안에서 우리 존재 전체가 경배하는 영적인11) 활동이 다(προσκυνέω). 그러므로 하나님께 경배할 때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공경하여 그 앞에 절을 하겠다는 소원이 있어야 하고, 내가 절하는 그 대상이 받아야 할만큼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크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알며 우리의 일생, 몸 전체를 다 드려서 섬겨도 그것으로 부족할 정도로 크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알아야 하며,12) 그 엄위에 비해 자신은 스스로의 자격으로는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존하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두려운 심정을 가지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해서 담대하게 당당하게 경배하는 심정으로 나아가 섬겨야 한다.13) 공예배에서는 온 교회가 함께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영 안에서” 경배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영적인 예배”(spiritual worship)는 “성령에 의해서 공인되고, 성령님에 의해서 규제되면 성령님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인 것이다.14) 이것이 참된 의미에서 영적인 예배, 카리스마틱한 예배이고,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신오순절주의자들이 아니라 이런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카리스마틱한 것이다.15) 이런 “성령님 때문에, 사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 앞에 모여진 믿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이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다”고 할 수 있다.16)

둘째로 참된 예배는 “진리 안에서”(ἐν ἀληθείᾳ) 드려져야 한다.

개혁파적 예배 이해는 바로 이점에 가장 큰 강조점을 둔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파 선배들이 진리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보증이 있는 예배의 요소들만을 사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고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려고 한 것이다. “예배의 방식과 요소들에 대해 하나님 말씀의 공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17) 신학과 교리에서 만이 아니라 예배에서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개혁파 선배들은 강조했다.18) 예를 들어서, 칼빈은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인간의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고 말한다(Institutes. IV. x. 30).

그리고 벨직 신앙 고백서(1561)에서는 아주 분명히 천명하기를 교회의 치리자들은 “우리의 유일하신 선생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을 떠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적 창안물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사람들이 도입하여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양심을 얽어매고 강요하는 것들 모든 법들을 거부한다”라고 하였다.19)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1647) 제51문에서는 십계명 제 2계명과 관련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형상으로 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외에도 “그의 말씀 가운데 정하지 아니한 어떤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이 금해진 것이라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westminster divines) 예배에 관한 문제를 양심의 자유의 문제로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은 그 누구도 규제할 수 없고 오직 양심의 주님(Lord of conscience)이신 하나님께서 내신 법에만 매일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신 것을 행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개혁파 선배들은 특히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규정과 모범을 찾아서 그에 따라 예배하려고 했다. 신약 성경의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회당 예배에서와 같이 공기도가 있었고(행 2:42; 딤전 2:1, 8; 고전 14:16; 엡 5:20), 성경 봉독이 있었으며(딤전 4:13; 살전 5:27; 살후 3:14; 골 4:15, 16; 벧후 3:15, 16; 계 1:3), 설교로 그 내용을 풀어 주는 일이 있었다(눅 4:20; 딤후 3:15-17; 딤후 4:2). 또한 새언약 백성들의 찬송이 명령되었고, 시사되었으며(엡 5:19; 계5:9-13; 11:17f.; 15: 3,4), 찬송과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일이 관례화 되었다(고전 14:16; 계 5:14; cf. 롬 1:25; 9:5; 엡 3:21). 가르침은 식탁 교제, 특히 성찬과 연관되어졌고(행 2:42; 20:7, Cf. vv. 20, 25, 28), 이 때의 감사 기도가 언급되었으며(고전 11:24), 세례가 있고 이와 신앙 고백이 연관되어졌다(벧전 3:21). 그리하여 공적인 신앙 고백이 시사되고 있다(딤전 6:12; 벧전 3:21; 히 13:15; cf. 고전 15;1-3).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연보가 때때로 함께 나타났고(고전 16:1-3; 고후 9: 11-15; 빌4:18), 백성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후 13:13; 눅 24:50; cf. 민 6:22-27).20) 그러므로 예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클라우니의 묘사는 매우 간단히 성경적 예배의 요소와 그 예배적 의미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또한 서로 아뢰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찬양하며, 그가 제정하신 성례 가운데서 그의 구원을 송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면전에 모이는 것이다(행 2:1; 4:23-31; 5:42; 13:2; 고전 11:18-34; 14:23-25; 엡 5:19, 20; 골 3:16; 벧전 3:21).”21)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요소들만을 가지고 예배하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는 그들의 정황과 지혜에 따라 적절한 순서를 마련해서 예배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점은 칼빈이 강조하여 말한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인 예배의 순서를 명확히 지시해 주지 않으셨으므로 각 시대와 여러 지역의 교회가 적절히 순서를 만들어 바르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22)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는 예배의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2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51문에 대해 설명하면서 윌리암슨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들이 종교적 가르침과 예배의 영역에 도입될 때마다 제 2계명을 위반하게 된다. 또한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않은 예배가 오늘날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수많은 개신교 교회들을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24) 이렇게 선배들의 귀한 노력과 피 흘려 세운 성경적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을 다시 바로 잡기 위해 우리의 장로교 선배들이 예배를 위해 하여 온 노력들을 잠시 점검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기독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께서 규정하시고 제시해 주신 것을 존중하며 그것에 충실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와 통제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2.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노력들

과거의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는 예배에서도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Lordship)에 제대로 반응하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하여 왔다.

첫째로, 개혁자들의 예배 개혁은 이와 같이 예배가 “제사”(sacrifice)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25) 그리고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임을 강조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근거해서 주께 드릴 진정한 제사 행위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고 한 것이다.26)

둘째로, 루터파나 쯔빙글리파 사람들과 함께 칼빈주의적 사람들은 예배당 안에 특히 예배 때에 상(像)이 사용되는 것을 엄히 금하여 왔다. 루터는 예배당 안에 수많은 성상(聖像)들이 있는 것은 “상(像)을 만들어 그 앞에 경배하지 말라”는(출 20: 4-5; 신 5:8-9)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면서 예배당 안에 상(像)들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현한 시민들은 쯔빙글리(Zwingli)에게서 비슷한 설교를 들은 스위스 츄리히(Zurich) 시의 성도들이었다. 말씀에 따르는 즉각적인 반응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런 예가 아닐 수 없다. 이전까지 수많은 상(像)들이 있던 바로 그 예배당에서 계속 예배하면서 그 예배당 안에 있던 십자가상을 비롯하여 여러 상(像)들을 다 제거한 것은 예배의 개혁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27)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109문답에서도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삼위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만드는 것과 이 형상이나 이 형상 안에서나 이것에 의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제 2 계명에서 금하여진 것임을 아주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어떤 상과 그림도 허용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화상(icon)을 사용하던 동방 교회에도 동의하지 않는 개혁파의 전통이 여기에 있다.

셋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에서는 전통에 근거해서나 우리 자신이 고안해 내서 성경 외의 어떤 요소들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을 금하여 왔다. 개혁파는 루터파적인 예배도 더 성경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향과 촛불 켜는 것, 예배 중에 무릎 꿇는 것,28) 특히 성찬을 받을 때에 무릎을 꿇는 것,29) 예배당 안의 십자가 상,30) 사순절31) 등은 신약 성경 가운데서 예배에 대한 지침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예배에서는 모두 제거하였다. 그들은 신약 성경에서 제시된 요소들만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했으니, 예배와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침을 내려주지 않았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예배에 대하서도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다고 했고, 그렇게 성경 가운데서 주신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에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했다. 칼빈은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던 것이다.32)

사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넘어서 교회가 어떤 새로운 규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거부했다. 사람들과 교회의 “자의적인 주권의 주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침해이다.”33) 칼빈은 예배와 관련해서도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라고 말한다.34)

칼빈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은 금해진 것이다”는 원칙이 준수되었다.35)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정하지 아니한 어떤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도 금해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36)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에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 하려고 하는 열심에서 천주교 예배 중에서 성경적 근거, 특히 신약 성경적 근거를 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제거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기를 원했는가를 잘 나타내어 보여 주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납할만한 방식은 주께서 친히 정하셨고 당신님 자신의 계시된 의지로 제한하셔서, 그가 사람들의 상상과 고안에 의해서, 사단의 시사에 의해서, 그 어떤 가시적 표현 아래서, 또는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경배를 받지 않게 하셨다(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XXI, 1). 역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 109 문답>은 다음과 같이 계속 진술한다:

“제2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라도 인정하는 것들이며, 거짓 종교를 용납하는 것과 ......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로 예배에 추가하거나 삭감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하게 하는 시민적 고안들입니다.....” 경건한 동기에서나 선한 의도로 시작된 것이라고 그것이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은 우리의 예배에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작성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예배에 향이나 의식적 촛불이 도입되는 것이나 성찬 때에 떡을 무릎을 꿇고 받는 일 등을 뜻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선배들이 의식적으로 배제한 모든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매우 주의하면서 그것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예배에로 다시 들어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넷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는 하나님 예배에 적합한 회중 찬송을 회복시키고 강조해 왔다. 특히 시편 찬송(the singing of Psalms)은 성경에 대한 강해(설교)와 함께 종교 개혁의 특성이라고도 불린다.37) 성도들로서는 회중 찬송을 함께 찬양하여 드리는 것이 예배에 참여하는 아주 주요한 한 형태이다.

칼빈은 자신이 친히 시편을 운율에 맞게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하였고 당대의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던 마로(Clément Marot, 1497-1544)의 운율적 번역을 사용하여 찬송케 하기도 했다.38) 1543년에 나온 마로의 cjc 제네바 시편가에는 49편의 시편이 불러로 번역되었고, 시므온의 노래, 마리아의 찬가, 십계명, 사도산경, 그라고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포함되어 있었다.39) 그는 이미 제네바의 1537년 규례(the Article of 1537)에서 “시편들은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올려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찬양으로 그의 이름의 영광을 부르며 높이며 열심있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40)

이미 1539년에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불어 시편 찬송 초판을 발행하였는데, 여기엔 18편의 시편과 3편의 영창(canticles) 실렸고(“이제 족하옵나이다”(the Nunc dimittis)라는 시므온의 노래, 눅 2:29-32, 십계명, 그리고 사도신경?),41) 이 중 7편은 칼빈이 친히 번역했다고 한다. 이 시편 찬송들이 후에 제네바 시편 찬송(the great Genevan Psalter, 1562)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42) 마로는 1544년에 죽었기에 나머지 번역은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하여 1562년 시편가를 낸 것이다.43)

이 시편가의 곳은 Louis Bourgeois (c. 1510-61)이 1545 (혹 그 이전부터?) -1557 사이에 당했고, 그 후에는 Claude Goudimel (1510-72)dl 감당했다고 하다.44) 그리하여 시편 찬송은 핍박받는 위그노들의 특성이 되었다. 물론 개신 교회는 시편만을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후대의 규정적 원리는 시편만을 고집하고 나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지나치게 나간 것은 문제이지만, “시편의 하나님 중심적 경건의 풍성함이 개신교적 헌신을 특징 짖도록 했다”는 말은 참된 것이다.45)

이 점은 모든 회중이 참여하는 공예배의 공적이며, 공동체적 성격의 한 부분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개혁파 선배들은 예배의 공적이며 공동체적인 성격, 모든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다섯째로,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는 공인되고 모든 이가 그에 따라야 하는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보다는 예배 모범(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의 전통을 남겨 주었다. 예배 모범은 강제적인 것이기보다는 예배에 대한 성경적 풍성함에 충실할 수 있는 모델(model)을 제시해 주는 데 있다. 이는 가장 성경에 따르는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하면서도 예배의 비본질적인 소위 “정황”(circumstance)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일정한 양식을 강제하지 않고, 각 교회와 회중의 자유를 존중하는 전통인 것이다.

장로교회의 예배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바로 예배의 요소들(elements)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성경적 근거를 따져서 그 요소들을 찾고 그에 충실하려고 하면서도 예배의 정황들(circumstances)에서는 자유를 강조하여 어떤 고정적인 의식(liturgy)을 확정짓고 그에 집착하려 하지 않은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개혁파 교회는 결코 어떤 예전적 운동을 벌여 나가지 않았다. 죤 머레이는 “개신 교회들에서 예전적 운동(liturgical movements)이 성행하는 것은 (교회가) 타락한 표식들의 하나이다”라고 말한다.46)
 

3. 몇 가지 역사적인 예들에 대한 고찰

그러면 이제 장로교회의 풍성한 예배 모범의 전통을 따라서 이제 개혁파적이고 장로교적인 예배 모범 몇 가지를 열거하고 그 장점들만을 중심으로 우리의 예배모범을 제안해 보기로 하자. 이 목적은 어떤 고정적인 의식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로교 예배 신학의 특성인 자유의 신학에 대립하는 것이다. 단지 풍성한 전통과의 대화 가운데서 가장 성경에 충실한 모범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3-1. 칼빈의 예배 이해와 예배 순서에 대한 칼빈의 제안

칼빈은 (1) 우리의 성도다운 삶과 함께 (2)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sacrifice of thanksgiving)로 이해하면서 이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드리신 속죄의 제사(sacrifice of expiation)에 근거하여 드려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의 모든 기도, 찬양, 감사,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종국적으로 더 큰 제사(the greater sacrifice)에 의존하니, 이 더 큰제사에 의해서 우리는 영혼과 몸 모두에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외적 행위들이 하나님 섬김에 사용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먼저는 우리 자신이, 그 뒤에는 우리에게 속한 것 모두가 하나님께 성별되고 드려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는 것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기 위해 열심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Institutes, IV. xviii. 16).

이렇게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과 예배로 “그들의 존재 전체와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 갚아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드린다(Institutes, IV. xviii. 13).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는 칼빈은 1541년 제네바로 다시 왔을 때는 스트라스부르의 부셔(Bucer)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된 예배 식순을 채용하여 제네바 예배식을 제안하고 실천하였다.47)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스트라스부르의 예배 형식을 취하여 그 상당한 부분을 빌어 썼다.”48) 이는 그가 1542년에 낸 “초대 교회의 관례에 따른 기도 형태와 성례 집례 방식”에 나타나 있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제안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49)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기원(votum or adjutorium: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있도다”)
영광송(Gloria)
죄의 고백
용서에 대한 성경 말씀 낭독과 주의 용서 선언의 말 선언
시편 찬송(운율에 맞춘 시편, 또는 십계명의 앞부분,
각 계명에 대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로 반응함)
거룩송(경우에 따라 생략)
조명을 위한 기도
50)
성경 봉독
설교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collection]
중보 기도
[뜻을 풀어 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회중이 함께 부르는] 사도신경
시편 찬송
아론적 축복기도)
51)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Room)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collection)
중보기도
(뜻을 풀어 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성찬 준비 하는 중에 회중이 함께 부르는) 사도신경
성찬을 위한 기도
성찬 제정 말씀 봉독
성찬을 위한 권면
성찬에로의 초대
분병, 분잔, 성찬
성찬 이후의 권면
기도, 시므온의 찬미(Dunc Dimittis, 눅 2:29-32)
아론적 축복 기도

그러므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의 부셔(Bucer)를 따르면서 중세에 존재하게 된 요소들과 의식들을 거의 모두 완전하게 버려 버렸지만 “예배 의식의 전통적 형태를 조심스럽게 유지했다”는 하게만의 말에 우리는 상당히 동의할 수 있다.52)

3-2. 화란 개혁파의 예배 의식

화란의 캄뻔 신학교 실천 신학 교수였던 끌라스 루니아(Klaas Runia)는 16세기와 17세기에 화란 개혁파 교회들이 비슷한 예배 의식을 사용하였는데, 그 예배 의식이 어떤 대회나 총회에서 결정되어, “그 어떤 대회나 총회에서도 예배를 위한 온전한 의식(liturgy)을 준비하거나 강요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53) 가장 예배 의식에 대한 언급이 많아 예배 의식적 회의(litergical synod)라고 불리우는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574)에서도 교회들에 고정된 순서를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루니아는 강조한다.54) 이 때 결정 사항에 비추어 볼 때 당시의 예배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기원(votum), 기도, (시편 찬송), 설교, 기도, 신앙 고백, 축도. 그리고 오후 예배에서는 설교 앞에 십계명 읽기가 있었고, 헌금은 예배당 입구의 헌금궤에 드려졌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까지의 화란 개혁파 교회의 신학과 예배 의식 형성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은 영국 런던으로 피나갔다가 프랑크푸르트(Frankfort), 팔라티네이트의 프랑케탈(Frankenthal in the Palatinate) 등지로 옮겨 다니던 화란 피난민 교회의 목회자였던 피터 다떼누스(Peter Dathenus)라고 여겨진다. 팔라티네이트의 예배식은 요하네스 아 라스코(Johannes à Lasco), 칼빈(Calvin), 우르시너스(Ursinus) 등의 영향을 받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이 아닌 인사(salutation), (긴 죄의 고백을 포함한) 설교전의 기도, 성경 봉독, 설교, 죄의 고백과 사죄나 풀지 않음의 선언, (감사와 중보의) 긴 기도, 시편, 아론적 축도.55) 이 바로 이 예배 순서가 소위 베셀 모임(the so-called Convention of Wesel, 1568)과 여러 대회의 의장으로 선임된 바 있는 다떼누스에 의해서 화란 개혁파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화란에서의 중요한 시도로 미델부르그 대회(The Synod of Middelburg, 1581)의 결정 중 하나인 별개의 죄용서의 선포는 불필요하다는 선언을 언급할수 있다. 사제적 의식을 드러내는 선언보다는 죄용서와 사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설교로 충분하다고 여겨진 것이다.56) 점차 죄의 고백조차도 화란 개혁파 예배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는 목회기도 안에 이미 삽입되어 있다는 의식이 작용한 듯하다.

16세기말에 이 엄격하고 단순한 예배식이 더 단순화되어 일부 순서, 즉 성경 봉독과 시편 찬송이 예배 이전 순서로 옮겨진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인들이 쓸데없는 잡담을 하므로 혼란케 되지 않도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후에 이 예배 전 순서에 십계명 읽기와 사도신경 고백이 포함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이 모든 순서가 다시 본 예배 순서 속을 들어가게 되었다.57)

도르트 대회(the Great Synod of Dort, 1618-1619)에서는 예배 의식 개정을 위한 위원회를 선정했으나 이 문제를 다룰 충분한 시간을 갖지는 못하고, 아침 예배 때 십계명을 읽도록 하고 오후 예배는 요리문답 강해 예배로 드리도록 지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최종적 예배 순서를 각 지교회(肢敎會, local church)의 결정에 맡겼다. 여기에 개혁파 예배 신학의 자유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예배하고, 그 요소들만을 사용하되 그 원칙을 가지고 자유롭게 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들은 예배 의식이 “단순하고 정신차린 것”(simple and sober)이기를 원했다.58) 대개 이 때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기원(votum, 시편 124:8), 사도적 인사, 시편송(마리아의 노래, 사가랴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 주기도문에 곡을 붙인 것, 사도 신경에 곡을 붙인 것 등 11편의 곡), 십계명 봉독(장로들 중 한 분), 통회와 권면의 시편(오후 예배에는 장로 중 한 분이 사도신경 읽음), 성경 봉독(장로님들이 신구약에서), (죄 용서와 중보기도 포함한) 긴 기도[목회기도], 시편송(부르면서 헌상), 설교(대개 둘째 부분 후에 시편송 부르고 셋째 부분 설교하고 듣기), 적용을 위한 기도, 시편송, 축도.59)

그런데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화란에서 소위 예전 운동(liturgical movement)이 일어나서 단순한 이전의 예배 의식에 변화를 시도하는 운동이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고 한다.60)

3-3.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제안들(1644)

영국 국교회의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대안으로 제시된 이 예배 모범은 따라서 공동 기도서의 의무적인 사용이 이미 정해진 기도문의 낭독(낭독 기도)을 강요하고, 다른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막으며, 설교를 줄이게 하고, 예배를 기계적으로 만드는 등 참된 예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제안된 것이다.61) 그러므로 역사적 장로교주의는 예배의 질서와 일정한 순서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예배의 자유도 같이 고려했다는 클라우니의 말이 옳은 것이다.62)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은 공예배의 요소들을 묘사하고 교회의 공예배를 위한 순서와 진행 방법에 대한 제안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의무적인 강요가 아니라 예배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풍부한 것들을 표현하는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다.

Alexander Henderson, Samuel Rutherford, Robert Baillie, George Gillespie 목사, 와 같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투표는 할 수 없었던) 스코틀랜드 신학자들과 Thomas Goodwin, Philip Nye, William Bridge, Anthony Burgess, Edward Reynolds, Richard Vines, Stephen Marshall 그리고 Dr. Temple 등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초안을 작성하고, (11월 27일에 완성되어 의회의 인준을 받은) 혼인과 장례에 대한 모범을 제외하고서는 1644년 11월 22일에 의회(Parliament)의 인준을 받아 공포되었다.63) 이를 작성한 사람들은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를 굳게 믿던 분들이었다.64) 그것을 순서를 중심으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를 얻을 수 있다.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예배에로의 부름(Call to Worship)
예배를 위한 기원(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은혜와 조명을 주실 성령의 임재를 기원)
구약의 말씀(한 장)
운율에 맞춘 시편가
신약의 말씀(한 장)
운율에 맞춘 시편가
죄 고백과 중보기도(Prayer of Intercession)
강설
(구속과 복음과 말씀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Room)
성물을 드리는 일(Offertory)
성찬에의 초대(invitation=Fencing the Table)
성찬을 위한 감사 기도
성찬 제정의 말씀(고전 11장) 봉독
교훈의 말
봉헌 기도
분병, 분잔
참여와 묵상
성찬에 참여한 자다운 생활을 위한 권면
성찬후의 기도
시편 찬송
축복 기도

이 예배 모범에 대해 논의를 할 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 참석자들 사이의 별로 큰 의견의 차이가 있지 않았다고 하니 당대에는 예배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의견의 일치가 있었던 듯하다. 특히 교회 정치 문제에서의 이견들과 오랜 논의와 비교하면 이는 상당히 비슷한 의견들이 당대의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안식일의 성화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그랬었다. 논의가 된 문제로 성경 봉독 할 때 목사 이외의 사람이 읽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목회자가 되기로 준비하는 이들(probationers)이 때때로 봉독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고 한다.65) 성찬과 세례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논의가 있었고 특히 성찬을 위한 성도들의 배열의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은 제안된 견해, 즉 성찬상을 중심으로 앉아 성찬을 나누는 것을 옹호하고, 독립파 사람들이 이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성도들이 그들의 회중석에 앉아 관전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66) 결국 성찬상(table) 중심의 배열을 예배 모범은 제안하고 있다.

이런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살피면서 클라우니는 장로교 예배를 특징짓는 근본적 확신들로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하고 있는데,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그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67)

첫째로, 다른 모든 측면(즉, 신학의 구조와 삶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러하지만 개혁파에서는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러므로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어귀로 잘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예배의 섬김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골 3:17; 엡 5:20; 고전 10:31)”(111). 그러나 삶 전체가 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우리 주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을 가지셨듯이 공예배의 필요성이 있다. 클라우니는 시편 찬송과 주의 날을 예배의 날로 엄수하는 것이 장로교 예배의 송영적 성격을 강화시켜 준다고 지적한다(112).

둘째로, 클라우니는 장로교 예배에서는 성경에 대한 강조가 큰 특징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조, 특히 성경의 충족성의 강조가 장로교 예배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경륜 전체 이외에 “성령으로부터 왔다는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전통으로” 그 무엇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 6). 물론 “종교 개혁 이전에도 뛰어난 설교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에서 새로운 것은 성경의 내용에 대한 체계적인 설교이다”(113). 그러면서 그는 그 예로 칼빈이 거의 성경 전부를 설교한 것을 들고 있다.68) 개혁파 교회에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듣고 설명하여 주는 일이 예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다(113). 그리고 예배도 성경으로부터 온 요소들만으로 조직하여 드리는 것이다.

셋째로, 클라우니는 성경의 언약 신학을 반영하는 것을 장로교 예배의 특성으로 언급한다(118). 특히 언약의 자녀들과 언약 백성의 연대성을 강조하며 가정 예배와 요리 문답 교육에 대한 강조, 그리고 치리의 중요성과 의미가 언급된다.

넷째로 장로교 예배는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the Christian Sabbath)로 여기는 장로교적 주일 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한다(120).

마지막으로 클라우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인 자비의 사역(집사직의 사역)에 대한 강조를 장로교 예배의 특성으로 언급한다(120).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를 안식일의 의무로 권고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클라우니의 관찰은 제시된 순서를 그저 교조적으로 반복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모범으로서의 성격을 잘 파악하며 그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4. 로버트 레이몬드의 제안

근자에 장로교 신학자가 조직신학 교과서 가운데서 예배 순서의 한 예를 제시한 것을 검토해 보는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근자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근거한 조직신학 책을 낸 로버트 레이몬드는 예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히고 자기 나름의 순서를 제안하였다.69)

예배에 대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선택할 자유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에 있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려한 칼빈과70)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제시하신 방식에 따라 예배할 것을 제시한다(870, 868, 877). 그러나 이것은 예배의 요소들에 관한 것이지, 예배의 때나 장소, 예배의 순서들은 “자연의 빛과 기독교적 사려 분별에 의해, 세상의 일반적인 규칙들에 따라서” 질서 지워져야 한다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I/vi)에 따라 진술한다(870). 그리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요 4:24)과 관련해서 이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방식에 따라 드려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871).71) 그리고 그런 예배는 성경적이고, 영적이고, 단순하며, 장엄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예배가 될 것이라고 한다(872). 예배의 시간으로서 그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로서의 주일 성수를 강조하며 이를 안식일 준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877).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챨스 핫지의 다음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주간의 첫날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무시하도록 하라. 그러나 부활 사건이 어디에서나 알려지고 기억되기를 원한다면 그 날을 부활하신 구주께 대한 예배에로 거룩히 드리도록 해야 한다”(877).72))

이런 원칙에 따라서 레이몬드는 지난 세대의 부흥회적 예배와 오늘날의 도자 예배의 아직 신자가 되지 않은 분들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한다(873). 또한 이런 예배들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인 장로 교회들의 예배도 그 전통을 알 수 없는 예배가 되어 가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 하나님은 가슴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으로도 경배되어야 한다; 그에 대한 믿음은 이해를 요구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873). 그러면서 이를 위해 신학적으로 건전한 회중 찬송과 시편과,73) 성경적으로 근거한 바르게 해석된 설교,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 그리고 특히 이 시대에 필요한 율법의 제 3의 용에 대한 강조 등이 포함되어야 하며, 광고 등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다 배제되거나 필요한 광고의 경우에는 예배 전후로 나가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874). 이 모든 것을 반영하면서 레이몬드가 제안하는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875f.):

말씀의 제의(Liturgy of the Word)
말씀을 위한 준비(Preparation for the Word)
(시편 인용이나 찬송을 사용한) 예배에의 부름, Call to Worship
찬양과 경배의 찬송이나 시편, 또는 찬양과 은혜와 조명을 비는 기도 (회중이 함께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마쳐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위엄과 우리의 죄인 됨을 깊이 새기게 하는 구약 성경 봉독
죄의 고백과 용서를 비는 기도(이는 목회자가 대표로 하는 목회 기도일 수도 있고, 기도문에 따라 하는 기도일 수도 있고, 교독 기도일 수도 있다)
죄 용서의 확신Assurance of Pardon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찬송 또는 시편
헌상
중보기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신약 성경 봉독
말씀의 선포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준비하도록 하는 찬송
조명을 위한 목회기도

설교 본문이 되는 성경 봉독
설교
적용을 위한 기도
하나님 말씀의 선포에 반응하는 찬송이나 시편
축도(만일 성찬 예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다락방의 전례(성찬 전례) (Liturgy of the Upper Room)
(반응의 찬송)
참된 신자들에 대한 주의 상에로의 초대와 불신자들을 금함
예배 송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찬송
사도 신경 고백
성찬 제정의 말씀 낭독
성별을 위한 기도
떡의 분배
잔의 분배
감사 기도
찬양의 찬송이나 시편

축도
 

4. 성경의 가르침과 서구 교회의 전례에 근거한 한국 장로교회를 위한 예배 모범

이제 성경의 가르침과 과거 개혁파 교회의 예배 모범을 반영하면서 한국에서 신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김홍전 박사에 의해서 제안된 예배의 순서에 근거해서 한국 장로교회적인 예배 모범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모아 반주자가 주께 대표로 찬양을 올리고 모든 성도는 그 찬양을 속으로 따라 같이 마음을 모아 드리고(전주, prelude) 그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데 바로 성경에 있는 기도인 시편을 낭송하여 함께 기도하고, 가장 모범적인 기도인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린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기리는 찬송을 드리고(gloria), 시편을 교독한 후 (우리의 믿는 바로 사도 신조로 하나님과 온 세상 앞에 공표하고)74)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리는 찬송을 드리고(sanctus), 목회자가 목회 기도를 하여 온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진전해 나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근거해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경배 송을 드리고(worship),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성경 봉독과 듣기) 헌상(獻上) 예식을 하여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자신들을 다 주께 드려 주께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용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공로에 싸서 주님께 드리는 헌상 찬송(offertorium)과 헌상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다른 지체들과 함께 받고, 간절한 마음으로 적용을 위한 기도를 하고,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는 송영(doxology)을 드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반주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드리는 후주와 함께 우리도 하나님을 속으로 찬양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께 절하는 예배 의식을 마치게 된다.

이런 예배에 있어서 어떤 요소는 모두가 같이 주께 드리고(찬송들, 헌상), 어떤 요소는 인도자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주께 드리는바(전주, 후주, 목회기도, 때로는 기도송, 찬양) 이때 모든 성도들은 그 인도자의 인도를 따라서 속으로 조용히 같이 그 찬송과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특히 목회자가 공기도를 인도할 때 모든 성도들은 조용히 함께 속으로 그 기도의 내용을 따라서 같이 기도드리고, 마쳐지면 다 같이 조화롭게 “아멘”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이상은 주로 성례가 함께 있지 않은 경우를 중심으로 언급하였으나 정상적인 예배는 항상 성찬이 함께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성찬이 어떻게 집례되어야 하는 지는 다른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단지 (1) 칼빈이 강조한 바와 같이 성찬이 자주 집례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 때 자기 자신을 살피는 자아 성찰(self-examination)이 의미 있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성찬식 자체에서는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피흘려 주심에 모든 도들이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것(communion)이라는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하는 예식이 되어야 한다는 점, (3) 이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며 한 잔이 참여한다는 것을 드러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한 떡으로부터 나누어 먹고, 떡을 떼는 일이 예배 중에 일부라도 있어야 하며, 한 잔에 참여함을 보이는 붓는 일이 예배 중에 일부분이라도 있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4) 성령에 의존해서만 의미가 있고 유효하다는 점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5. 결론: 성경의 가르침과 장로교 예배 모범을 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예배에서 고쳐져야 할 문제들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제까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또한 성경에 근거해 자신들의 예배 지침을 발견하고 그것을 예배의 전 과정에 적용해 보려고 했던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노력을 돌아보면서 우리 나름의 장로교적 예배 모범을 제안하였다. 이를 마치면서 우리들의 예배에서 고쳐지고 앙양되어야할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공로와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한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라는 점이 확실히 인식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배를 예배하는 자에게 어떤 공로가 되는 것으로 여기면서 이에 근거해서 벌을 피하거나 복을 얻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예배는 마땅히 드려야 하는 당위이며, 오히려 예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은혜로 되어지는 일임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이 점에 근거해서 우리는 많은 개혁 신학자들과 함께 지난 세대의 부흥회적 예배와 오늘날의 구도자 예배의 아직 신자가 되지 않은 분들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해야만 한다.75)

(2) 성경으로부터만 예배의 요소들을 이끌어 내어 예배하려는 진리 안에서의 예배, 이와 함께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분명한 천명, 즉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전 경륜 이외에 그 어떤 것도 계시도 언급하거나 덧붙이지 않으려는 태도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끌라스 루니아 교수가 잘 말한 것과 같이 “신약 신자들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들의 주님을 경배해야만 하는 영적인 성인(成人)들”이기 때문이다.76)

따라서 오늘날 여러 교회들이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운 요소들인 “춤이나 상징적 제의들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은 예배의 정황을 넘어 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77) 예배에 공연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강단을 무대로, 선포를 여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일에78) 우리의 목소리를 더해야 할 것이다.79)

따라서 성찬을 행할 때에 무릎을 꿇는 순서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논의는 정말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선배들이 성경과 성령에 의존하여 피 흘려 가면서 폐지한 것을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성찬의 떡과 잔을 높이 치켜드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다. 중세 때에 이런 상징적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the elevation of the Host와 관련한 많은 논의를 보라).80)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할 수 있으나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요소들을 “높이 드는 것”(lifting them up)도 “성례의 성질에 반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제정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므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9장 4절) 이점은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다.

(3) 온 교회가 같이 드린다는 공동체 예배, 공 예배 의식의 함양(이와 함께 스트라스부르의 부셔(Bucer)와 칼빈이 강조했던 공동체적 성격의 강조). 함께 모여야 공예배가 드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페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히 10:24-25).

(4) 공예배와 공기도시에 방언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성경의 분명한 말씀(고전 14:6-11, 19)에 유의하는 일이 필요하다.81)

(5) 공예배 중에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연속적으로 읽고 듣는 순서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성경으로부터 예배를 찾고, 성경을 배우며, 성경 전체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배에서는 굳이 소위 교회력에 따른 예배를 따르기보다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 나가며 그 내용을 따라 예배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쯔빙글리와 불링거도 그리했었고, 칼빈이 그로부터 배운 마틴 부셔(Martin Bucer)가 전통적인 lectionary 대신 계속적 성경 읽기(lectio continua)와 그것에 근거한 설교를 도입한 것을 유념해야 한다. 칼빈도 이에 따라서 연속적인 강해를 하여 간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온전히 성경 따르려 하던 이들은 심지어 성탄절도 굳이 지킬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 개신교에서도 나타나고 강조되고 있는 교회력에 따른 예배에의 강조는 어떤 면에서 과거 개혁파 선배들의 가르침에 깊이 유의하지 않은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해 나가면 그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6) 그 곡조와 가사가 예배에 적합한 찬송을 선곡하고, 작곡하여 찬송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로 예배에 적절하지 않은 곡과 가사들이 포함된 찬송을 하려 하거나 찬송을 찬송의 본래적 목적 이외의 것으로 전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배 순서 가운데 예배에 적합한 찬송을 골라 부르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태도와 마음으로 잘 연습해서 찬양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표로 기도를 인도하는 분들이 대표로 하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속으로 같이 기도하는 것이며, 특송을 하는 분들도 우리가 주께 드리는 찬송을 대표로 드리는 것이기에 우리가 같이 하는 마음으로 같이 찬송을 드려야 한다. 따라서 대표로 찬송한 후에 박수를 친다든지 하는 것은 함께 찬송 한다는 의식이 결여된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예배 중에는 사람에게 박수를 치는 등 사람을 높이는 일을 피해야 할 것이다.

(7) 가난한 자를 위한 모금과 구속받은 존재 전체와 날마다의 삶을 주께 드리는 것으로서의 헌상의 의미를 회복하고 잘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헌금은 절대로 축복을 위한 수단으로 드려지는 것으로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속된 백성이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과 주의 일에 드리는 의미로 헌상이 이해되고 수행되어야 한다.82) 이와 함께 바른 정신의 헌상송과 헌상 기도가 드려질 것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8) 예배가 지나치게 의식화되는 일(ritualization)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치려고 하는 일. 장로교회와 개혁 교회의 개혁파적인 예배는 단순한 예배이다.

“예배의 개혁파적인 단순성은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며, 신학적이며, 더 정확하게는 구속사적인 원리이다!”83)

예배당 안에 성찬상이 마치 제단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중앙에 있는 것, 성찬 상에 촛불이 있는 것 들은 모두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우리 선배들이 피 흘려 가면서 폐지한 것들이 아무런 역사 의식(意識) 없이 도입되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예배당 앞부분을 제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없애야 할 잘못된 습관이다.

예배당 안의 십자가가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 선배들이 말씀에 대해 회개하면서 말씀을 따라 반응하면서 폐지한 것들이 슬그머니 들어오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 등이 예배를 위해 독특한 복장을 하는 것이나 가운을 입는 것도 심각하게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평상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해 온 방식을 따르는 것이 좋고, 특별히 일상생활에서도 목사들이 독특한 성직자복을 도입하는 것은 애를 써서 성직자복을 폐지한 선배들의 노력을 무위화(無爲化) 하는 것이 된다.

(9)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한 예배 순서 중에 성도의 교제의 요소를 넣는 일을 지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와 이를 돕기 위한 광고 등은 예배 후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사무상 필요로 광고를 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84)

(10) 예배와 삶의 관계의 정립이 필요하다. 예배한 사람들은 예배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배와 삶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 둘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 둘이 분리되면 제의도 무의미해 지기 때문이다. “회중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이지만, 그것은 이제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데에로 이끌려져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예배이기 때문이다(즉, 예배가 예배를 이끈다.”85)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만 하지 말고, 그를 뒤따라가는 삶도 살아야 한다(Kierkegaard). 삶과 분리된 제의를 꾸짖으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호령은(특히 사 1:10-15을 보라)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86) 그러므로 우리도 루니아 교수와 함께 다음 질문을 하게 된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그 회중들 각자로 하여금 세상에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게 하며, 하나님과 폭넓은 사회 전반의 동료 인간들을 섬기게끔 하는가?”87)

 

6. 코로나 페데믹과 그 이후의 예배에 대한 적용

(1) 팬데믹 현상 속에서의 예배

우선 이번과 같은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하여 우리의 예배와 교회 활동을 방해하는 일이 있게 되었을 때(extra-ordinary situation)에는 다음 같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88) 이번과 같은 또는 더한 전염병이 심대한 위협이 되어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일에 지장이 있을 때는 각 교회의 당회가 기도하면서 결정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기도회를 잠시 쉬는 것과 주일 아침 예배도 일정한 기간 동안은 다 같이 모이지 못해도 혹 온라인으로라도 각 가정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상한 상황에서의 비상대책일 뿐이다. 후에 다시 강조하겠지만 이것은 결코 일상 상황이 아니며, 정상적 상황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평상시에는 이와 같이 하면 안 된다.

(1) 그러므로 아주 심각한 상태가 아니면, 전염병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방역 수칙을 잘 키면서 공예배에 같이 참여하고, 면역력이 떨어지거나 너무 노약하여 위험하여 부득이 참여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유선상으로 참여하는 것이 허용하는 식이 되어야 한다. 아예 모일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은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 참여하고 (이 일을 위해, 널리 떨어져 앉기 위해서 여러 차례의 예배를 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면연력이 떨어지는 유아들이나 노약자들을 중심으로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일이 이루어져야지, 대부분의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번 사태보다 더 심각한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는 모든 분들이 다 온라인으로 예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오지는 않을 것이고, 오지 않기 바란다. 이런 경우 외에는 성도들 대부분이 참여하여 예배당에서 하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주이고, 몇몇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이것은 다 비상한 상황에서 하는 비상한 조치일 뿐이다.

(2) 이 때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사람들도 미리 잘 준비하여 온라인으로라도 다 같이 정시에 공동체 예배(공예배)의 모든 순서에 참여하되, 진정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영혼의 무릎을 꿇는 일이 발생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어린 자녀들이 그런 것을 잘 의식하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혹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경우라도 정한 시간 이전에 의관을 잘 정제하고 미리 기도하면서 준비하다가, 정한 시간에 본 교회 예배당의 예배 시작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 시작되도록 해야 한다.

(3) 이렇게 부득이하게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건강과 특히 지역 사회를 위해서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교회 공동체의 안전과 지역사회의 건강과 안전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이런 때에도 하나님 앞에 참으로 황송한 마음을 가지고서 이렇게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이지, 이런 식의 모임도 정당한 것이라는 태도가 일반화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행하는 비상한(extra-ordinary) 일이다.

(5)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이 세상의 모든 방식을 다 사용해서 예배 실황을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구비해 놓고, 모든 성도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온라인 예배에라도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온라인 예배를 하는 경우에는 예배가 마친 후에 더 많은 광고의 시간을 통해서 서로의 상황을 잘 나누도록 해야 하고, 언제쯤 다시 예배가 정상화할 수 있을 것인지를 잘 확인하도록 해야 한다.

(6) 이런 온라인 예배를 중계하면서 교회 계좌를 송출해서 그곳으로 헌금하도록 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혹시 교회 공동체 모임이 이런 헌금을 거두기 위해 모임을 가지는 것이라는 오해를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못 오시는 분들 중에 참으로 관심을 가진 분들은 교회 책임자들에게 계좌 번호를 알려 주도록 요청할 것이고, 그런 경우에 온라인으로 헌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라인 영상에 계좌 번호 등을 게시하거나 송출하는 행위는 많은 오해만 양상 할 뿐 교회 교회로 존재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7) 이렇게 비상하게 예배하는 기간 동안 성찬을 해야 하는 때가 이르렀을 때는 역시 당회에서 기도 중에 의논하여 다음 몇 가지 대안 중의 하나를 취하는 것이 가하다고 여겨진다.

(a) 이 모든 일이 혹시 우리들의 죄악에 대한 형벌로 온 것일 수도 있고, 또한 모든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우리가 회개할 자인 것 같이 통회하는 심정을 가지고, 또한 이런 상황에서는 성찬을 해도 다 같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이 온전한 성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온 교회가 다 같이 수찬 금지의 징계를 받도록 결정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저 성찬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수찬 금지의 징계를 받는다는 의식을 가지고, 참으로 온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낮추고 징계를 받아야 한다).

(b) 아니면, 이런 비상한 시기가 그쳐질 때까지 성찬 시기를 연기하도록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은혜의 방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아쉬워하면서 다음 성찬에는 우리들 모두가 다 잘 준비해서 성찬에 바로 참여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c) 그것도 아니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표적으로 12명 정도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성찬에 참여하고, 다른 분들은 그 관경을 보면서 심정으로 그 일에 동참하는 것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이전에 천주교회에서 포도주는 사제만 독점하던 것과 같이 공동체 전체의 일부만이 참여하여 성찬의 의미를 파괴할 수도 있으므로 모든 성도들이 그 의미를 깊이 알고 시행하기 전까지는 보류하는 것도 좋다).

(d) 또한 성찬의 떡을 하나씩 잘 싸서 위생적으로 만든 후에 그 잘 싸진 것을 각자가 위생 장갑을 끼고서 취하도록 하고, 포도주도 작은 잔들에 포도주를 따른 후에 비닐로 잘 봉인하여 각자가 제거하고 마시도록 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이런 기간이 오래 계속될 때는 이 네 가지 방식을 순차적으로 사용해서 그 기간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8) 전염병의 유행이 끝났을 때 모든 성도들이 그야말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예배당에 모여서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지를 깊이 새기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하고, 그렇게 예배한 사람들다운 의식을 가지고서 각 가정에서 생활하며,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vocatio, mission)을 다 이루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일상생활로 하나님을 섬겨 가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합당한 섬김이다.

(2) 코로나19 이후 상황에서의 개혁파적 교회의 모습을 위하여

이전에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이 경험을 한 교회와 이런 경험을 한 성도들다운 모습이 있어야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받은 경험과 그렇지는 않지만 이 상황 속에 있었던 상황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존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이 사태를 통해 교훈을 받은 것이 아니다.89) 이 사태 후에 우리들은 더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적이게 되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긴 세월을 두고 볼 때 이번 사태와 같은 것이 신앙을 더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19%되고, 신앙을 약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3%뿐이라고 한다.90)

그러나 이런 것이 신앙생활에 좋은 쪽으로 큰 변화를 줄 것 같지는 않다. 2001년 9/11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 할 것 같으리라고 예상한 적이 있었는데, 한 두 주 후에는 다시 평소와 같이 되었다는 현실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사태의 영향을 받은 잘못된 영향은 더 강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상황을 겪은 후에 혹시 이 상황에서 잘못된 버릇이 들어서 이상한 교회를 형성하는 일들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경험에 기초해서 의식적으로 더 바른 길로 나아가려 한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위에서 언급했던 잘못된 영향을 받은 잘못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기 쉽다. 우리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몇 가지 점을 언급하자면 다음 같다.

(1) 공예배에 대한 오해와 변경의 위험성

코로나19 사태는 어느 나라에서나 직접 참여하는 예배(in-person worship) 대신에 소위 온라인 예배(virtual, online worship) 등이 주도적인 것으로 떠 오른 것이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91) 통신 기술, 특히 근자의 온라인 기술의 발달 때문에 이런 식으로라도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경험한 것을 통해서 필요하면 꼭 예배당에 참여하지 않고도 예배할 수 있다고는 생각이 더 강화되면 안 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우리들이 꼭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 부득이한 일들이 점점 확대하여가는 미끄러운 경사 길에 우리들이 놓이게 된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강력한 제동 장치를 마련해 놓고 이 경사 길에 있다고 해도, 결국 점점 그 경사길 밑으로 내려가서 종국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우리 마음대로 하게 된다.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은 참교회가 아닌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교회의 공예배는 그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다 참여하여 함께 하나님께 절하는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이 공동체 예배의 중요성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2)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의 중요성과 그 회복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한 것에 근거해서 우리들은 서로 면대면(面對面)하여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 만연해 간다면 그것도 이 경험으로부터 잘못된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던 개인주의적 신앙이 더 강화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성경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신앙생활하는 기준을 우리들의 경험에 근거하여 스스로 마련하겠다고 하는 것이 된다.

이 사태를 참으로 신앙적으로 경험한 성도들은 성도의 교통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생각하면서, 이전보다 더 깊이 있는 성도의 교통에로 나아가야 한다.

(3)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극복과 참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성숙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다른 모든 난제 앞에서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더 많이 하여 간다면 그것도 이 사태에 결려 넘어지는 것이 된다. 이 사태를 겪으면서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들은, 성경과 역사 속의 모든 참 성도들과 같이,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더 분명히 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이 잘못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이 복잡한 상황 속에 고난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시니,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복잡한 상황 속에 계시는 하나님, 이 상황 속에서 고난 받는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고난 중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이 세상 모든 악들을 종국적으로 극복하시고, 이 모든 악들을 종국에는 선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라고 성경이 말한다. 성경과 역사 속의 참 성도들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다 하지 못해도, 결국 하나님께서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시고, 이 모든 고난과 문제를 극복하시도 온 세상의 가장 온전한 상태를 가져 오신다는 것을 믿었다. 죽어가던 순교자들의 믿음과 소망의 내용이 그것이었고, 그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에 그들은 순교하는 그 순간에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있을 수 있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또 그 이후에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더 성숙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그것을 증언하고, 성도들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돕고 가르치는 공동체로 이 땅에 있다.

(4) 교회에 대한 오해 극복과 성경적 교회됨의 회복

이 세상은 교회도 늘 자신의 눈으로만 본다. 문제는 그것이 교회인 우리들의 이식에도 그대로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들 안에 있는 교회에 대한 오해의 극복을 위해서,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이 세상이 교회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이 세상은 교회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더 많이 퍼졌다고 오해한다. 신천지라는 이단집단이 이 세상에서는 그저 교회의 하나라고 인식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명수은혜 교회 같은 신유집회 중심의 목회를 하던 교회의 영향, 또는 정치운동을 하는 교회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모이지 말라고 하는데 열심히 모여서 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술집이나 클럽과 같은 오해를 받고 있다. 우리는 이 오해도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문제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들조차도 비슷한 오해를 증폭시키는 데에 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이 일부는 이런 때에는 공동체적 집회로 모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더 유익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교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의심하면 안 된다. 그러나 교회 안팎에 교회에 대한 오해들이 이렇게 난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러므로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우리들은 더욱 힘써서 교회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일차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후에는 대외적으로 교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참으로 성경적 교회상(敎會像)이 사람들의 심정이 그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먼저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성경적 교회상이 있지 않으면 이 세상에 그런 성경적 교회상이 나타날 길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같은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a) 교회는 구속함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意識)에 철저해야 한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 건물이 성전(聖殿)이 아니다. 교회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들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 함께 하늘에 앉은 그 사람들이(엡 2:6) 교회요, 따라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성전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성하는 교회의 지체(肢體)들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성경을 믿는 우리들은 다 함께 있는 것이며, 함께 하나님께서 부여 하신 사명을 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선교적 교회다.

(b)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점점 더 성숙해 가서 다른 믿는 분들과 함께 참된 교회의 자태를 이 세상에 드러낼 사명이 있는데, 그 일을 위해서는 우리들이 참으로 성화되어 가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함께 성화되어 가는 공동체다. 그 모습을 이 세상에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c) 그런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장(場)이 공동체의 예배 현장이다. 공예배는 교회 공동체가 함께 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예배가 성령님 안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모든 요소가 예배식에서 제거되어야 하고, 예배에 그야말로 하나님 중심성이 회복되어야만 한다. 인간 중심적 예배가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식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있도록 하신 것들만으로 이루어져서 그 예배의 요소들만으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d)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한 사람들답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하도록 시키신 일들을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함을 받고 중생한 우리 모두가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참된 제사장들이다. 그런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활동은 거룩한 일이므로, 성령님에 의존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그러게 할 때에 성경에 따라서 교회를 새롭게 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의도가 우리에게서 다시 살아나게 되고, 우리들이 참으로 성경적 교회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5) 전도에 대한 오해와 참된 전도의 회복

코로나19 이후에 가장 걱정되는 일의 하나로 그전부터 열심히 하지 않던 전도에 대해서,92) 우리 모두가 다 손을 놓아 버릴까 하는 염려가 있다. 얼마 전부터 전도는 여호와의 중인이나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같은 이단들이 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정통 교회들은 별로 전도에 힘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 안타까왔는데, 코로나 19 상황을 겪으면서 그것이 더 심화될까 걱정스럽다. 함께 모이는 일에 대해서 걱정하는 상황이었으니, 누군가를 전도해서 우리 교회 공동체에 참여시키는 일을 지난 몇 년간 하지 않는 것에 길들여져서, 이 세상 사람들도 별로 환영하지 않고, 우리들도 어려운 전도하는 일을 완전히 기피할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해야 하는 일이다. 초대 교회의 역병 상황에서 열심히 이웃을 돕는 희생적 모습을 보면서 감화 받은 사람들이 그 사태 후에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이때도 사랑의 실천이 있어져야 할 때이고, 그 결과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우리의 전도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때다. 그러므로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우리들은 더 지혜롭게 효과적으로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한다.

(6) 사회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

교회는 항상 사회를 잘 돌아 보아야 하는 책임도 가지고 있다. 초대 교화 때에 역병이 돌 때에 교회 공동체는 희생하면서도 지역 주민들을 잘 돌아 보는 일을 감당하였다. 중국 우한에서도 교회 공동체는 주민들을 돌아보는 일을 앞장서서 하였고,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지역의 선교사들은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귀한 일들을 지금도 잘 감당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어려운 일들이 발생했을 때 교회는 늘 많은 것으로 도움을 베풀었고, 이런 도움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우리 지역 사회에 있는 것이 유익이라는 인식이 이 사회에 전달될 수 있도록 긴급하게 돕는 일을 잘 수행해야 한다.

(7) 교회 상호간의 책임

한국 교계 안에도 비교적 자족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가 조금 있고, 정말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는 미자립 교회가 상당수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중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각 교회별로, 또 노회 별로 또는 여러 기관들을 통해서 연약한 교회 공동체를 돕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각 교회들이 무수하게 많은 일을 하였다. 이런 일들을 잘 하면서 앞으로 이런 일들이 또 발생했을 때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여러 방도들 마련해 놓은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제안은 결국 우리들이 성경적 교회가 되는 항존적인 우리들의 과제를 이 상황 속에서도 수행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여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극치에 이르게 하시기까지 우리들은 모두 교회를 교회답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도록 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코로나 19 이후 상황 속에서의 우리의 사명이다

 

주(註) :

1) 이 내용은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울: CCP, 2018): 47-84를 반영한 것이다. 이 책의 다른 내용들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2) Cf. 「목회와 신학」 374호 (2012년 4월호)의 특집 논문들과 컨퍼런스 보도를 보라.
3) 이 글은 이전에 개혁자들의 제안에 의존하여 예배에 대해 필자가 했던 제안들을 다 망라하여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음 논의와의 중복을 발견할 것이다. 이승구, “성경적 공예배를 지향하며”,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84; “성경적 예배를 위하여”, 「목회와 신학」 375호 (2012년 5월호)의 특집 논문. 이 글에서는 헌상에 대해서는 많이 논의하지 못했다 헌상에 대한 비른 이해와 개혁을 위해서는 “헌상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85-117을 보라.
4) 이 점에 대한 좋은 논의로 David Peterson, "Worship in the New Testament,"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ed. D. A. Carson (Carlislie: The Paternoster & Grand Rapids: Baker, 1993), 51-91, 특히 89f.을 보라.
5) 이를 잘 표현한 윌리엄 니콜스의 다음 말을 인용할 만하다: “기독교적 예배는 본질적으로 온전하고 종국적 구속을 주신, 그리고 그 구속으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의 깨어진 관계에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며, 주께 찬양하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고로 예배하는 것이다.”(William Nicholls, Jacob’s Ladder: The Meaning of Worship [Richmond: John Knox Press, 1958], 18).
6) 이 점에 대한 강조로 김홍전, 󰡔예배란 무엇인가󰡕 (서울: 성약, 1987), 68;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론 강설> (서울: 나눔과 섬김, 2014)을 보라.
7) D. A. Carson, "'Worship the Lord Your God': The Perennial Challenge,"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13
8) John Calvin, Tracts and Treatises on the Doctrine and Worship of the Church, vol. 2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9;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58), 118: "First, whatever is not commanded, we are not free to choose." 또한 같은 책의 122쪽도 참조하라. 칼빈이 후에 사람들이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였다는 또 다른 논의로 Nick R. Needham, “Worship through the Ages,” in Give Praise to God: A Vision for Reforming Worship, Celebrating the Legacy of James Montgomery Boice eds., Philip Graham Tyken, Derek W. H. Thomas, and J.Ligon Duncan, III (Phillipsburgh, NJ: P&R, 2003), 400을 보라. 그는 쯔빙글리도 그랬다고 한다(398). 또한 이를 말하는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Worship: Letting the Gospel Shape Our Practice (Grand Rapids: Baker, 2009), 44도 보라: “God established the way that he is to be worshiped in his Word, and this Regulative Principle of Christian worship meant that Calvin studies the Scriptures to find his liturgy.” 브라이언 채플은 다음 사람들도 같은 의견을 말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R. J. Gore, Jr. Covenantal Worship: Reconsidering the Puritan Regulative Principle (Philadelphia: P&R, 2002), 89; Greg Perry, “Reforming Worship,” Reformed Theological Review 61/1 (April 2002); 34.
9) Calvin,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V. x. 7.
10) Cf. John Murray, "Worship,"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1: The Claims of Truth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 168.
11) “영 안에서”라는 말을 이런 이중적 의미로 이해하는 다른 이들 중 대표적인 예로 Robert G. Rayburn, O Come, Let Us Worship: Corporate Worship in the Evangelical Church (Grand Rapids: Baker, 1980), 105-11을 보라. 그는 우리 예배가 (1) 성령 안에서의 예배이고, (2) 우리의 영적인 활동임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의 영적 활동이라고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전존재(the whole human personality)가 하는것임을 잘 강조하기도 한다(109).
12) 이 점에 대한 강조로 김홍전, 󰡔예배란 무엇인가?󰡕, 83, 85, 86, 87, 88을 보라.
13) Cf. 김홍전, <예배란 무엇인가?>, 89-91.
14) 이는 머레이 교수의 표현이다. Murray, "Worship," 167f.: "worship authorized by the Holy Spirit, constrained by the Holy Spirit, offered in the Holy Spirit."
15) 이점에 대한 강조로 Anthoney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9), Chapter 3를 보라.
16) 이 점을 강조하는 여러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바른 의미로 이를 잘 표현한 Rayburn, O Come, Let Us Worship, 109를 보라
17) Murray, "Worship," 168: "... for all the modes and elements of worship there must be authorization from the Word of God."
18) 이 점에 대한 논의로 Edmund P. Clowney, "Distinctive Emphases in Presbyterian Church Polity," in Pressing Toward the Mark: Essays Commemorating Fifty Years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ed. C. G. Dennison and R. C. Gamble (Philadelphia: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986): 100-105; Clowney, "Presbyterian Worship,"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113-118, 특히 113을 보라.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에 대한 또 다른 좋은 논의로 웨일즈 출신으로 리폼드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실천 신학을 가르치는 Derek W. H. Thomas, “The Regulative Principle: Responding to Recent Criticism,” in Give Praise to God, 74-93을 보라.
19) The Belgic Confession, Art. XXXII, in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III: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ed. Philip Schaff (Harper and Row, 1931; reprinted, Grand Rapids: Baker, 1990), 423.
20) 이상의 요소들에 대한 정리는 개혁파적 원리에 유의하면서, 또한 바른 주해를 염두에 두면서 Edmund P. Clowney, "Presbyterian Worship,"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117의 말한 바를 다시 검토하여 제시한 것이다.
21) Clowney, "Presbyterian Worship," 112.
22) Calvin,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V. x. 30.
23) 이 점에 대한 강한 강조로 Clowney, "Presbyterian Worship," 117을 보라.
24) G. I. Williamson, The Shorter Catechism, vol. I & II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n. d.), 최덕성 역, <소요리 문답 강해> (서울: 한국개혁주의 신행 협회, 1978), 198.
25) Cf. 김영재, <기독교 교회사> (서울: 이레서원, 200), 399; Philip Melanchthon, Loci Communes, 1555 (Grand Rapids: Baker, 1982), 이승구 역, 󰡔신학 총론󰡕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2000), 399f.; John Calvin,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LCC edition, edited by John T. Mc 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4. 18. 1-6. 이하에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다음과 같이 약하기로 한다. Institutes, 4. 18. 1.
26) 이 점을 잘 드러내어 논의하는 Lewis W. Spitz, The Protestant Reformation, <종교 개혁의 정신>, 정현철 역 (서울 : 풍만, 1990), 105f.를 보라.
27) 칼빈도 같은 입장에서 여러 논의를 한다. Cf. Calvin, Institutes, 1. 11. 1-16, 2. 8. 17.
28) 칼빈 등을 따라 청교도들에게 있었던 이에 대한 강한 반대 논의에 대해서는 이승구, “청교도에 대한 조직신학적 접근”,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서울: SFC, 2008)을 보라.
29) Calvin, Institutes, 4. 17. 36: “사람들이 떡 앞에 엎드려 거기서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미신적 경배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둔하고 육적인 개념에 가득 찬 위험한 예배 방식을 고안해 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예배해야 한다.” 또한 Calvin, Institutes, 1. 11. 7도 보라.
30) Calvin, Institutes, 4. 17. 35, 37.
31) Calvin, Institutes, 4. 12. 20.
32) John Calvin, Tracts and Treatises on the Doctrine and Worship of the Church, vol. 2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9;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58), 118: "First, whatever is not commanded, we are not free to choose." 또한 같은 책의 122쪽도 참조하라.
33) Calvin, Institutes, 4. 10. 7.

34) Calvin, Institutes, 4. 10. 30.
35) Cf. John Murray, "Worship,"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1: The Claims of Truth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 168.
36)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51문답.
37) 이에 대해서 Clowney, "Presbyterian Worship," 117을 보라: "Along with the exposition of Scripture, the singing of Psalms was characteristic of the Reformation."
38) James Hastings Nichols, Corporate Worship in the Reformed Tradition(Philadelphia: Westminster, 1968), 57.
39) Needham, “Worship Through the Ages,” in Give Praise to God, 401.
40) The Article of 1537, cited in Klaas Runia, "The Reformed Liturgy in the Dutch Tradition,"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100. 이 논문은 졸역, “화란 개혁파 전통의 예배 의식”, 󰡔개혁신학󰡕 제10권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1998), 189-224에 번역되어 있다. 인용문은 202쪽에서 온 것이다. 이하 이 논문으로부터의 인용은 Runia, "The Reformed Liturgy," 면 수=한역, 면 수로 하기로 한다.
41) Cf. Needham, “Worship Through the Ages,” in Give Praise to God, 400.
42) Runia, "The Reformed Liturgy," 100=한역, 203.
43) Needham, “Worship Through the Ages,” in Give Praise to God, 401.
44) 이에 대해서는 Needham, “Worship Through the Ages,” in Give Praise to God, 401을 보라. Gouddimel는 1565년 가정용 시편가도 내었고, 세인트 바됼료뮤의 날에 학살당한 유그노 중의 한 말이다(402).
45) Clowney, "Presbyterian Worship," 118.
46) Murray, "Worship," 167.
47) 사실 부셔가 스트라스부르에 왔을 때 그 도시는 이미 루터파인 디볼트 쉬바르츠(Diebold Schwarz, 또는 Theobald Schwarz, 1485-1561)가 1524년 2월 16일에 만든 독일 미사(the German Mass)라는 좀 개혁된 예배순서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는 중세의 미사 가운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모두 정화하고, 몇 가지 고대의 반응들인,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영광송(Gloria), 거룩송(Sanctus), 그리고 축복송(Benedictus) 등을 도입하였고, 신경 고백과 기도를 회중들이 하게 한 것이다. 부셔는 이 예배 의식을 
“더 오래고 참되며 영원한”(das alt, recht und ewig) 형태로 좀더 고쳐서 회중들로 하여금 음악에 맞추어 시편을 부르도록 하였고, 니케아 신조 대신에 사도 신경을 도입하였고, 로마의 lectionary를 따르지 않고 “연속적 성경 읽기”(lectio continua)를 예배 순서 중에 도입하였다. 그러나 그도 고대 예배 의식의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상에 대해서는 Klaas Runia, "The Reformed Liturgy in the Dutch Tradition,"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99=한역 200을 보라. 또한 부쳐는 기존의 제단(altar)이라고 부르던 것을 상(table)이라고 부르고, 벽면에 붙어 있던 것을 회중석을 향한 앞쪽 중앙에 위치하게 하고, 목사(minister)가 회중을 향해 서도록 하였으며, 성찬을 위한 성직자의 특별한 복장도 허용하지 않았고 주일에 검정 가운 입는 것은 무방하다고 하였다. 참조를 위해 스트라스부르의 예배 순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준비, 영광송(Gloria), 죄의 고백, 사죄 선언, 시편 교송, 인사와 응답, 입당송, 자비를 구하는 기도, 영광송(Gloria), 기도문 낭독, 서신서 봉독, 복음서 봉독, 신조 고백
성만찬
봉헌, 배열 준비, 인사와 서송(“주를 앙망할지어다”), 성찬 제정의 말씀의 서문, 시편 95편, 손씼음과 기도문, 성찬 제정의 말씀 전문, 중보 기도, 생활을 위한 기도, 성찬의 말씀, 회상, (운율에 맞춘)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입맞춤,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찬송(Agnus Dei), 성찬 기도, 성도들의 교제, 분병, 분잔, 참여, 성찬 후 기도, 인사와 응답,
축도.
48) Calvin's saying, cited in John M. Barkley, The Worship of the Reformed Church (London: Lutterworth, 1966), 17.
49) “The Form of Prayer and Manner of Ministering the Sacraments according to the Use of the Ancient Church," in W. D. Maxwell, The Liturgical Portions of the Genevan Service Book (New York: Oliver and Boyd, 1931), 114-15. Cf. Geddes MacGregor, Corpus Christi (London: MacMillan, 1959), 53f.; Howard G. Hageman, Pulpit and Table (London: SCM, 1962), 27f. 칼빈 자신은 liturgy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 와 있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를 위해 만든 예배 순서를 그의 후계자 Valerand Poullain이 Liturgia Sacra (1551)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기에 그 예배 순서가 역사상 처음으로 Liturgia로 언급되어 천주교에서 나온 1558년 문서보다 앞선다는 논의로 Hughes Oliphant Old, “Calvin’s Theology of Worship,” in Give Praise to God, 479, n. 2를 보라.
50) 조명을 위한 기도(a prayer for illumination)가 칼빈 등의 새로운 도입이라는 논의로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Worship: Letting the Gospel Shape Our Practice (Grand Rapids: Baker, 2009), 50을 보라.
51) *( )안의 순서는 아래와 같이 성만찬이 뒤따르지 않을 때의 순서이다.
52) Cf. Hageman, Pulpit and Table, 16.
53) Klaas Runia, "The Reformed Liturgy in the Dutch Tradition," in Worship: Adoration and Action: 95-109, 인용문은 97에서 온 것임이 논문은 “화란 개혁파 전통의 예배 의식”, 개혁신학 제10권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1998), 189-224에 번역되어 있다. 인용문은 193f.쪽에서 온 것이다. 이하 이 논문으로부터의 인용은 Runia, 면 수=한역, 면 수로 하기로 한다.
54) Runia, “The Reformed Liturgy," 97=한역, 196. 1574년의 이 도르트 회의는 1618-1619년의 유명한 도르트 회의, 화란 사람들이 the Great Synod of Dort라고 부르는 그 도르트 대회와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55) Runia, "The Reformed Liturgy," 101=한역, 205f.
56) 이상에 대해서 Runia, “The Reformed Liturgy," 97-98=한역, 196f.
57) Runia, "The Reformed Liturgy," 102=한역, 206f.
58) 이상에 대해서 Runia, "The Reformed Liturgy," 98=한역, 197을 보라.
59) 이상의 순서는 Runia, "The Reformed Liturgy," 96f.=한역, 194에 나온 루니아의 기억에 의한 어린 시절 예배 순서 제시에서 온 것이다.
60)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Runia, "The Reformed Liturgy," 102-103=한역, 207-10을 보라.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위해서는 번역 글에 딸린 역자 주를 참조하라: “예배식에서 헌상 부분이 그 본래적 의미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구획화하여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부분과 인간이 올리는 부분을 나누어 예전을 발전시키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도 재고해야 할 문제의 하나이다....... 전반적으로 성례전을 강조하여 예배 의식에서 설교와 성례전의 균형을 잡은 것은 칼빈적 강조에로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현대의 지나친 예전주의가 예배 의식의 예전화, 의식화를 낳는 것은, 그리고 에큐메니칼적인 유대를 위해 그런 것이 발전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한역, 210, 211의 역자 주).
61) The Preface를 보라. http://www.athens.net/~wells/dpwg/
62) Clowney, "Presbyterian Worship," 111.
63) William Maxwell Hetherington, Histor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Third Edition (Edinburgh, 1956; reprinted, Edmonton, Canada: Still Water Revival Books, 1993), 179.
64) Cf. R. J. Gore, Jr. Covenantal Worship: Reconsidering the Puritan Regulative Principle (Philadelphia: P&R, 2002), 25-40: David Lachman and Frank J. Smith, eds., Worship in the Presence of God (Greenville, SC: Greenville Seminary Press, 1992), 16-17, 75-79; Terry L. Johnson, ed., Leading in Worship (Oak Ridge: TN: Covenant Foundation, 1996), 4-5; Chapell, The Christ-Centered Worship, 56.
65) Hetherington, Histor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178.
66) Hetherington, Histor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178.
67) 이하에서는 Clowney, “Presbyterian Worship," 111-21에 제시한 바를 요약하고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덧붙이기로 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이 단락에서 인용문은 이 글로부터의 인용이고 ( )안에 그 면수만을 밝히기로 한다.
68) Cf. Hughes Olophant Old, Worship, Guides to the Reformed Tradition (Atlanta: John Knox, 1985), 75.
69)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ennesse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8). 이하 이 문단에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본문의 면 수만을 밝히기로 한다.
70) Calvin, Tracts and Treatises on the Doctrine and Worship of the Church(reprint; Grand Rapids: Eerdmans, 1958), 2: 118, 122. 이에 근거해서 레이몬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규정된 소위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가 청교도들의 창안물(Puritan innovation)이라고 거부하는 패커의 견해를("The Puritan Approach to Worship," Diversity in Unity [London: The Evangelical Magazine, 1964], 4-5) 반박한다(870, n. 7). 비슷한 입장의 표명으로 Clowney, The Church (Leicester: IVP, 1995), 122를 보라.
71) 여기서 레이몬드는 레온 모리스의 다음 주해를 소개한다: “[생명을 주시는 영이신] 그에게 적합하게 예배해야 한다. 사람은 예배의 방식을 주도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영어 주는 방식으로만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다”(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71], 272).

72)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1871; reprint, Grand Rapids: Eerdmans, 1952), 3:330.
73) 이를 위해 미국의 회중을 위해 그가 제안하는 찬송가와 시편 집은 다음과 같다: Trinity Hymnal and Trinity Psalter (Philadelphia: Penn.: Great Commission Publications).
74) 김홍전 박사는 사도신경 고백을 넣지 않았다. 이는 오직 성경에 있는 것만을 사용하려는 의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 사도 신경은 비록 영감된 성경의 한 부분은 아니나 성경의 내용을 잘 요약한 가장 보편적인 신조이고, (2) 중세 때에 사도 신경이 세례 예배 때만 그것도 라틴어로 낭송된 것에 반해서 칼빈이 온 회중이 자국어로 고백하도록 한 것을 생각하면(Cf. Nichols, Corporate Worship, 41), 사도신경을 사용해서 우리의 믿고 있는 바를 드러내는 것이 매 주일 예배의 한 순서가 되어도 유익하리라고 여겨진다.

75)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Reymond, Systematic Theology, 873을 보라.
76) Runia, “The Reformed Liturgy," 107=한역, 219.
77) Clowney, The Church, 128.
78) Clowney, The Church, 127.
79) Cf. Peter Barnes, "Entertainment in Worship," in The Banner of Truth, 한글판, 34 (1998년 12월): 33f. 또한 근자의 서창원 목사의 논문. 
80) 이에 대해서 멜란히톤이 미신적이라고 하면서 강하게 반론하는 내용에 대해서 멜란히톤, <신학 총론>, 398을 보라.
81) 이에서 더 나아가 방언 문제에 대한 개혁파 교회의 입장 천명으로 Anthoney Hoekema, What about Tongue-speaking? (Grand Rapids: Eerdmans, 1966), 103-13; idem, Saved by Grace, chapter 3; Clowney, The Church, 249; 그리고 Reymond, 59를 보라. 또한 다른 소위 이적적 은사들에 대한 개혁파적 견해를 보려면 Cf. Richard B. Gaffin, Jr.,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9), 65-67; R. Fowler White, "Richard Gaffin and Wayne Grudem on I Cor. 13:10: A Comparison of Cessationist and Nocessationist Argumentatio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5, no. 2 (1992): 173-81; idem, "Gaffin and Grudem on Ephesians 2L20: In Defense of Gaffin's Cessationist Exegesi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4 (Fall 1993): 303-20; O. Palmer Robertson, The Final Word (Carlislie, Pa.: Banner of Truth, 1993), 85-126; 그리고 Clowney, The Church, 257-68.
82) 헌상에 대한 폭 넓고 깊이 있는 성경적 이해에 대한 가장 좋은 논의로 김홍전, <헌상에 대하여>, 1 & 2 (서울: 성약, 1996)을 보라.
83) Runia, “The Reformed Liturgy,” 107=한역, 219.
84) 김홍전, <예배란 무엇인가?>, 69.
85) Runia, "The Reformed Liturgy," 109=한역, 223f.

86) 이에 대한 주해적 논의로 졸고, “종교의 내적 본질과 외적 표현의 상관성: 이사야 1:10-15 석의”,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1995): 15-25를 보라.
87) Runia, “The Reformed Liturgy," 109=한역, 223.
88) 각 교회별로 좀 더 구체적인 대응전략을 위한 지침으로 미국 휘튼 대학교에서 마련한 대은 매뉴얼로 다음을 보라. https://www.wheaton.edu/media/ humanitarianꠓdisaster-institute/Preparing-Your-Church-for-Coronavirus.pdf. 또한 영국 교회에서 각 지교회를 위해 제시한 가이드라인으로 다음을 보라:https://www.churchofengland.org/more/media-centre/coronavirus-covidꠓ19-guidance-churches#n.
89) 프랑스 알사스 로레인 지역의 교회 지도자로 이 바이러스의 경험된 후위 경험을 나누는 글도 보라: https://www.lutheranworld.org/news/covid-19-leading-church-post-crisis-world.
90) Frank Newport, "Religion and the COVID-19 Virus in the U.S," News.gallup.com, posted on APRIL 6, 2020, available at: https://news.gallup.com/opinion/polling-matters/307619/religion-covid-virus.aspx.
91) 누구나 이점을 지적합니다. 대표적으로 다음 두 곳을 보라: “Impact of the COVID-19 pandemic on religion,” https://en.wikipedia.org/wiki/Impact_of_the_COVID-19 _pandemic_on_religion; "Religion and the COVID-19 Virus in the U.S," News.gallup.com.
92) 2019년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소위 밀레니얼 세대(Y 세대라고도 불리는 사람들, 바나 보고서에서는 1984-1998년생들)의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practicing Christians) 가운데서 이전 세대에 비해서 복음전도에 대한 방법은 잘 숙달하고 있으면서도 47%가 다른 신앙을 가진 분들에 대한 복음 전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Cf. https://www.barna.com/research/top-10-releases-of-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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