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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영성(3)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2021년 06월 17일 (목) 11:13:22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체험 그 이후

 사울이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체험한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무엇보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사울이 그 인생에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했던 말은 “주여 뉘시오니이까?”(Who are you, Lord?)라는 고백이었다(행 9:5). 그가 전에 만나 보지 못하고 단지 그를 이단으로 생각하고 그의 제자들을 핍박했던 예수님을 난생 처음으로 모시고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는 순간이었다. 하나님 은혜의 포로가 된 사람은 자기의 생의 한복판에 예수님이 주님으로 계시는 감격스러운 체험이 따라오기 시작한다. 사울은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해왔던 명예와 프라이드가 산산조각 부서지고 살기등등했던 증오심이 자기 무덤을 파고 숨어버리게 된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은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다.

30년 전 중국에 있는 한 가정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가정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자매와 대화를 잠시 나눈 일이 있다. 그 자매는 원래 의사였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는 가정 교회의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 자매와 대화 중에 나는 “정부가 공인하는 삼자교회에 나가면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을 때 그 자매가 했던 고백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저는 삼자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삼자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의 전부입니다”라고 하였다. 물론 삼자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 그 자매의 고백이 귀하게 느껴진 이유는 무엇보다 그 자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신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분명한 것은 그가 쓰러질 때는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그가 일어날 때는 더 이상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자로 일어나게 되었다. 사울의 이 같은 변화를 보면서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어떤 사람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처럼 말하고 있다. 즉 “내가 저 사람은 잘 아는데 절대로 예수 안 믿을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부인은 “믿지 않는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세요”라고 하면 “우리 남편은 내가 잘 아는데 절대로 예수 믿지 않을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믿을 수 있다’ 혹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것이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본질적으로 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 어떤 사람이든지 변화의 가능성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누구에게든지 임할 때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울이 변화된 후에 그의 삶의 목적이 달라졌다. 사울이 본래 다메섹으로 가려는 목적은 예수 믿는 제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두 가지 그의 인생의 비전을 보여주셨다. 첫째는 그가 “예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그릇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 이름을 위하여 ‘해를 받을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잔해하던 자가 이제는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로 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헛 살았어요

이 시대의 제자들도 단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또 그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된 사람이다. 한 중년 남자분을 알고 있다. 그는 예수를 믿은 후에 처음으로 신앙 고백을 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헛되게 살았네요”라고 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사실 그 사람은 헛되게 산 것이 별로 없어 보일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가정을 성실히 지켰으며 직장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대인 관계도 원만하여 친구가 많았고, 자녀들도 잘 키웠다. 나름대로 인생의 원칙을 잘 지키며 살았고, 눈앞에 다가온 검은 유혹을 잘 이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단지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았던 것 한 가지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의 아내가 평생을 믿던 예수를 극적으로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헛되게 살아왔다”라고 한 것이다. 그토록 성실하게 살아온 분이 ‘헛되이 살았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의 계속된 고백은 “주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 예수 없이 살아온 모든 것이 사실상 잘 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잘 살아왔다고 자부해온 인생이 사실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모신 삶과 예수님 없이 살았던 삶의 본질적인 차이를 그는 깨닫게 된 것이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아마도 지금까지 자신이 가장 잘 나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했던 것이다(빌 3:4). 그만큼 자기 자신을 믿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는 그의 언어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엄청난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딤전 1:15). 사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내뱉기 어려운 고백은 없을 것이다. 분명히 죄를 짓고도 사람들은 “나는 모른다”고 하거나, 오히려 남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우는 세상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면 이 세상에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진실을 보게 된다. 그것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죄인이 존재한다. 즉 ‘용서받은 죄인’과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다. 어느 누구라도 이 둘 중에 하나에 반드시 해당된다. 만일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일’이 없다면 그는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일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었고 그 이후 그는 ‘용서받은 죄인’으로 일생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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