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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괴망측한 성 윤리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15)
2020년 08월 04일 (화) 11:01:04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옛 사람과 새 사람(엡 4:17-24)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선언한 사실을 기억한다(엡 1:23). 동시에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교훈한 내용도 기억한다(엡 4:13). 피상적으로 보면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바울은 구약 예언 성취의 관점에서 교회에 대해 진술할 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이 되었다(또는 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대종말의 관점에서 교회를 언급할 때는 “‘아직’ 최종 완성(ultimate consummation)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게 살아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교회를 이와 같이 이미아직이라고 하는 두 개의 렌즈를 사용하여 조망하는 것을 신학에서는 소위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교회를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을 성도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구성하는 장본인들(지체들)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하므로 그 나라의 시민권자답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가족의 멤버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지체로서 이미 그분의 충만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자신 속에 있는 그분의 충만을 최대한 실현하며 살고자 힘써야 한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믿는 자는 하늘나라와 현 세상, 장차 올 시대와 현 시대,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자이기에 현재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자기의 신분을 누리며 살되 동시에 궁극적 성취에 대한 미래적 소망 가운데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틀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실천적 권면을 주고 있다. 즉, 믿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충만”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을 목표로 성숙을 이루어야 하고(엡 4:13), 이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교회론적 “한 새 사람”에게 속한 자가 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부단히 성장해야 한다(엡 4:15). 바울은 신자가 성숙 또는 성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항상 윤리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윤리적 교훈을 할 때 “하지 말라”라는 부정적 표현방식(negative)과 “하라”는 긍정적 표현방식(positive)을 자주 사용한다.

바울은 먼저 부정적 진술로 권위 있게 권면한다(17-19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과 같이 행하지 말라”(17절). 여기서 “너희”는 믿는 이방인과 믿는 유대인 모두를, “이방인”은 믿지 않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들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의 행습의 원천지는 허망한 마음이라고 본다. 각종 우상, 인간의 철학, 잡다한 거짓 종교, 미신, 더러운 욕망, 물질적 탐욕, 왜곡된 풍속 등은 인간에게 허망한 마음을 부추긴다. 이런 것들이 인간 속에 비집고 들어와 바람을 일으키면 마음은 허망하게 되어 해괴망측한 일들을 저지르게 된다. 믿는 자의 자기 관리는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한 점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을 거부하는 이방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그들의 총명은 어두워[져 있다]”고 진단한다(18절). 이것은 그들의 지각이 캄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각은 영혼의 등불과도 같다. 이 등불이 꺼져 있으면 바른 윤리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다. 영혼의 지각이 어두워져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여기저기 부딪혀 상처가 나고 급기야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어떤 때는 낭떠러지인 줄도 모르고 내달리다가 그만 추락하여 부숴지고 만다. 불신 이방인의 또 다른 특징은 무지함과 완고함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줄도 모르고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억지뿐인 줄도 모르고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다고 착각한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생각이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며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파괴적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할퀴어 놓는다. 이런 사람은 겸손과 온유, 품위, 사랑, 자비, 관용, 인내, 예의, 존중 등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하찮게 여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람은 자신이 가장 겸손하고, 사랑이 많고, 예의 바르고, 인격적이고, 타인을 배려하고, 관대한 사람인 것처럼 위선을 행한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은 양심이 잘 작동되지 않기에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라도 개의치 않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한다. 영적 지각의 명멸과 이에 수반된 무지와 완고는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최대의 적이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는 생명을 가진 자요, 그에게서 분리된 자는 그의 생명과 단절된 자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는 육체로 숨을 쉬고 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와 같다.

바울은 불신 이방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였다]”(19절)라고 지적한다. 이 본문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 보면 이와 같다: “그들은 감각 없는 자들이 되어 자신들을 방탕에 내어줌으로 정욕 가운데 온갖 더러운 일을 행하였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마비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피부가 마비되어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선악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 안에서는 죄의식이나 수치심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사람은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것을 갈취하고, 횡령하고, 온갖 횡포를 저지르고, 기만하고, 사기 치고, 나약한 자들을 겁박하여 돈과 권력 앞에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서도 아무런 죄책의식이 없다. 그런 사람은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자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는 일을 음료수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쉽게 행한다. “방탕”(아셀게이아)은 자기 존중감을 상실한 채 타인의 권리와 감정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욕망의 거리에 자신을 방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방탕에 빠진 자를 낚아채서 더럽고 추악한 세계로 밀어 넣는 것은 정욕이다. “정욕”(플레오넥시아)은 “이득, 부에 대한 과도한 욕심, 탐욕”을 의미한다(막 7:22; 롬 1:29; 고전 5;10-11; 골 3:5; 벧후 2:3). 탐욕에 사로잡혀 수많은 형태의 부도덕한 일에 가담하는 것은 불신 이방인들의 특징이다.

인간이 자행하는 모든 더러운 행위는 그의 끝없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탐욕에 지배를 받는 삶은 악한 일들을 산출하고, 악한 일들은 또 다른 악한 일들을 산출하여 결국 악의 원(圓)을 그려낸다. 한번 탐욕에 빠진 자는 이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더러운 일”(에르가시아 아카싸르시아)에서 “더러운”은 인간의 부도덕한 행위를 포괄적으로 묘사하는 개념이지만, 특히 통제되지 않은 성적 행동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다(롬 1:24; 고후 12:21; 갈 5:19; 엡 5:3, 5; 골 3:5; 살 전 2:3; 4:7).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해괴망측한 성윤리의 곡해를 목격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은 무엇보다도 올바른 성윤리의 확립과 실천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윤리란 인간관계를 전제로 한 것인데 성윤리의 곡해는 그것을 근본적으로 심각하게 훼손시킨다. 윤리가 훼손된 인간관계는 추하고, 불안하고,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윤리의 곡해는 품위를 갖추어야 할 인간 사회에 동물적 비하를 초래한다. 어떤 의미에서 올바른 성윤리는 정상적인 인간관계의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바울은 긍정적 진술로 성도들을 권면한다(20-24절). 이 다섯 절 안에서 20-21절은 권면의 도입부다. 바울은 수신자들을 향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진술한다(20). “너희”는 일차적으로 원독자인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에베소서를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바울의 뜻은 믿는 자들이 불신 이방인들처럼 배우지 아니하였으니 그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이니 그들과 구별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웠는지 진술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21절). 이 구절을 원문으로부터 직역해 보면, “너희가 참으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를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니”이다(참조. NASB: “just as truth is in Jesus”).

믿는 자들은 예수에 관해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다. 그 분 안에는 진리가 있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예수 안에 진리가 있다는 말이나 예수가 곧 진리라는 말은 완전히 같은 말이다. 믿는 자들은 진리이신 예수에게서 배운 자들이다. 그들은 “그[예수]를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예수에 대해 듣고,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배운 자들이다. 진리이신 예수에 대해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롬 10:17).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진리를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진리에 민감하고 진리를 잘 들을 수 있는 큰 귀를 가져야 한다. 진리를 근거로 자신의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둔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고(참조. 1:4-5),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 땅에서도 신령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 22-24절 내용은 21절의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에디다크쎄테)와 연결되어 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22-24절은 세 개의 부정사 구(句)를 포함하고 있는데, 문법적으로 이 어구들은 모두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와 관련되며, 기능적으로 명령형 역할을 하고 있다(비교. 엡 3:8).

따라서 믿는 자는 세 가지 사항을 가르침 받았으니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 그럼 그 세 가지 내용이 무엇인가? 첫째, 옛 사람을 벗어라. 둘째,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 셋째, 새 사람을 입어라. 이 권면 배후에는 1세기 세례 의식이 있다. 입던 옷을 벗고 수세(受洗) 후에 준비된 새 옷을 입는 것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을 상징하였다. 본문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어떤 인격체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은 각각 수식하고 있는 말들이 답해 주고 있다.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자를 가리킨다(22절). 이 사람은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 본성을 따라 행동하는 자다. 이 사람은 세상 유혹이 내면에 파고 들어와 자기 속에 있는 욕심(에피튀미아)에 불을 붙이면 쉽게 부패한 행동 양식을 보여주는 자다. 믿는 자는 원칙적으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다(5:24).

하지만 그는 여전히 죄에 노출되어 있으며 많은 경우에 불신 자연인이나 다를 바 없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나타낸다(참조. 고전 3:1-4).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이미 옛 사람을 벗어버렸다 할지라도 실천적으로는 계속해서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24절). 그는 제2의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소유하게 된 자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총을 통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새롭게 창조된자다. 달리 말하여, 그는 하나님의 새 창조 과정을 통해 아담 안에서 잃어버렸던 그분의 형상을 회복 받고 완전히 새로운 본성을 갖게 된 자다. 하지만 그는 어리석게도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옛 사람을 소환하여 자신의 주인 노릇하도록 내맡긴다. 이런 경우 그는 새 사람에 의해 지배를 받기보다는 옛 사람에 의해 지배를 받고 옛 생활방식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나와 성령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아무리 새 사람을 입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실천적으로 날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미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실천의지의 인격적 헌신이다. 의지를 사용하여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그런 류(類)의 믿음은 껍데기만 있는 종교 적 개념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23절)라고 하는 어구에 대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옛 사람”이 변화하여 “새 사람”이 되려면 어느 한 다리를 통과해야만 한다고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한다. 심령의 새로워짐 없이는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할 수 없다. “심령”(토 프뉴마 투 노오스)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곳에 임재하시어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스리신다(참조.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의 역할 앞에 우리는 수동적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 세례(곧 중생. 참조. 3:5; 1:5)를 통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 심령을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도 이미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새 사람됨을 삶 속에 실현하며 살라는 권면이다.

내 속엔 여전히 두 인격이 존재하고 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분열된 자아”라고 표현한다. 성령께서는 옛 사람의 본성을 제압할 수 없어서 그것이 여전히 작용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내부 영역 전체를 자발적으로 그분에게 내어 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장 복되고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신다. 새 사람의 본성이 우리를 감싸게 하고, 우리의 아름다움을 결정하게 하며, 우리의 진면모를 대변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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