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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큰 흐름 중 하나 ‘선교’(1)
방동섭 교수의 선교로 읽는 성경(7)
2020년 06월 11일 (목) 14:05:10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방동섭 교수 /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석사, 미국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과정, 미국 리폼드신학교 박사, 전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글로벌비전교회 담임, 저서로는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선교없이 교회없다> <우리의 선교가 실존입니다>

   
▲ 방동섭 교수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빈번하게 해석이 되었던 말씀이다. “산상수훈처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았던 성경의 본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오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가장 실천되지 못했던 말씀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해석할 때 주로 기독교 윤리적 관점으로 본 것이 사실이다. 특히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산상수훈을 윤리적 차원에서 해석하면서 “산상수훈은 사회적인 진보를 향한 도덕 지침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또한 루터파 신학자들은 구원론적 관점에서 산상수훈을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산상수훈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은 불가능하고, 결국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산상수훈을 윤리적인 관점이나 혹은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산상수훈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윤리나 구원론에 대해서 대중적으로 설교하신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을 가르쳐주시고 훈련시켜 주시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카슨(D. A. Carson)은 이에 관하여 "비록 예수님의 사역이 대중을 향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가까이하여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고 하였다. 힐(David Hill)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무리들을 떠나셨다는 인상을 준다"고 하였다. 이런 점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나아왔을 때 입을 여셨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 2). 여기에서 제자들이 반드시 12제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12제자의 존재에 대한 언급은 마태복음 10장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12제자와 같은 핵심 그룹이 아니더라도 장차 예수님의 뒤를 따라 메시아 선교에 헌신하게 될 모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디다케(가르침) 사역, 훈련 사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선교에 헌신하는 자들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영적인 훈련 지침으로 주신 것이다. 산상수훈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영성 교과서이다. 그중에 팔복의 말씀은 이 시대의 헌신자들이 평생 선교적 삶을 준비하면서 또는 선교사로서 일생을 헌신하며 꾸준히 묵상해야 하는 영성 지침이라고 본다.
 

마음의 가난

심령의 가난한 자는 자신의 영적인 궁핍함에 대해 깊이 느끼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다(3). 이 말씀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선교적인 삶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 한다면 무엇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본다. 여기 ‘가난한 자’ 프토코이(πτωχοι)라는 말은 ‘프토소’(πτωσσω)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그 의미는 ‘웅크리다’(crouch), ‘움츠러들다’(stoop)는 뜻이다. 마치 이 단어는 거지가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에게 구걸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렇게 움츠리고 뭔가를 구걸하는 거지처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οπτωχοὶ)는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자’(τω πνευματι)라는 사실이다, 마태는 이런 '마음의 가난'의 개념을 이사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반면에 관련된 본문에서 누가는 ‘가난한 자’를 수식하고 있는 ‘심령이’(τω πνευματι)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 사회 경제적인 의미의 가난의 개념을 강조한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당연히 권력이 높은 사람이나 힘이 있는 사람 앞에서 비굴하게 행동하거나 겸양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 ‘영적인 가난’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공 즉 자신을 비우거나 부정하는 개념도 아니다. 라일(J.C. Ryle)은 겸손의 의미로 보고 있다. 가난과 겸손을 일치시켜 “겸손은 기독교 알파벳의 첫 장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높아지려면 낮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하였다. '심령의 가난'을 겸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공감할 수 있겠지만 적절한 해석은 아니라고 본다.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마음이 겸손한 자'라는 말을 더 정확하게 쓰셨을 것이다.

맥닐(A. H. McNeile)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οἱ πτωχοὶ)를 구약에 나타나는 '아니’(עני) 같은 뜻으로 보면서, '부를 결여한 자'나 '겸손한 자'의 뜻이 아니고 '세속적인 부를 경멸하는 경건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자들은 당시에는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무시당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겉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경건한 자들, 영적으로 경건한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즉 맥닐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처럼 단지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 진정한 의미의 경건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도 "히브리적인 어법으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단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도움을 위해 하나님께 향하는 사람들이다"고 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도 "도움을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 헨드릭슨(William Hendricksen)은 ‘심령이 가난한 자'을 '영적인 무능함을 깨닫는 자’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오직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카슨(D. A. Carson)은 이런 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가 ‘심령의 가난’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파산 상태’(spiritual bankruptcy)에 있음을 인식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심령의 가난은 용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영적 파산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존 스타트(John R. W. Stott)도 이에 동의하면서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빈곤함, 참으로 우리의 영적인 파산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 아래에서 심판을 받을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영적 파산 상태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주장할 것이 없으며, 천국에 이를만한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레온 모리스(Leon Morris)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아무런 영적인 자원을 갖고 있지 않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전적으로 궁핍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적인 자원의 결핍을 인정하고 따라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한다"고 하였다. 건드리(Robert H. Gundry)도 마태가 말하는 ‘심령의 가난’은 “부와 권력이 주는 가시적 지지 수단을 의지하는 것과 반대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함이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비굴함도, 겸손도, 유약함도 아니고 자신의 영적인 궁핍함에 대해 깊이 느끼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their nothingness before God)을 인식하는 사람일 뿐이다. 로이드 존스도 마음의 가난은 ‘자긍심, 자신감, 자신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것’으로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영적 가난’의 개념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무능성’ ‘영적인 파산성’을 인식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더 나아가 이것이 제시하는 선교적인 의미와 적용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보내는 선교사들이나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의 가장 큰 유혹은 사역을 통해 뭔가 성공을 해야 한다성공병’(success syndrome)에 빠지는 것이다. 마치 ‘람보 선교사’처럼 무엇이든지 해내고 우리 마음에는 가시적인 업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다른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있다. 인간의 '야망'(ambition)과 '비전'(vision)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야망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서 나오지만, ‘비전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비전의 사람이었다. 그가 아시아에서 새로운 선교지 마게도냐로 향해 가게 된 것도 그의 야망 때문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비전 때문이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을 따라 새로운 선교지를 향하여 갔다. ‘마게도냐’라는 새로운 선교지도 그의 더 큰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통해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맡은 자들은 그들의 사역과 인생의 미래에 대해 자신의 무능성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가는 선교사든 보내는 선교사든 바로 그렇게 일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자원이나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수단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선교의 문을 열어주실 수 있고, 선교의 미래를 향해 한걸음 또 한걸음 인도하실 수 있음을 믿고 일하는 사람이다. 선교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능력으로 나의 야망을 이루는 사역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는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주님의 비전을 이루는 사역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심령의 가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나의 어떤 수양이나 경건한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뜻을 비우고 내 자신을 비우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속 최고의 위치에 하나님을 끊임없이 모실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선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사역이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최고의 위치에 모신자들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그렇게 살면 선교 현장의 많은 영혼들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선교사들은 성공과 실패를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성공을 말한다면 그들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어떠한 경우에든지 하나님만 높이며 사는 헌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차원에서 성공한 선교사였다. 그는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살았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선교사역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모든 종류의 선교사역자들이 이렇게 살지 못하면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늘 피곤하고 자주 낙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사는 그들은 무슨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 마음이 넘친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기적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영적인 가난이 무엇인지 세상 한 복판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구약의 인물이 있다면 다니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바벨론 제국과 후에 일어난 페르시아 양대 제국에서 왕들의 신임을 받아 총리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당시 포로 출신으로 그 같은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다리오왕 시대에는 왕이 지나칠 정도로 다니엘을 신임하는 것을 알자 정적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를 넘어뜨리려고 그들은 그의 약점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다니엘은 완벽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어 처형시키는’ 특별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늘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던 정적들이 그를 죽이기 위한 만들었던 30일 기간의 악법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런 악법이 공포된 후에도 “자기 집에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 최고의 위치에 모시고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리오왕이 아무리 높아도 그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높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이 보여준 '마음의 가난'의 개념이다.

다니엘은 이 시대 전문인 선교사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며 살았던 다니엘은 악법에 따라 사자 굴에 들어가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셨고 기적처럼 살아 나오게 되었다. 더 나아가 뜻하지 않은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 자신의 삶을 통해 다리오 왕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33) 하나님을 최고의 위치에 모시고 죽기를 각오하고 살았던 다니엘이 이방인 왕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선교사역자가 얻게 되는 선교의 열매이다.

만일 모든 종류의 선교사역자들이 하나님을 최고의 위치에 모시고 사는 것에 실패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면 선교의 현장에서 자주 낙심하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세상의 일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선교사들이 다니엘처럼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경험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다(3). 하나님을 마음의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사는 자가 누리는 축복이다. 만일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느끼며 산다면 그는 이미 천국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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