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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죽는 길 그러나 살리는 길
2018년 03월 28일 (수) 10:55:48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마태복음 21장 1-11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요 12장에 나오는 소위 ‘밀알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실제 그대로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뿌려져서 잘 영글어 추수하게 될 때, 약 100개에서 120개의 낱알을 수확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음 해 그대로 씨 뿌려지고 또 그 다음 해 그대로 씨 뿌려지기를 5년 반복하게 되면, 약 100억 개의 낱알이 되고, 이것을 자루에 담으면 1만7천 가마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밀알 한 톨을 땅에 심지 않고 그대로 두면, 저 이집트 피라미드 속에서 발견된 5000년 된 밀알처럼, 한 알이 그대로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과학적 사실이고,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다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상식적인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 아는 상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상식으로 더 중요한 교훈을 말씀하시려 한 것입니다. 바로 사람이 자기를 희생하여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걸으라는 교훈을 말씀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하신 시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입성하신 직후에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씀하신 밀알의 비유를 예수님께서 직접 몸으로 보이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후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에 오셨고, 그 후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으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한 알의 밀알이 죽으려고 땅에 떨어진 것과 같은 사건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후 부활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생명이 풍성하게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죽는 길 그러나 살리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는 길

예수님께서 공생애기간 세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아마도 마태는 세 차례 모두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 여행길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중에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에 관한 내용만 자기가 쓴 복음서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은 세 차례 예루살렘 여행에 관한 내용을 모두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마태는 왜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에 관한 내용만 기록해 놓았을까요? 아마도 마태생각에 앞의 두 차례 예루살렘 여행과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은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이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에는 십자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약 35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예수님 이야기를 마태복음으로 기록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예수님에 관한 기록을 정리해 보려고 할 때, 마태는 이 마지막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예수님의 고난 예언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특히 마 16:21을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썼습니다. 분명히 당시에는 마태는 이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을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후에도 두 차례나 더 이 예루살렘 여행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태복음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 20:17-19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마 20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당시 마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은 이 말씀을 흘려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대로 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내용을 기록할 때 마태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게 됐을까요?

결국 마태는 오늘 본문을 기록할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 지를 잘 알고 썼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죽으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을 생각을 하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11:1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려고 힘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모든 점을 다 본받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마음에 드는 점은 본받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본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따라 하기 쉬운 것은 본받고, 따라 하기 어려운 것은 본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행 21:1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에서 가이사랴에 들렀을 때, 그곳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잡아 로마군에게 넘겨주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울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신 것까지 본받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 태도가 이래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으려 할 때, 예수님처럼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일만 본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을 전하며 높임을 받는 일만 본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죽으러 가는 길도 따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손해보고 희생하는 길도 따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가 주님 때문에 손해 보는 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일들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4-5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연도에 수많은 사람이 늘어서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펴고 자기들의 겉옷도 벗어서 길에 펴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마치 개선장군의 개선 행군과 같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기왕이면 백마를 타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성경말씀에 그렇게 예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기대를 의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결정했다고 해도 그 과정도 잘해야 합니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정했다고 해도 그 과정도 선해야 합니다.

근자에 언론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 가운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창한 목표를 향해 나갈 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교회 봉사를 하고, 주의 사역에 동참한다고 할 때, 명분이 그럴 듯하고 목표가 아름답다고 마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실천 과정도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특히 세밀한 과정도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살리는 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앞에서 말씀대로 우선은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셔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앞에서도 읽었던 마 20: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죽으신 이후 부활하실 것까지 염두에 두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밀알의 비유도 이 점을 시사해 줍니다. 밀알을 밭에 심으면 처음에는 밭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야말로 밀알이 땅에 묻힌 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싹이 나옵니다. 놀랍게도 밀알 한 톨에서 나온 싹이 자라면서 가지가 적게는 15에서 많게는 25개나 뻗어 나옵니다. 밀알을 밭에 심은 지 한 달도 안돼서 밭은 벌써 푸르름으로 가득합니다.

그렇습니다. 밀알은 자기는 죽고 자기의 다음세대에게 생명을 얻게 한 것입니다. 자기 하나는 죽었지만 수많은 다음 세대의 밀알에게 생명을 얻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그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과거와 다른 생명을 받아 누리게 하셨습니다.

롬 6: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받아 누리게 될 생명을 새 생명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436장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1. 나 이제 주님의 새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새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맘속에 강같이 흘러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2. 주안에 감추인 새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 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새생명을 얻고 보니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신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누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일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3.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하늘이로다.

 새생명을 얻고 보니 세상이 다 새롭다는 것입니다. 산도 강도 나무도 풀도 다 새롭다는 것입니다. 죄인도 원수까지도 다 친구처럼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면 이런 새생명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장차 우리에게 이런 새생명을 주실 생각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풍성한 새생명을 누리며 사는 모습을 떠 올리시면서 바쁘게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길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오늘 주님 주신 새 생명을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생명 주신 것 감사하며 새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당시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우선 저들이 환영을 표시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깔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왕이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을 환영할 때처럼 예수님을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저들이 큰 함성으로 외쳤다는 것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메시야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여!”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산나”(Ώσαννά)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두 단어가 합성돼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는 ‘구원하다’라는 뜻의 ‘야솨’(ישׁע)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컨대’라는 뜻의 나(נא)라는 말입니다. 이 두 단어가 결합된 후 헬라어식으로 표기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 뜻은 “원컨대 구원하소서”이고, 대체로 “지금 구원하소서.”라고 번역합니다. 사실 이 말은 시 118:25 의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로 높이며 예를 다 갖추어 환영하면서 “호산나”를 큰 함성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저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치던 그 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를 치게 됩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야로 영접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진정한 호산나를 외쳐드려야 하겠습니다.

“호산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주여 우리 가정을 구원하소서!”, “호산나 주여 우리 교회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주여 이 민족을 구원하소서!”, “호산나 주여 열방을 구원하시고 온 백성을 구원하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제 우리는 먼저 주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의 본을 받아 희생하는 길을 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새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호산나를 외쳐야 하겠습니다. “주여 지금 이 땅을 구원하소서” 간절한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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