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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수 바른말 ] 막역지우(莫逆之友)
복막역지우(莫逆之友) : ○ / 막연지우(漠然之友) : ×
2018년 03월 19일 (월) 12:06:57 김준수 목사 webmaster@amennews.com

김준수 목사 / 밝은세상교회 담임, 카리스바이블아카데미 대표

   
▲ 김준수 목사

‘막역지우’(莫逆之友)는 문자적으로는 거스름이 없는 친구라는 뜻으로, 허물없이 아주 절친한 친구를 가리킨다. 이 말은 장자(莊子)의 글에 나온다. 좋은 친구 사이란 형편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서로 변함없이 아끼며 챙겨주고 격려하는 관계이다. 한자의 세계인 중국은 고대로부터 참다운 우정을 나눈 분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기억해 후세에 교훈을 삼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사성어에는 다정한 친구 혹은 친구 간의 우정과 교제를 나타내는 말들이 꽤 많이 전해 온다. ‘관포지교’(管鮑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지기지우’(知己之友) 등과 같은 듣기만 해도 정감 어린 고사성어들이 그러한 말들이다.

‘문경지교’(刎頸之交)는 대신 목을 내주어도 좋을 만큼 가까운 친구를 가리키는 말이니, 다정한 친구 사이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말해 주는 한자숙어가 또 있을까?

하지만 필자는 ‘금란지교’(金蘭之交)라는 말이 제일 좋다. 금같이 굳고 난초같이 향기로운 친구 사이니 이런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돈이 최고인 오늘날에도 그런 친구는 가히 큰 금덩이를 잘라 나눠 가질 만큼 정의(情誼)가 두터운 교제(斷金之交)를 하는 벗이리라.

‘막역지우’(莫逆之友)는 ‘막역지교’(莫逆之交)라고도 하고, 정이 두터워 서로 터놓고 지내는 사이를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역’(莫逆)을 ‘막연’(漠然)으로 잘못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참에 ‘막연’이 아니고 ‘막역’임을 확실히 알아두는 게 좋겠다. 막연은 범위나 내용이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종잡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지만, 막역은 마음에 조금도 거슬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막연’이란 말은 이렇게 쓰면 정답이다.

“자네 아이디어는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해서 잘 이해가 되지를 않네.”

‘막연’과 ‘막역’에 접미사가 붙은 ‘막연하다’와 ‘막역하다’도 분명히 구별해 쓸 줄 알아야 한다. ‘막연하다’는 구체적이지 않고 어렴풋하다는 뜻이고, ‘막역하다’는 서로 허물없이 썩 친하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친구를 소개하면서 “얘야, 인사하렴. 이 분은 나하고 막연한 친구 사이지”라고 말한다면, 인사 받는 친구는 아들의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전혀 엉뚱한 뜻으로 변모되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막연한 친구’가 아니라 ‘막역한 친구’라고 해야 옳다.

‘친구’라는 어휘는 정겹고 편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용어이다. 찬송가에서도 예수님을 다정한 친구로 여겨 부르는 곡들은 상당히 많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88장), “위에 계신 나의 친 구 …”(92장),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434장), “죄 짐 맡은 우 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369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 내 친구 되신 예수님 … 늘 참 좋은 나의 친 구 …”(90장) 등의 찬송가 가사들은 구주 되신 예수님이 내 진실한 친구가 되어 주신다고 밝히고 있다.

   
▲ ⓒpixabay.com / sasint / ace-1807511_640

특히 찬송가 90장은 예수님을 가리켜 “내 친구”, “내 진실하신 친구”, “참 좋은 나의 친구”(2회)라고 표현함으로써 ‘친구’란 단어가 거푸 네 번이나 나타난다. 3절로 된 이 찬송은 1절에서 “저 포 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로 마친 다음, 3절에서 가사를 마칠 때도 아쉽다는 듯 한 번 더 이 가사를 붙여 “날 구원하신 예수는 참 좋은 나의 친구”라고 끝맺으며 내게 ‘친구’가 되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남편과 아내, 아빠와 아들도 서로 다정하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친밀한 관계에 있다면 얼마든지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가당치 않을 것 같지만 성경은 조심스럽게 친구 사이가 되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이스라엘 족장들의 삶을 통해 이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과 마치 친구인 양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은 이사야서에 잘 나타난다. 하나님이 아 브라함을 ‘나의 벗’(이사야 41:8)이라고 부를 만큼 친근함을 보이신 것이다.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과 친구처럼 친밀한 교제를 하였던 사람으로는 단연 모세를 꼽을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이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모세를 친구처럼 가까이서 대면하시고 무언가를 놓고 진지하고 정겹게 대화 를 나누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출애굽기 33:11). 필자는 오경을 연구하면서 모세에게 홀딱 반해 그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장 뛰어난 사람을 신약 시대에는 바울이라고 한다면 구약 시대에는 모세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고 어떤 성품들을 가졌으며 자연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고 어떤 목적을 위해 일하시는가를 깨달은 사람이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막역한 친구 사이라면 또 하나 떠오른 게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이 두 사람은 나이는 비슷하나 캐릭터는 사뭇 다르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다운 성격을 가진 반면, 갈렙은 전형적인 참모 스타일이다. 갈렙은 단 한 번도 여호수아를 시기하거나 그 자리를 넘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출애굽 대열에 끼어 이집트를 빠져 나왔고, 이듬해에는 지파의 대표로 뽑혀 위험을 무릅쓰고 가나안 땅에 스파이로 침투하였다. 여든 살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 힘을 합쳐 정복 사업을 수행하였다.

팔십 오세가 되던 해 노익장(老益壯) 갈렙은 헤브론을 자신의 영구적인 기업으로 줄 것을 여호수아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헤브론을 주어 기업으로 삼게 하였다(여호수아 14:6-14).

여호수아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고 자기와 같은 나이로 선전수전 다 겪으며 45년 동안을 의리를 지키며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대해준 갈렙에게 그 노고를 높이 치하하는 한편으로 아낌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막역지우(莫逆之友)는 다윗과 요나단이다. 다윗과 요나단의 교제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단편 소설이다. 두 사람은 왕정 이스라엘의 초기에 숙명적으로 만났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장남이었고, 다윗은 누란지위(累卵之危)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르던 청년이었다.

그런 다윗에게 사울 왕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게 애증(愛憎)을 나타내며 번민하였다. 그러나 마음씨가 곱고 순수한 요나단은 아버지와 달랐다. 성경의 전후맥락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요나단이 내심 자신이 물려받을 왕위를 다윗에게 양보하려 한 것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사무엘상 23:17). 다윗의 인품이 충분히 그럴 만하고,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뜻일 거라고 요나단은 판단하였던 것 같다.

아마도 요나단이 다윗보다는 두세 살 많은 것 같아 보이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였다는 성경의 진술(사무엘상 18:1-3; 20:17)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사무엘상 20장은 시기와 질투로 이성을 잃은 사울 왕을 잠시 피해 도성(都城)으로 돌아온 다윗을 사울 왕이 용납하는지 안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른 바 ‘우정 장’(友情 章)으로 알려진 이 특이한 본문은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며 이스라엘을 반석 위에 세워놓으려는, 그러나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두 청년의 애틋한 이별에 관해 소상히 증거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애틋하다 못해 주체 없이 나오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다윗과 요나단이 나눈 우정은 성경의 독자들로 하여금 과연 친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체념과 포기, 그리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훗날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인생의 바다를 생각하게 하며 가슴 찡한 그 무엇을 느끼게 한다.

요나단은 눈가에 흘린 눈물로 범벅이 된 다윗에게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사무엘상 20:42)고 하면서 다윗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훗날 다윗과 요나단은 황급한 상황에서 한 번 더 만나긴 하였지만, 사실상 이 장면이 두 사람 간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뭔가 불행이 예고되는 듯한 요나단의 불길한 말은 실제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과 그의 형제들과 함께 블레셋 군인들과 싸우다 길보아 산에서 전사했다. 어쩌면 요나단은 자신과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의 운명이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게 될 거라고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애가(哀歌)를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죽음을 슬퍼 했다(사무엘하 1:17-27). 이 애가의 끝 부분에는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하였던지 여인의 사랑보다 더했다고 고백하는 다윗의 심경이 절절이 녹아 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여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사무엘하 1:26).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계시를 받는 신비하고 위대한 신앙의 선배였지만, 그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므로 신약 시대의 우리들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비하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고 사도 바울은 확신을 갖고 말한다(고린도 후서 3:6-18). 놀랍게도 은혜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친구와 같이 사귀며 교제할 수 있는 품격 높은 지위에까지 신분이 상승한 사람들이다(베드로전서 2:9).

하나님이 죄 많은 나를 친구로 삼아주시겠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시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완성하실 거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이 그의 제자를 친구로 인정하시겠다면 구약의 하나님이요 성부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를 친구로 인정하시겠다는 것과 똑같다.

완악하고 죄 많은 내가 어찌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과연 그런 자격이 있는가?

내 모습, 내 성품, 아니 내 보잘 것 없는 믿음을 보면 솔직히 내가 하나님의 친구가 될 자격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지만, 하나님이 “너는 내 친구야”라고 하시니 별도리 없이 그분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어떤 무엇도, 어느 누구도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아들을 내주어 구원하신 나를 정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친구, 예수님의 친구를 누가 감히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다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기가 막히게 이런 이치를 깨닫고 로마서에 귀한 글을 남겼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2-35).

[ <바른말의 품격-한자편> (도서출판 밀알서원), pp. 70-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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