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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개발 시인, 개방 촉매 될까
충격 발표 3주째… 파문 어디로
2002년 11월 06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이영종 / 중앙일보 통일외교팀 기자

북한 당국이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을 ‘시인’했다는 미국 부시 행정부의 발표가 있은 지 3주가 넘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지구촌을 뒤흔들 메가톤 급의 북한 핵 파장은 가라 앉기는커녕 일파만파로 번져가고 있는 양상이다. 미국과 한국·일본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강조하면서도 음양으로 대북압박의 도를 높이고 있고, 유럽연합(EU)은 대북 중유지원 중단 등
보다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제재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반 워싱턴측의 격앙스런 반응은 ‘대화를 통한 해결’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다소 진정되는 듯했지만 부시 진영의 ‘선(先) 핵 포기’ 요구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간의 갈등은 새로운 불씨를 던지고 있다. 미국이 “핵 포기 없이는 대화도 없다”고 완강한 입장을 밝힌 데 대해 북한도 “핵무기를 먼저 포기하라는 것은 발가벗고 협상 테이블에 나오라는 얘기”라고 버티며 미국에 대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측이 이런 요구를 일축하고 나선 것은 물론이다.

이런 팽팽한 대립양상이 이어지자 이러다간 자칫 2003년 핵 위기설이 한반도에 현실로 밀어 닥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이후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진전돼온 남북간 교류협력이 냉전의 광풍에 다시 휘말려 물거품이 되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이다.

특히 핵논란이 장기화될 경우 지난 7월 이른바 경제관리 개선조치와 9월 12일 신의주 특별행정구 선포에서 볼 수 있듯 평양당국의 대내외적인 개혁·개방 행보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 9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간의 북·일 정상회담에서 잘 드러난 북한의 대외관계 개선 행보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핵 시인 사태가 북한의 개방 확대에 어떤 변수가 될 것인가 하는 게 정부 당국자와 북한 전문가들의 핵심적인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현 시점에서 핵 개발 문제를 놓고 북한과 미국이 먼저 꼬리를 내리기는 쉽지 않은 형국이다. 무엇보다 10월 초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의 ‘북핵 시인’ 발언을 놓고 양측 모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정일 정권은 외교상 논의된 사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데 대해 ‘결례’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켈리 특사가 평양을 떠난 지 이틀 뒤인 지난달 7일 “대북 적대시 정책을 반영한오만한 행각”이었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은 이를 예감한 때문일 수도 있다. 외무성 대변인은 관영 중앙통신을 통해 “미국측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인권문제 등이 해결돼야 조(북한)·미, 조·일 관계와 남북대화가 순조로울 수 있다고 한 것은 극히 압력적이고 오만한 것이었다”며 “이같은 미국측의 우려는 우리를 대화가 아닌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것”이라고 밝힌 것은 이번 사태에 대한 북한당국의 원칙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잘 드러낸다.

물론 사태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사이에 오간 이야기들, 특히 켈리 특사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간의 대화가 정확하게 공개돼야 한다. 북측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맥락으로 핵 개발과 관련한 언급을 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초 미국측의 일방적인 발표만으로 사태를 예단하지 말자는 신중론이 대두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북핵 개발 시인’ 발표 이후 북한당국이 몇 차례 반응을 보이면서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볼 때 핵 개발과 관련한 북측의 발언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북한이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핵 문제를 본격적으로 대미협상의 카드로 내밀고 있다는 인상도 든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지난 2일 “현 미국 행정부가 등장한 이후 조·미 사이의 불신과 대결은 극도로 첨예화되고 있다”며 “현 실정에서 모든 수단을 다해 각종 무기를 만들어 무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주장한 대목은 핵이 북한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감지케 한다. “조·미 사이의 지금과 같은 적대관계가 없다면 경제형편도 어려운 때에 많은 품(국방비)을 들여가며 방위력 강화에 힘을 넣고 ‘특수무기’까지 만들겠느냐”고 말한 대목에서는 결연함까지 느껴진다.

그렇지만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싼 국제여론은 평양측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미국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남한으로부터 심각한 반대여론에 직면해 있다. 지난 달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정세현(통일부 장관) 남측 수석대표는 기조발언을 통해 이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특히 북한 정권의 권력서열 2위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국회) 상임위원장은 같은 달 21일 정세현 수석대표를 단독 면담한 자리에서 “우리도 최근의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털어놨다. 일본도 북·일 정상회담 이후 속도가 붙는 듯하던 수교교섭을 북핵문제와 연계시켜 “핵 문제 해결없이는 협상도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의 핵 개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확산금지조약(NPT) 등 국제 조약의 위반인 것은 물론 북·미 기본합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또 지난 92년 체결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대목과도 배치되는 행위다.

물론 북측으로서는 제네바 합의의 미국측 이행의무인 경수로 제공이 목표시한인 2003년까지 이뤄지기 어려워졌고,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등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경수로 지연 등은 북한의 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와 98년 8월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등으로 인해 촉발됐다는 지적도 있다. 다툼의 여지가 있는 사안을 제쳐두고 일방적으로 합의문 파기를 선언하는 식의 행동으로 나간 데 대해 국제사회가 두둔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북한이 처한 현실이나 국제정세의 흐름을 종합할 때 북한이 핵 개발 문제를 놓고 미국이나 국제사회와 정면 충돌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근 북·미관계 등 국제정세의 흐름이나 한반도 기류가 1993∼94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북한 외교관리들은 감안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상대적으로 대북 유화적인 클린턴 행정부와 벼랑끝 전술을 통해 핵 카드를 이용한 빅딜에 성공했다. 94년 10월 제네바에서 체결한 북·미기본합의는 북한의 핵동결을 대가로 전력문제를 해결할 경수로 지원사업의 시작과 대북 경제제재 해제, 관계개선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등 전리품을 챙겼다. 200만kw급 경수로 발전소를 북한에 제공하는 사업은 46억 달러가 드는 대역사로 미국과 한국·일본·유럽연합(EU)이 주축이 돼 참여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2기의 경수로 중 첫 번째 것이 완성되는 시점까지 매해 발전용 중유 50만t씩을 별도로 지원받도록 되었다.

그렇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2000년 말 클린턴 정부와의 관계개선 타이밍을 놓친 북한은 대북 강경정책을 구사하는 부시 행정부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왔다. 평양정권을 ‘악의 축’으로 분류해 길들이기에 나선 워싱턴측에 대해 클린턴 시기와는 너무나 판이한 온도차를 절감해야 했다.

이 같은 분위기를 북한당국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때문에 미국에 대해 강경한 톤의 비난 성명을 내놓으면서도 행간에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지난달 25일 외무성 대변인이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통해 우리에 대한 핵 불사용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확약한다면 우리도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이제 핵 개발 논란으로 촉발된 북·미간 갈등과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문제는 북한의 선택에 달렸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을 ‘아이에게 맡겨진 위험한 장난감’으로 여길 수 있다. 또 남녘 동포들도 민족공멸의 참화를 초래할지도 모를 핵을 볼모로 한 벼랑끝 전술을 더 이상 감싸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핵이 북한의 개혁·개방 행보에 기폭제나 촉매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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