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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건 빛 칼럼 ] 악의 문제
2018년 01월 31일 (수) 11:07:08 김희건 목사 dockimus@naver.com

김희건 목사 / 빛 교회 담임, 조직신학, Ph. D.

   
▲ 김희건 목사

평상시 사람이 악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는 비교적 평안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소풍 길이 아니다. 언젠가는 고통을 의식해야 하고, 악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혹, 이 시간에도 이 악과, 악이 가져오는 고통의 문제로 마음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악의 문제를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

예수님도 기도를 가르치면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소서.” 말씀하셨다. 악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요, 떠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악의 문제는 오랜 역사를 갖는다. 신비한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 속에 어떻게 악이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의 타락 이전에 “악한 자” 마귀가 있었다. 물론 이 마귀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악의 기원을 말하자면, 마귀를 가리킬 수 있겠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어떻게 악의 화신으로 변할 수 있을까,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은 악에 빠졌다가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이 악한 자 마귀에게는 회개가 없다. 자신의 의지로 타락하였고, 그 결과 영원히 악의 화신이 되어 영원한 심판 아래 있다. 문제는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의 현실 뒤에 이 악한 자 마귀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여럿인 바, 사단은 “대적자(Adversary)”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 좁게는 교회 역사에서 이 악과의 갈등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통의 배후에 이 악의 존재, 사단이 있다. 그는 교활한 뱀의 형태로 나타나 사람을 유혹하고 넘어뜨린다. 그는 사람을 죄에 빠트리고 참소한다는 뜻에서 “마귀(참소자, accuser)”로 불리고, 이 세상을 뒤흔드는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전설적인 “용”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파괴하는 자라는 점에서 “아볼루온(파괴자)”으로 불린다.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그를 “이 세상 임금”이라 부르셨다. 사도 바울은 그를 가리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불렀다. 저 높이 계신 하나님 아래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라는 점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사람이 고통을 받는 배후에는 이 악한 자의 활동이 있다. 사람 속에 탐심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사람들로 고통 속에 살게 하는 장본인이다. 성령이 오셔서 사람을 주장하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지만, 이 악한 자가 사람 속에 들어가면, 사람은 온갖 불의와 탐심에 사로 잡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게 된다. 성령의 인도함 속에 사는 사람이 소수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악한 자의 지배 속에서 악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 결과 우리 주변에는 어느 때나 악의 현실이 펼쳐진다.

   
▲ ⓒpixabay.com / krampus-1086082_640

오늘도 가정 속에 이 악의 존재의 활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게 된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 속에 살기 보다는 탐심과 미움에 끌려 사는 사람이 있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악의 존재가 가장 살기 좋은 땅은 미움과 탐심이 있는 곳이다. 더 정확하게는 이 미움과 탐심도 악한 자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는 표이다. 사람은 성령의 임재와 지배 속에 살든지, 아니면, 이 악한 자의 지배 속에 살든지, 이 둘 중 하나의 지배 속에 살고 있다.

성령이 다스리는 곳에는 “의와 화평과 희락”이 지배하고, 악한 자, 마귀의 영향과 지배 아래 있는 곳에는 온갖 불의와 탐욕이 지배한다. 이로 볼 때, 사람은 스스로 주인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또는 마귀의 지배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이 옳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영향 아래 있었던 루터에 의하면, 사람은 타고 다니는 말과 같다고 한다. 그 위에 하나님이 타고 계시면, 의와 영생의 길로 나아가고, 그 위에 마귀가 타고 지배하면, 악과 심판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람을 집으로 비유하셨다(마 12:45).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집은 언제든지 “더러운 귀신의 집”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사람은 하루하루 누군가의 지배 속에 살고 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하루하루 삶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속에 살기를 기도하며, 의와 평강의 길로 나아간다. 이런 삶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악의 영향, 악의 통치 속에서 악한 삶을 살게 된다. 이 문제를 가벼이 넘어갈 수 없는 까닭은, 사람이 악의 지배 아래 살면, 그 옆에 사람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 받는 배경 뒤에는 거기 악한 자의 존재와 활동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탐심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와 고통을 가져온다. 이 사실은 가정 속에, 교회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누군가 미움의 감정을 품고 살면, 그 주변에는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다. 얼마 전, 텍사스에 있었던 총기 사고 뒤에는 자기 부인에 대한 원한을 품은 한 남자가 있었다. 가까이서 누군가의 탐심과 미움은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타게 만든다. 악의 문제는 항상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에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것이요, 날마다 우리는 이 악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경험하는 이 악은 악한 자 마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의 타락의 배후에도 이 악한 자가 있었음을 안다. 이 악한 자의 최후를 성경이 증거한다: “영원토록 꺼지지 않은 불 못”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장본인, 이 세상을 요란케 하고 파괴했던 죄의 결과는 영원한 불 못과 형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날 이 악의 화신과 함께 “그의 집”이 되었던 모든 사람들도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들어갈 것을 경고한다(계 20:10, 15).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이 악을 허락하신 이유는 어디 있을까? 이 악, 악한 자는 자신의 악의 대적과 항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리시는 신”으로의 한계 아래 있다고 가르친다. 그를 이 세상 임금으로 부르지만,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사도 바울은 그를 가리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불렀지만, 그 공중 위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욥기에 의하면, 그 악의 물결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고 한다(욥 38: 11).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수단은 장차 저버림과 심판의 길로 나아간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교회를 괴롭혔던 악의 수단들은 모두 심판 속에 소멸되었다.

악에 대한 이런 성경의 증거는 악의 현실 속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 있지만, 그 고통을 통제하고 섭리하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현실도 사실 하나님이 주관하는 섭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구약 요셉의 경우, 그는 형제들과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무고한 고통을 받았지만, 사실 그 고통을 허락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그가 받는 고통을 통해 요셉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주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다윗 왕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사울 왕으로 인해 겪었던 고통은 후일 그가 왕으로 다스리는 일에 큰 유익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은 악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통해 자기 사람들을 연단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한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유익을 얻게 된다. 그 절정에 예수님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도 고통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다(히 5: 7). 사람은 이 고난을 통과하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울 때, 악과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유익한 도구가 된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때론 원치 않는 고통을 맞아 드리게 된다.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이 악과 고난을 대면하고 극복해야 하는가에 있다. 구약의 요셉, 다윗,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보는 특징은, 그들은 이 악과 정면 대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악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항상 악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악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악의 현실 속에서 “믿음과 진실”을 지켜 사는 일이 중요하다. 악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드리는가, 거기에 한 사람의 가치와 쓰임이 있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게 되면 자칫, 악에 동참하게 된다. 악한 사람과 구별이 될 수 없다.

성경은 그 악한 자와 악의 현실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알아,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또한, 그 악을 내 손으로 갚지 말고, 친히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께 맡길 것을 권면하신다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셨느니라”(롬 12:19). 또 말씀하시기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악, 악한 자는 자기 백성의 유익과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는 수단임이 분명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악의 현실을 살아가는 일은 힘들고 고달프다. 우리는 언제,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 참으로 먼 길이 앞에 있다. 아직도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에서 자유 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를 기다린다(롬 8:21). 마음의 간절한 기도는 어서 속히 주님이 오셔서, 의와 진실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평강의 땅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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