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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의 오심의 최종 결과로서의 구속’ 이해
2017년 12월 27일 (수) 11:24:41 윤지숙 기자 joshuayoon72@amennews.com

‘인자의 오심의 최종 결과로서의 구속’ 이해
- 누가복음 21장 25-28절


윤지숙 기자 / <교회와신앙>

Ⅰ. 서 론

누가-행전의 종말론에 대해서는 피츠마이어(J.A. Fitzmyer)가 지적한 것처럼 누가의 신학적 주제들 가운데 가장 난해하면서도 논쟁적인 측면을 함축한다.1) 특히 콘첼만(Conzelmann)의 저작 <Die Mitte Der Zeit>2)(‘때/시대의 중간’, 1953)으로 시작된 누가의 종말론은 수십 년간 학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토론의 중심주제로 부상했다.3)

그래서 학자들은 콘첼만의 논제를 중심으로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해 왔다. 첫째, 누가-행전은 예수님 ‘재림의 지연’을 설명하는가이다. 둘째, 누가는 여전히 ‘임박한 재림’을 믿고 있는가이다. 셋째, 지연과 임박 두 축의 현재적 종말 이해도 가능한가이다.

논자는 이 세 가지 입장 중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살필 때, 세 번째 입장이 가장 적합하다는 견해다. 누가의 종말론 강화(눅 21:5-28)의 절정(눅 21:25-28)인 ‘인자의 오심의 최종 결과로서의 구속’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누가-행전 전체 구조와 지연과 임박의 종말론적 이중구조 속에 성전파과와 이방인의 시대의 도래, 파루시아의 역사적-종말론적 위치를 재정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종말론적 전망 속에서 성전파괴 시기와 그 직전 징조를 묻는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며 끊임없이 경성해 있어야 할 것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본분에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현재의 종말론적 권고가 놓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자의 오심의 최종 결과로서의 구속’의 핵심 구절인 누가복음 21장 25-28절의 본문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Ⅱ. 누가의 종말론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동향

1. 누가-행전은 예수님 ‘재림의 지연’을 설명하는가?

사실 초대 교회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셨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왜 다시 오시지 않는가?’라는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콘첼만은 예수가 시간의 끝보다는 “시간의 중간”(middle of time)에 왔다고 이해하는 지연된 종말론이 누가의 구원사 개념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4) 이러한 파루시아(예수님의 재림) 종말의 지연때문에 누가는 당시 교회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계도(啓導)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고 보았다.5) 그래서 예수의 재림은 곧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한참 뒤에 오신다는 것으로 신화화(비묵시화) 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됐지만, ‘이 세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콘첼만에게 있어서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이스라엘 시대, 예수께서 활동한 시대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한 후의 때인 ‘교회의 시대’로 나누었다고 한다.6)

이러한 콘첼만의 견해에 대해 Ph. Vielhauer, G. Bornkamm, E. Grässer, E. Haenchen, 피츠마이어, 그리고 김득중 등 다수의 학자들이 동의하면서 누가복음 19:11 외 여러 구절들을 제시한다(막 1:15; 눅 4:15, 막 9:1; 눅 9:27;17:20-21, 막 13장; 눅 21장, 눅 13:14; 눅 21:20, 막 13:7; 눅 21:9, 막 13:6; 눅 21:8 등).7) 그러면서도 피치마이어는 누가복음 10:9을 주석하면서 누가는 초대 공동체의 기본적인 미래 종말론 약간(“some”)을 보존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양이나 비중으로 볼 때 누가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미래 종말론적 구절이 결코 적지 않으므로 드물거나 약간 뿐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당 하지 않다는 견해다.8)

윤철원은 콘첼만의 미래적 종말론적 견해에 대해 누가-행전에는 그에 상응하는 구절들은 너무 미미하다고 지적한다.9) 그는 콘첼만이 제안한 구속사의 3시대(율법-예수-교회) 구분이 아닌 약속(혹은 예언)과 성취 도식에 따라서 누가 문서를 읽게 한다고 언급한다.10) 이러한 해석은 역사의 과정에서 교회를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라 새 시대의 영광스런 성취의 자리에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날들”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이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 된다. 즉 콘첼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종말이 먼 미래로 밀려나고, 지금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선물은 단지 종말의 대체물이라는 것은 현재의 종말론적 의미를 과소평가한 결과로 볼 수 있다11)는 견해다.

또한 마가의 예수는 “예수가 갈릴리에 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4-15)라고 말한 반면, 누가의 예수는 “예수가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여 갈릴리로 돌아왔다”(눅 4:14)라고 만 기록했을 뿐 임박성은 생략했다고 주장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음을 보기 전에는 그의 제자들이 죽지 않을 것”(막 9:1)이라고 약속하는 반면, 누가복음의 예수는 그들이 “그 나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만 말한다(눅 9:27). 누가는 그들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이 연기된다면 그 종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명백한 충고로(눅 12:35-48), 그들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준비해야만 하는 종들에 대한 마가의 비유에 그것을 첨가한다(막 13:33-37)고 보았다.12)


2. 누가는 여전히 ‘임박한 재림’을 믿고 있는가?

조광호는 콘첼만 이후 누가의 종말론에 대한 학계의 입장을 보수적 입장, 적당히 비판적인 입장, 급진적이며 비판적인 입장 등 세 종류로 대별한다. 탈버트(C.H. Talbert), 마틸(A.J. Mattill), 해이즈(R.H. Hiers) 등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누가는 여전히 임박한 재림을 믿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보른캄(G. Bornkamm), 큄멜(W.G. Kümmel), 쉬나이더(G. Schneider)와 같은 학자들은 누가의 저작에서 임박한 종말은 완화되었으며, 누가는 종말론적 표상의 중심에서 한 발 물러서 있다. 하지만 그래써(E. Grässer), 핸캔(E. Haenchen). 쉬낙켄버그(R. Schnackenburg)는 누가는 임박한 종말을 내려놓고 구속사라는 상(像)으로 대신 했다고 주장하며 콘첼만을 반대한다.13) 예수의 때와 교회의 때가 성령의 활동으로 인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 시대로 나눈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14)이나, 재림 지연으로 인해 누가가 구속사적 신학이라는 새로운 사고를 하게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거나 누가를 모호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개념인 ‘초기 보편주의’의 대변자 또는 주창자로 보는 견해 에 대한 거부감15)도 나타낸다고 소개한다.

마틸(Mattill, Jr.)은 종말의 임박성을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다.16) 그는 사도행전에는 누가복음서 보다 종말에 대한 임박한 기대가 비밀로 남아있다고 보았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17:31, 24:15, 24:25를 선택해 여기서 쓰인 멜로(μελλω)를 주목해 임박한 종말을 설명한다. 즉 바울은 17:31에서 이 세상이 당할 심판의 임박함을, 24:15는 곧 다가올 부활 그리고 24:25는 멀지 않은 심판을 강조한다.17) 이 본문들은 누가 문서의 통일성과 일치된 종말론을 제시한다.18) 하이어스(Hiers) 역시 누가 문서의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한다.19) 그러면서도 누가는 이미 발생한 지연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임박한 종말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고 동시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문제를 다룬다고 보았다. 물론 사도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며 선교를 수행했던 때까지 종말은 오지 않았지만, 초대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수행하는 동안 언제든지 종말이 올 것을 기대한다.20)


3. 지연과 임박 두 축의 현재적 종말 이해도 가능한가?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기 위해서 지연과 임박함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종말론을 제안하는 학자들도 있다. 엘리스(Ellis)는 사도행전에서 현재와 미래 종말론의 두 주제를 통합해 “종말이 이미 현재화되었다.”는 실체로 봐야 한다고 보았다.21)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최근의 학자들로는 저벨(Jervell),22) 그린(Green)23) 그리고 놀란드(Nolland)다.24) 그들은 종말론적 희망이 예수의 부활에서 최초로 성취되었다고 이해하지만 여전히 미래의 파루시아 때 우주적 완성을 기다리는 두 단계 종말론의 틀을 제공한다.25) 놀랜드(J. Nolland)는 누가의 저술에는 재림 지연을 전제하면서도 재림과 종말의 임박성도 강조하는 내용들이 등장한다고 말한다.26) 김득중도 누가복음 21장에서 아직은 종말의 때가 아님을 분명히 적시하거나(8, 9절) 역사적 재앙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남아있음을 밝히다가도(24절)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강조한다(28절). 또한 이어 등장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에서도 임박한 종말을 부각시킨다(31-32절). 특히 그 날은 묵시적인 차원의 총체적 심판의 날임을 독자들에게 재인식시킨다(35절).27)

더 나아가 “종말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플렌더(Flender)는 누가에게 중요한 종말론적인 사건은 파루시아보다 도리어 승천이라고 강조한다.28) 그는 예수의 승천이 이미 발생했으므로,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희망은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누가가 성령 충만과 함께 파루시아가 가져올 혜택을 예수의 승천으로 양도했다고 본다.

프랭크린(Franklin)이스라엘의 희망이 예수의 승천으로 성취되었기 때문, 최종적인 파루시아가 발생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문제들을 쉽게 해결했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파루시아가 도래 할 시간에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29)

매독스(Maddox) 역시 사도행전은 마지막 때에 대한 기대가 이미 실현된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인 실체로 본다.30) 그는 행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에서 누가는 보다 임박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이 문맥은 현실적 실체인 하나님의 나라에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31)

하지만 바르취(Bartsch)는 플렌더가 제안하는 현재적 종말론에 반대한다. 그는 이미 종말이 실현되었다고 믿는 초대 교회에 경고할 의도로 누가복음이 기록되었다고 보았다.32) 뿐만 아니라 누가는 현재의 구원 체험에 만족하는 일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을 위한 희망을 환기시키려한다는 견해다.33) 그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구원의 최종적 완성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누가는 지금도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대하도록 촉구한다고 피력한다(21:36). 결국 바르취는 종말 사건이 발생할 미지의 시간(時間)보다 그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실성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윤철원도 임박한 종말로 누가의 종말론을 파악하는 시도는 다른 의도가 아닌 누가의 목회적 의도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파루시아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불어넣으므로 위축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고무시키려는 현실적인 관심이라고 보았다.34)


Ⅲ. 누가복음 21:25-28의 ‘인자의 오심’에 대한 이해

누가는 복음서에서 종말론의 문제를 여러 곳에서 다루고 있다(6:20-26; 9:31, 51, 10:11[9절참조]; 12:1-13:9; 16:16; 17:20-18:8; 19:11-27; 21:5-38, 24:26 등). 특히 누가복음의 종말론 강화(21:5-38; 마 24장; 막 13장)의 절정(21:25-28)에서 ‘인자의 오심’은 다니엘서 7장 13절의 ‘인자 같은 이’에 대한 구약적 배경과 마태복음 10장 23절의 신약적 배경에서 설명할 수 있다.


1. 단 7:13-14의 ‘인자 같은 이’에 대한 이해

김대웅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등장하는 ‘인자’의 정체에 대해 ①메시아, ②천사적 존재, ③이스라엘 민족, ④여호와의 영광, ⑤아담 등 모두 가지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했다.35) 이들은 인자 같은 이의 정체를 환상 속에 등장하는 메시아적 개인(단 7:13-14)으로만 주장하거나, 혹은 그 환상에 대한 천사의 해석에서 ‘성도’로 등장하는 민족적 집단(단 7:22, 27)로만 주장한다. 하지만 김대웅은 개인이나 집단 간의 이분법적 상호 배타적 이해를 지양한다며, 다니엘서 7:9-14와 에스겔서 1:26-2:1의 ‘보좌’를 인유하면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며, 인자 같은 이의 정체를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신적 군왕(개인)과 종말에 변형될 하나님 나라의 백성(집단)이라고 제시한다.36)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특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구름과 함께 등장한 인간의 모습을 띤 개인에게 주권과 나라를 주심으로 지상에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의 절대주권을 구현한 영원한 군왕으로 삼으셨다고 주장한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신현(神現)과 동반되는 구름 이미지로 여호와 영광을 상기시키며, 이 군왕이 인간 이상의 신적 존재임을 알려준다. 이 군왕은 이제 민족들, 종족들, 언어들의 섬김을 받는다(7:14)고 강조한다.37) 그런데 이 군왕은 하나님의 영광처럼 보좌에 앉지는 않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 앞에 서 있음으로써 그를 시위하는 천사들 무리 속에 자리한다면서,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서 있는 이 군왕에게 영광이 수여된다(7:14).38) 또한 인간 나라 통치자에 대한 하늘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를 독자에게 암시라며 성도들(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한 고난의 기간인 한 때, 두 때, 반 때가 끝나면 영원한 나라를 얻고(7:18),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부활하여 영원히 빛난다(12:2-3)는 견해다.39) 결국 김대웅은 단 7:13-14를 통해 인자 같은 이의 정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군왕임을 강조한다.


2. 마태복음 10:23의 ‘인자의 오심’ 이해

양용의도 단 7:13-14에서 ‘인자의 오심’은 인자가 땅으로 오는 것보다는, 권위와 영광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가는 것과, 그 결과 인자의 권위와 왕권이 온 세상에서 인지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마태복음 10:23의 ‘인자의 오심’은 인자의 권위가 온 세상에 공개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지되는 결정적인 심판적 행위로 마태복음 24:30, 44에서처럼 ‘성전 파괴’를 가리킨다는 견해다.40) 양용의는 오늘날 독자들에게 이 구절이 예수의 재림과만 연관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들이 구약의 이러한 배경적 이해를 충분히 공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복음서 안에서 ‘인자의 오심’ 언어는 다양한 상황들에 적용되고 있으며(예, 변화산 사건,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성전파괴, 재림 등), 재림도 그 다양한 적용들 중 한 경우일 뿐이라고 한다.41)

그런 면에서 마태복음 24:36-25:46의 ‘마지막 때에 대한 비유들’에 대해 양용의는 예수의 다섯 가르침 단락들 중 마지막 단락으로 전체적인 주제는 심판으로 보았다. 그는 전반부(24:1-35)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심판, 후반부(24:36-25:46)는 마지막 때 있게 될 심판으로 다뤘다. 예수의 가르침의 대상을 제자들에 대한 사적인 가르침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하지만 24:36은 24:3의 “이 일들이 언제 있을 것입니까?” 또한 “주님의 오심과 세상 끝의 징조가 무엇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세상 끝’(곧 ‘인자의 재림’)의 시기와 마 24:36의 ‘그 날짜와 시각’(τῆϛ ἡμέραϛ ἐκείνηϛ καὶ τῆϛ ὥραϛ)에 대한 예측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한다.42)

   
 

즉, 마태복음에 나타난 제자들의 질문(3절)은 성전 파괴와 세상 끝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제자들이 성전 파괴를 세상 끝의 도래 자체 또는 그 전조로 인식할 정도로 대단히 엄청난 사건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는 제자들의 기대의 오류를 지적해 줄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는 ‘성전파괴’나 ‘세상 끝’에 대한 설익은 기대와 흥분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우선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의 출현을 경고한다(24:4-5). 또한 실제로 전쟁이나 국제적 분쟁들과 같은 사회적 혼란(24:6-7), 그리고 기근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24:7) 역시 ‘세상 끝’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아직 끝은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24:6).43) 이러한 상황에 처한 제자들에게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10:22, 24:13)이 주어진다.44)

양용의는 24:31의 구약적 배경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다시 모여들 것과 관련된다(사 27:13; 슥 2:6; 참조. 신 30:4)고 한다. 하지만 본 절에서 모여드는 자들은 ‘그의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성전 파괴 사건과 더불어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인자의 심판자로서의 권위가 확인됨으로써, 이제 예수의 복음이 더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그의 사자들(11:10)에 의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것임을 언급한다(8:11-12, 21:43, 22:8-9). 여기서 ‘모은다’는 개념은 한 장소에 모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영향력 하 에 들어가게 하는 것, 곧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도록 초청하는 것을 의미한다.45)


3. 누가복음 21:25-28의 이해

마태복음 24:36-25:46(막 13장)의 ‘마지막 때에 대한 비유들’과 같은 누가복음의 종말론 강화(21:5-38)는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성전의 위용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발단이 됐다(21:5). 예수님께서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될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질문하는 데서부터 예수의 종말 강화가 시작된다.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킬 만한 '무시무시한 것들'과 ‘하늘의 징조’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김영호는 무서운 것들과 하늘로부터의 징조들이 출현하기 이전 즉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21:28)에 대한 첫 번째 종말의 파노라마의 한 시점이다. 두 번째 종말은 제자들의 질문의 핵심사항인 ‘성전파괴’에 관해 언급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성전 파괴가 있기 전, 예수님 자신(21:15)이 그들에게 ‘입과 지혜’를 주실 것이며(21:12b-19),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일이 이스라엘의 큰 환란 및 심판과 병행될 것이며(21:20-24b), 그 후에는 이방인의 시대가 이어질 것이라는 견해다(21:24c).46)

3.1. 인자의 오심과 연결된 ‘이 일들’에 대한 해석들

김영호는 ‘이러한 일들’에 관해 세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인자의 도래가 있을 때까지 모든 정치적 민족적 사건들, 제자들의 핍박, 예루살렘 멸망 등 모든 사건들, 두 번째는 성전파괴, 세 번째는 인자의 도래 바로 직전에 있을 일들 즉, 눅 21:15-26에 묘사된 일들이라는 견해다.47) 첫 번째의 경우는, “이 일이 시작하면,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속이 가까웠음이라”는 말씀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거나, 전쟁과 기근이 있거나, 하늘에서 징조들이 나타날 때는 언제든지 구속이 가까웠다는 뜻으로 종말론적 경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48) 하지만 이 견해는 ‘구속이 가까웠을 때’ 사람의 내적 외적 기대와 소망에 관한 비유적인 표현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두 번째, 성전이 파괴됐을 때라면 눅 21:28a-b는 “이 일들이 시작된 것”으로 구원을 기대하라는 권면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다.49) 그렇게 되면 성전 파괴 후 종말까지를 구속의 기대가 좌절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이 일들이 시작되면”이란 말을 종말론적 징조가 전 세계적으로 우주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할 때 제자들에게 용기를 가지라는 위로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다.50)

3.2 '신현' 현상으로의 인자의 오심(21:25-27)

학자들마다 예수님의 종말 강화(21:5-36)에 대한 이해가 다르지만 ‘인자의 오심(21:27)’이 일련의 사건들의 시작점과 제자들의 구속이 긴밀히 연결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인자의 오심 앞에 동반하는 현상들은 우주적 징조들과 전 세계적인 재난들의 네 가지 영역이 이중 교차대조를 통해 구약에서 신현(하나님의 나타남, Theophanie)시 나타나는 현상과 동일시됨을 알 수 있다(21:25-27).51) 누가는 이 사건들을 ‘하늘에 나타날 크고 두려운 징조’(21:11)로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바로 뒤에 오는 ‘구속의 의미는 예수의 오심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경험했던 구원의 수준이고(e.g. 19), 선지자들의 예언하던 그 하나님의 신현과 일치한 것으로 보면 이는 종말론적 최종적 궁극적 구원이요(cf. 1:68-79),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조광호는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죽기 전에 그 권세를 제자들에게 넘겨주셨다(눅 1:32f.; 19:12, 38; 22:29).52) 승천을 통해 자기 영광에 들어가신 예수(눅 24:26)53)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다(눅 22:69; 행 5:55). 재림 때까지(눅 22:18; 23:42; 행 3:20) 그는 복음이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돕고 계신다(행 9:4ff., 17; 16:7 ‘예수의 영’). 주님의 지원에 힘입어 사도들은 주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며(2:36; 5:42; 9:22; 17:3; 18:5, 28)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발휘하고(3:6; 4:10; 9:34; 16:18) 세례를 주었다(행 2:38; 10:48; 19:5)는 견해다.54)

3.3. 인자의 오심의 결과로서의 ‘구속’

예수님은 자신의 종말 강화(21:5-36)에서 인자의 오심(21:27)55)의 최종 결과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님은 그의 종말 강화를 위로의 말로 마감하신다. 특히 ‘구속’(ἀπολύτρωσιϛ)이라는 단어는 누가-행전에서 눅 21:28에만 한 번 등장한다. 김영호는, 이 단어는 주제적으로 볼 때, 동일 의미 군에 속하는 두 단어를 누가복음 첫 부분에서 ‘백성의 구속’(λύτροω; 1:68)과 ‘예루살렘의 구속’(λύτροωσιϛ; 2:38)에서 만나고, 누가복음 끝 부분인 ‘이스라엘의 구속’(λύτροω; 24:21)과 연관시킨다. 그리고 이 주제들을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총괄하며, 모두 ‘메시야’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56)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다시 오심을 언급하시면서 바로 이어 제자들의 구속을 말씀하신다고 이해한다.  

   
 

이 말씀에서 ‘이 일들이 시작되면’과 ‘제자들의 구원’이 연관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일들’(ταῦτα; 21:28a)이 무엇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와 내용이 결정된다고 해석한다.57) 그러면, ‘이 일들’과 ‘구속’에 관해 어떤 견해들이 있는가?

첫 번째는 수동적인 의미로서 “종말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콘젤만(Conzelmann)은 종말이 오면 고난도 지나간다고 보았다.58) 클라인(Klein)도 구속이란 구원개념들 중 하나로서, 땅에 있는 인간에게 체험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59) 두 번째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마샬(Marshall)은 ‘구속고통으로부터 해방이요,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한다.60) 세 번째, 보퐁(Bovon)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해방, 육과 영의 새로워짐, 불의와 억압의 종결, 의와 평화의 확립, 관계의 전복을 의미한다고 좀 더 확대 해석한다.61) 네 번째, 볼터(Wolter)는 인접 문맥을 통해 ‘구속을 고난 경험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가까이 옴(21:31, 22:18)은 인자의 오심(21:28)과 의미론적 동의체(Isotopie)로 보았다.62) 다섯 번째, 와인라이트(A. W. Wainwrihgt)는 ‘구속’이란 “예루살렘 멸망의 반대”라는 논지다.63) 뿐만 아니라 츠메이에브스키(Josef Zmijewski)는 ‘구속이란 지상적 고난으로부터의 해방 이상, 하나님의 통치에 최종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견해다.64) 여섯 번째, 브릿지(Bridge)는 눅 17:24과 행 1:9-11에 등장하는 ‘인자의 옴’과 눅 21:27의 '인자의 오심'과 관련시켜 '천상적 연합의 형태'(cf. 살전 4:16-17)를 의미한다.65) 마지막으로, 모티브가 본문을 연결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경우에 구속이라는 개념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견해다. 하지만 누가복음 21장의 예수님의 종말론 강화(21:5-36)는 21:24과 21:25 사이에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힐 분명한 끝이 없는 시간 표시로 기록되어 있다(21:24b)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3.4. 종말론적 이중 전망구조에서 본 구속

따라서 예수님은 성전 파괴와 이방인의 시대의 도래를 언급하심으로써 성전 파괴뿐만 아니라 파루시아의 역사적-종말론 위치를 재정의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종말론적 전망 속에 성전파괴 시기와 그 직전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현재와 그들이 맞이하게 될 현재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역사의 한 지점에서 인자의 오심의 결과로서 구속을 인내로서 기대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21:19). 그런 면에서 김영호가 인자의 오심이 종말론적 최종 가치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 파루시아와 종말론적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66)고 한 것에 동의가 된다.

결국 예수님의 이중 전망 속에는 제자들과 독자들의 현재를 반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박해를 받고(21:12a), 회당과 옥에 넘겨지며 임금들과 권세자들 앞에 끌러가(21:12b), 증언하게 될 것(21:13)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동행(21:14-15), 부모와 형제, 친척, 친구가 넘겨주고(21:16),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것(21:17), 인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21:19)고 본다. 비록 예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사람들의 기대보다 지연되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자들인 교회는 지금 현재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미래에 다가올 최종적 완성으로서 파루시아를 선포해야 할 곳이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Ⅳ. 결 론

콘첼만(Conzelmann)으로부터 시작된 누가-행전의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입장들은 누가 문서에 대한 경쟁적인 토론에 하나의 촉매 역할로 작용한 공적은 인정받을 만하다. 하지만 마틸(Mattill)과 하이어스(Hiers)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견해나 엘리스(Ellis)와 놀란드(Nolland)의 현재적 종말 이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와 교회의 시대는 물론 차이가 있을 수 있다.67) 하지만 누가복음 17:20~37, 19:11~27, 21:7~36 등을 비롯해 사도행전 1:6~8, 10:42, 17:31, 23:25, 24장 등의 구절을 통해 파루시아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누가복음은 임박한 종말론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가 종말을 불확실한 미래로 밀어냈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성령의 활동 같은 종말론적 사건들이 현재화되었음을 주장하는 동시에 종말의 임박함이나 미래에 다가올 파루시아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견지했다고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학자들마다 예수님의 종말 강화(21:5-36)에 대한 이해는 다르지만 ‘인자의 오심(21:27)’이 일련의 사건들의 시작점과 제자들의 구속이 긴밀히 연결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구속’의 의미는 예수의 오심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경험했던 구원의 수준이고(e.g. 출 19장),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또한 인자의 오심 앞에 동반하는 현상들은 우주적 징조들과 전 세계적인 재난들이 이중 교차대조를 통해 구약에서 신현(하나님의 나타남, Theophanie)시 나타나는 현상과 동일시됨(21:25-27)으로 종말론적 최종적 궁극적 구원이요(cf. 1:68-79), 구원의 완성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눅 21:25-27은 인자의 재림의 징조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징조다. 더욱이 인자의 재림의 때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다. 현 상황에서 잦은 혼란과 난리에 직면하게 되고, 온갖 고난과 시험을 당하게 될지라도 제자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도둑과 같이 갑자기 임하실 인자의 심판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경성하며 항상 깨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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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92.10.29.자 기사, “‘10.28휴거는 역시 소동’ 헌납재산분쟁 후유증 클 듯”
 

각주)-----------

1) J.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Garden City: Doubleday, 1981, 231.

2) H. Conzelmann, Die Mitte der Zeit. Studien zur Theologie des Lukas, 5th ed. (Tübingen: J.C.B. Mohr, 1964); 영역 The Theology of St. Luke (G. Buswell [tra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2) (=Die Mitte der Zeit, 2nd ed. 1957). 최근 콘첼만의 저술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한국 논문으로는 조광조, “콘첼만의 ‘종말 지연’에 대한 비판적 논구,” 신약논단 24(3) 2017.9, 438-518과 김창선, “누가의 구원사-H. Conzelmann의 구원사 이론 비판,” 신약논단10 (2003), 285-304를 들 수 있다.

3) Conzelmann, Die Mitte Der Zeit, Tübingen: J.C.B. Mohr, 1953 [The Theology of St. Luke, London: SCM, 1960.]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그의 교수자격 취득을 위해 제출된 논문에 튀빙겐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을(‘누가복음에서의 지리적 표상들’) 더해 종합한 결과물이다(초판 1954년).

4) R. Schnackenburg, “Die lukanische Eschatologie im Lichte von Aussagen der Apostelgeschichte,” Glauben und Eschatologie, ed. by E. Grässer et al. (Tübingen: Mohr Siebeck, 1985), 249; W. Gasque, <사도행전 비평사>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7), 400ff; 김득중, <누가의 신학> (서울: 컨콜디아사, 1991), 3f, 11f, 210; 윤철원,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한 누가의 종말론 해석,” <기독교 사상 논단>(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1999), 39.

5) cf. H. Conzelmann(1960) 137-44; 윤철원,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한 누가의 종말론 해석,” 40: 재림 지연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교회가 현실의 정치 체제인 로마 제국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한가에 대해서 질문하게 된다. 그래서 콘첼만의 논제는 정치적 호교론(political apologetic)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카시디는 콘첼만의 호교론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교훈이 로마 정부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음을 제안한다(R.J. Cassidy, Jesus, Politics, and Society, NY: Orbis Books, 1978. 그리고 idem,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cts of the Apostles, NY: Orbis Books, 1987).

6) Conzelmann, 9, 94: 이 세 시대 구분은 H.V. Baer, Der Heilige Geist in den Lukasschriften (BWANT III,3; Stuttgart, 1926)에서 가져왔다.;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175, 주 19.

7) 조광호, “콘첼만의 ‘종말 지연’에 대한 비판적 논구”, 489-491.

8) Fitzmyer, Luke X-XXIV, 849

9) R. Maddox(1982) 129.

10) cf. R.F. O'Toole, The Unity of Luke's Theology: An Analysis of Luke-Acts, Good News Studies 9, Wilmington, Delaware: Michael Glazier, 1984(한서: 유철 역, 루가신학의 통일성: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분석, 서울: 카톨릭출판사, 1991); C.M. Tuckett, Luke, New Testament Guide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44-7.

11) 윤철원, 45

12) 윤철원,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한 누가의 종말론 해석,” 40.

13) 조광호, “콘첼만의 ‘종말 지연’에 대한 비판적 논구, 492.

14) Grässer, “Parusieerwartung,” 100.

15) 조광호, 492.

16) A.J. Mattill, Jr., Luke and the Last Things: A Perspective for the Understanding of Lukan Thought, Dillsboro, NC: Western North Carolina Press, 1979.

17) A.J. Mattill, Jr.(1979) 41-54; cf. M. Powell, What Are They Saying About Acts? Mahwah, NJ: Paulist Press, 1991, 59.

18) A.J. Mattill, Jr.(1979) 41.

19) R.H. Hiers, "The Problem of the Delay of the Parousia in Luke-Acts," NTS 20(1974): 145-55.

20) R.H. Hiers(1974) 148, 155.

21) E.E Ellis, Eschatology in Luk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2.

22) J. Jervell, The Theology of the Acts of the Apostles, New Testament The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100-15.

23) J.B. Green, The Theology of the Gospel of Luke, New Testament The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94-101.

24) J. Nolland, "Salvation-History and Eschatology", in I.H. Marshall/D. Peterson (eds.), Witness to the Gospel: The Theology of Acts, Grand Rapids: Eerdmans, 1998, 68-70.

25) E.E. Ellis(1972) 19-20.

26) J. Nolland, “구속사와 종말론,” I. H. Marshall (ed.), “사도행전 신학,” <복음의 증거>, 류근상 역 (고양: 크리스챤 출판사, 2004), 85f, 100f: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 영역과 미래적 영역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27) 김득중, <누가의 신학>, 205.

28) H. Flender, St. Luke: Theologian of Redemptive History, Philadelphia: Fortress, 1967.

29) E. Franklin, Christ the Lord: A Study in the Purpose and Theology of Luke-Acts, London: SPCK, 1975.

30) R. Maddox, The Purpose of Luke-Acts, Edinburgh: T&T Clark, 1982, 132-37.

31) R. Maddox(1982) 136-37.

32) cf. J.T. Carroll(1988) 22-24. Bartsch의 책은 Carroll에서 재인용: H. Bartsch, Wachtet aber zu jeder Zeit! Entwurf einer Auslegung des Lukasevangeliums, Hamburg-Bergstedt: Herbert Reich-Evangelischer Verlag, 1963.

33) cf. I.H. Marshall, Luke: Historian and Theologian, Grand Rapids: Zondervan, 1970, 77-187(한서: 이한수 역, 누가행전, 서울: 엠마오, 1993,). 우리는 콘첼만의 구원사 신학에 대한 반론으로 구원 신학을 주장하는 마샬의 견해를 참고하여 누가 신학의 핵심 주제를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샬은 누가의 목적이, 콘첼만의 주장처럼, 구원사 도식을 가지고 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소식을 독자들에게 증언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임을 강조한다.

34) 윤철원, 42: cf. M.A. Powell, What Are They Saying About Luke? New York: Paulist Press, 1989, 103-21. 포웰은 누가의 목회적인 관심에 대해서 누가복음서보다는 사도행전에서 더 명백하게 다루어진다고 말한다.

35) 김대웅, “다니엘의 밤 환상들 속 ‘인자 같은 이’ 정체성 연구, <제1회 종말론학회 논문집>, (이필찬연구소, 2017), 1; 김대웅은 ‘인자’의 정체에 대한 학자들의 다섯 가지 견해에 대해 ①메시아(Sellin, Bentzen, Dhanis, Wifall, Gese, Garagounis), ②천사적 존재(Schmidt, Grill, Stier, Kruse Mϋller), ③이스라엘 민족(Hertlein, Montgomery, Dodd, Browman, Bewer, Heaton, Poteous, russell, Hooker, Glasson, Mosca), ④여호와의 영광(Procksh, Rowland, Day, Caragounis, Muilenburg, Balz), ⑤아담(Volz, Steinmann, Farrer, Stier, Dexinger) 등으로 정리한다.

36) 김대웅, “다니엘의 밤 환상들 속 ‘인자 같은 이’ 정체성 연구, 1.

37) 김대웅, “다니엘의 밤 환상들 속 ‘인자 같은 이’ 정체성 연구, 5-6.

38) 김대웅, “다니엘의 밤 환상들 속 ‘인자 같은 이’ 정체성 연구, 12.

39) 김대웅, “다니엘의 밤 환상들 속 ‘인자 같은 이’ 정체성 연구, 4.

40) 양용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186, 413; D. Hagner, Matthew 1-13, WBC 33A, (Dallas: Thomas Nelson, 1993), 280.

41) France, Divine Government, 64-84; 양용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399.

42) 양용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399.

43) 양용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404-405.

44) 양용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406.

45) 양용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413.

46) 김영호, “누가의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이해”, <교회와문화> 38 (2017), 92-93.

47) 김영호, “누가의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이해”, 80.

48) Th. Zahn, Das Evangelium des Lukas, KNT 3 (Leipzing: Deichert, 1u.21913); 김영호, 82 재인용.

49) J. van Bruggen, Lucas: Het evangelie als voorgeshiedenis, CNT(K) Ⅲ/4 (Kampen: Kok, 21996), 364; 김영호, 83 재인용.

50) E. Klostermann, Das Lukasevangelium, HNT Ⅱ/1 (Tübingen: Mohr, 1919), 203; 김영호, 83 재인용.

51) 김영호, 87.

52) Ben Witherington Ⅲ, The Acts of the Apostles: A Socio-Rhetorical Comentary (Grand Rapids, Mich: W.B. Eerdmanns Pub., 1998), 112; 조광호, “콘첼만의 ‘종말 지연’에 대한 비판적 논구”, 503.

53) Nolland, <누가복음 18:35-24:53>, 595.

54) 조광호, “콘첼만의 ‘종말 지연’에 대한 비판적 논구”, 503-504.

55) 조광호, 493: 눅 21:31의 병행구에서는(막 13:29; 마 24:33) ‘하나님 나라’ 대신 ‘인자’ 가 가까이 이른 줄 알라고 말한다. 누가는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지 않고(kairo;", 21:8)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Fitzmyer, Luke X-XXIV, 1353). M. Wolter, Das Lukasevangelium (Tübingen: Mohr Siebeck, 2008), 681은 눅 21:31 주석에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역사 안으로 돌입해 오고 있음을 강조한다.

56) Cf. F. Bϋchesl, 'ἀπολύτρωσιϛ' , ThWNT Ⅳ, 1942, 354; 김영호, 80.

57) 김영호, 81.

58) H. Conzelmann, Die Mitte der Zeit. Studien zur Theologie des Lukas, BHTh 17 (Tübingen: J.C.B: Mohr, 51964), 215, 각주 2; 김영호, 83 재인용.

59) H. Klein, Das Lukasevangelium, KEK Ⅰ/3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0(1)2006), 651, 각주 91; 김영호, 84 재인용.

60) 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Exeter: Paternoster Press, 1978), 777.

61) Bovon, Lk Ⅳ, 191: 보퐁은 일반적인 그리스 어법(어떤 노예나 전쟁 포로의 해방) 또 신약에서 특별한 의미(완전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된 종말론적 해방[롬 8:34; 옙 1:14, 4:30])로도 해석한다.

62) Wolter, Lk, 678.

63) A. W. Wainwright, Luke and the Restoration of the Kingdom to Israel, ET 89 (1977), 76-79.

64) J. Zmijewski, Die Eschtologiereden des Lukas-Evangeliums: Eine traditions- und redaktionseschichtliche Untersuchung zu Lk, 21 5-36; 김영호, 85 재인용.

65) S. L. Bridge, Where the Eagles Are Gathered: The Deliverances of the Elect in Lukan Eschatology, JSNT.S 240, Lodon u. a. : Seffield Academic Press, 2003, 140: 김영호, 85 재인용.

66) 김영호, 96.

67) cf. C.M. Tuckett(1996) 36. 우리는 둘 사이의 차이를 고려할 수 있다. 예수는 그가 사역하는 기간에는 함께 하지만, 교회 시대에는 부재하다. 예수의 승천으로 인해서 그 자리를 성령이 대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하다(행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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