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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수 목사 설교 ] 보냄을 받은 사람들
2017년 10월 11일 (수) 11:48:03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마태복음 10장 1-4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열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유다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 사람들을 ‘열두 사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라는 말은 원어 ‘아포스톨로스’(άποστόλος)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5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친히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내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에게 가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라고 이 열두 사람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열두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라는 이름

저는 이 이름들을 묵상하다가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4절의 맨 마지막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장 큰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왜 이 명단에 이렇게 저주스러운 이름을 그대로 실어놓았을까요? 보냄을 받았지만 배반한 사람이기에 그 이름을 지워야 하지 않을까요?

지나간 역사를 보면 족보에서 그 이름이 지워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입니다. 이 사람은 조선시대 명문가 우봉 이 씨 집안의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 이름이 이 가문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수치스러운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이 가문은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자랑스러운 사도의 명단에 배신자 가룟 유다가 여전히 들어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성경은 왜 그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성경은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상황에 따라서 편집하거나 조작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거나 잘못된 일일지라도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택함받고 훈련받고 보냄을 받았지만 실패했고 배반한 가룟 유다의 이름도 그대로 기록해 놓았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열둘을 모두 다 보내셨습니다. 그 중에 성공할 것 같은 제자만 따로 골라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만 선별해서 보내신 것도 아닙니다. 모두 다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보냄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열매를 많이 맺어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론 주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분노케 만들고 심지어 주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저들 모두가 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훗날 결과가 차이가 있어서 평가가 다 다르겠지만 제자들은 모두가 다 보냄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 28:1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명령이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훈련을 끝내시고 저들 곁을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가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 ⓒpixabay.com / people-2592236_640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훈련시키시던 초창기 말씀입니다. 아직 충분히 훈련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때부터 보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훈련이 끝나고 저들이 일정 수준에 올라온 뒤에도 보냄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일관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목적이 한 가지라는 점입니다. 바로 ‘보냄’입니다. 저들을 세상으로 보내셔서 이 세상 속에 복음을 전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래 전 교육전도사 시절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노래 율동이 생각이 납니다.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 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 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 가라는 예수님 명령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어린이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아이들이 무슨 뜻인지 알고 불렀는지 모르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이 찬양을 부르며 보냄을 받았다는 점을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다짐과 결단을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은혜도 받고, 말씀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받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제자와 사도

본문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열두 사람에 대한 호칭입니다. 2절에 이 열두 사람을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원래 ‘제자’라고 불리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호칭에 변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제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이제 사도라고 불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제자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원어 ‘마데테스’(μαθητής)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뜻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열두 제자’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란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보냄을 받은 사람일까요? 바로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께 배운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한 번 보려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이적을 보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자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대해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예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내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배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 6:3을 보면 호세아 선지자가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를 잘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지킨다고 지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도이기 전에 제자여야 합니다. 보냄을 받은 삶을 살기 전에 배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힘써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힘써 예수를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공자는 <논어>의 ‘자한’편에서 배움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꽃나무로 비유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싹으로 꽃피지 못하는 것도 있으며, 꽃피고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

이 말은 배우는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첫째는 싹만 돋고 꽃이 피지 못한 사람, 둘째는 꽃은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 그리고 셋째는 열매까지 맺은 사람입니다. 특히 공자는 꽃은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배워도 잘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배워서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보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나아가 보냄을 받고 열매까지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먼저 잘 배워야 합니다. 힘써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그냥 가면 안 되고 보냄을 받아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비주류 사람들

오늘 본문에 열두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저들은 저마다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업, 출신 지역, 개인적 성격, 나이 등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시절 모두가 다 비주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열두 사람 대부분이 갈릴리 지역 출신입니다. 그리고 지금 열두 사람 모두 갈릴리 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갈릴리는 말 뜻 그대로 ‘변방’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역에 살고 있던 주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지역입니다. 이방의 갈릴리라고 천대 받고, 갈릴리 지역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조롱 받던 지역입니다.

게다가 이 열두 사람들의 직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어부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세리요, 또 다른 사람들 역시 변변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비주류 사람들을 부르셨고 저들을 훈련시키셔서 보내신 것일까요? 기왕이면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 좋은 집안 출신 사람들, 좋은 스펙을 통해 검증된 사람들을 택하시지 않은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삼상 1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는 기준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는 기준이 다릅니다.

천국에 멋진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피아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셨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피아노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는 S대 피아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저는 미국 줄리어드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습니다.” “저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희 세 사람이 이 피아노를 들어서 저 위 층으로 올려다오”

웃자고 만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모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겉모습, 스펙, 배경 등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십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사람들의 ‘중심’입니다. 그 사람 속 깊은 곳에 담겨져 있는 그 사람의 사람됨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관심 있게 보신 이 열두 사람의 중심은 무엇이었을까요? 마 4:18 이하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열두 사도들 가운데 앞의 네 사람을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 형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저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다른 형제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저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지금 이 네 사람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네 사람은 어떻게 처음 본 사람,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던 일을 내버려두고, 배와 그물 그리고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내버려두고 어떻게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요?

한 마디로 미스터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대로 믿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거명된 열두 사람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비주류입니다. 외모로 볼 때 뭐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것이 없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는 남다른 것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중심이 달랐던 것입니다. 바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순수한 마음 그리고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세우시고 또 이런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외모는 그럴듯해 보이는데 중심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마음속이 복잡합니다. 많이 배운 것 때문에, 이것저것 얽힌 것이 많기 때문에 생각이 많습니다. 너무 따지고 계산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제대로 듣기가 힘이 듭니다. 더더욱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를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심을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으면 있는 그대로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더우드는 우리나라에 복음의 문을 연 선교사입니다. 원래 그는 인도에 선교하기로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가도록 권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은둔의 나라이고 선교하러 가기를 모두가 꺼려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왜 못가느냐?” 언더우드는 그 음성에 굴복합니다. 그리고 인도로 가려고 하던 계획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고,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보내고 싶어 하십니다. 언더우드처럼 “너는 왜 못가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더우드처럼 순종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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