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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맹’ 탈출 서두르는 평양
북한/ 컴퓨터·IT산업 관련 붐 급격히 고조
2003년 06월 04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컴퓨터산업 90년 태동
국갇연구기관 속속 설립 
 
주민은 게임하는 수준
인터넷은 엄격히 통제


“스캬냐로 빨았소.”
언뜻 단번에 알아듣기 힘든 이 말은 얼마 전 평양의 한 공업대학을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한 교수에게 던진 말이다. 이 교수의 설명을 듣던 김 위원장이 ‘스캐너로 영상정보를 입력시켰냐’는 취지로 물었다는 얘기다. 이 소식을 전한 북한의 한 신문은 김정일 위원장이 컴퓨터 부문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선전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2001년 중국방문 때도 베이징(北京)의 컴퓨터 생산업체인 롄샹을 찾아 컴퓨터 제작 공정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평양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이 같은 IT(정보기술)붐을 반영하는 듯 북한에서 발간되는 각종 신문과 잡지는 물론 방송에서도 컴퓨터 관련 상식과 기술을 소개하는 코너가 부쩍 늘고 있다. 이젠 ‘말티 메디아’(멀티미디어), ‘마킹톳슈’(매킨토시)같은 용어들도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북한의 화보에는 컴퓨터를 이용해 실습을 하는 중학교(우리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모습이나 전문기관의 연구원들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한동안 디스켓을 ‘자기원판’ 이라고 바꿔 부르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이젠 달라졌다고 한다. 첨단 기술의 도입을 강조하면서부터는 외국의 과학기술 용어를 그대로 적용하는 풍조가 정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에는 컴퓨터 관련 붐이 급격히 고조되고 있다. 전국 규모의 소프트웨어 경진대회가 열릴 때마다 수 백 점의 응모작품이 전시돼 성황을 이루기도 한다. 또 학교와 직장에서는 컴퓨터와 IT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는 미국·일본·중국 등과의 교류 확대나 개혁·개방 움직임에 힘입은바 크다. 특히 지난해 7월 1일 새로운 경제관리 개선조치가 실시되면서 실리위주의 경제마인드 확산과 과학기술의 과감한 도입이 강조되면서 더욱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북한에도 컴퓨터 관련 분야의 발전을 위한 국가주도의 연구기관이 속속 설립되고 각종 소프트웨어가 개발에 들어갔다. 재일 조총련과 중국, 유엔 산하기구인 유엔개발계획(UNDP) 등의 지원이 여기에 큰 기여를 했다. 북한 컴퓨터 산업의 태동은 지난 1990년 10월 평양에 조선컴퓨터센터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컴퓨터 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이곳이 문을 열면서 컴퓨터 요원 양성센터와 평양프로그램센터 등이 잇달아 등장했다.

그렇지만 일반 주민들에게 컴퓨터가 친숙한 존재로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전자오락이다. 평양시내 보통강 구역에 자리한 평양체육관에는 무려 600여 대의 전자오락 기기를 갖춘 초대형 전자오락실이 등장했다는 게 북한 언론의 보도다. 김정일 위원장의 이른바 ‘통 큰 정캄를 과시하고 북한 청소년들에게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조치라는 게 우리 정부 당국의 분석이지만 아무튼 하루 5천여 명의 청소년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그 열기를 짐작하고 남는다. 이런 분위기는 각급 학교의 교과목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한편 어른들에게 컴퓨터가 다가서게 된 것은 최근 북한에 밀어닥친 노래방 문화라고 한다. 북한에는 최근 ‘화면반주 음악실’이란 일종의 노래방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곳이 주민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노래 반주기에 대한 관심이 컴퓨터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웬만한 주민들은 이제 일본에서 수입된 이 노래방 시설이 곡목선택에서 영상·음악 등이 모두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처럼 다소 엉뚱하게 불붙기 시작한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 점차 자연스럽게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

북한에서 컴퓨터의 역사가 본격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 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는 8비트급 시제품인 ‘봉화 4-1’이라는 제품을 조립 생산했다. 그러나 시험단계의 북한 컴퓨터 산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정체상태를 면치 못했다. 물론 이에 앞서 지난 60년대 말 조직된 ‘전자계산기 조직집단’ 이란 모태가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 전문가 연구집단이 북한 컴퓨터 산업의 시원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이처럼 초기 단계의 사업착수는 남한에 비해 다소 빨랐지만 하드웨어의 양산에 실패했다. 하드웨어의 양산에 실패하고 급변하는 국제 컴퓨터 기술의 발전추세에 부응하지 못한 한계도 따랐다. 이 결과 오늘날의 북한 IT산업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특히 하드웨어 생산은 거의 불가능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실정에 자극 받은 듯 북한은 ‘2000년대 과학기술전망 목표’에서 32비트 퍼스널 컴퓨터의 양산과 64비트 컴퓨터의 자체개발을 설정했다. IT부문에 대한 투자나 개발 없이는 다가오는 정보화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드웨어의 열세에 비해 소프트웨어 분야는 상대적으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 컴퓨터 전문인력 양성에 큰 힘을 쏟고 있다. IT분야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해외 연수프로그램에 젊은 인재들을 대거 내보내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엄청난 생산설비 투자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컴퓨터 기기의 생산과는 달리 인력양성을 통한 소프트웨어 개발은 상대적으로 그리 많은 자본이나 투자시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이 개발해 사용하고 있는 각종 프로그램에는 체제의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문서편집용 프로그램인 ‘창덕’은 이름 자체가 94년 사망한 김일성이 어린 시절 다닌 소학교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또 이 프로그램은 물론 다른 문서편집 소프트웨어는 김일성과 김정일 이름을 단축키로 따로 입력해 놓아 일일이 이름을 치지 않고도 한 번에 입력이 가능토록 했다. 단축키의 Ctrl키와 I를 누르면 ‘김일성’이란 글자가, J를 누르면 ‘김정일’ 글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각종 산업용 프로그램 등에는 초기 화면에 ‘당(노동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던가 ‘생산도 학습도 주체의 요구대로’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나타난다.

북한의 컴퓨터·IT분야 발전에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인터넷과의 자유로운 접속 문제다. 폐쇄적인 체제의 특성상 아직 인터넷의 사용은 일반인들은 물론 웬만한 전문가 그룹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북한의 과학연구 사업을 총괄하는 기관인 국가과학기술원 등은 해외의 최신 과학기술 정보를 신속하게 입수하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지만 당국의 엄격한 통제 속에 이뤄지고 있다. 인터넷은 현재 정보기관이나 대남기관에서 특수한 목적에 한해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게 우리 정부 당국의 판단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에도 컴퓨터 바이러스와 관련한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최근 “컴퓨터 바이러스 감염사건은 경제활동에 큰 혼란을 조성하게 된다”고 우려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북한의 컴퓨터 바이러스는 인터넷 등 통신망을 통하기보다는 해외 프로그램의 수입과정에서 유입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체적인 프로그램 개발에 한계를 느끼자 중국·일본 등 이웃 국가들로부터 은밀하게 불법 복제 프로그램을 들여가 사용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북한의 컴퓨터·IT실태와 관련해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통일 이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다. 우선 남북간의 인터넷 이용이나 IT산업에 대한 수준격차가 커지면 남북 통합에 적지 않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초고속 통신망과 펜티엄 컴퓨터,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멀티미디어 응용 프로그램과 북한의 정보화 실태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또 남북간의 자판이 서로 다른 문제 등도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의 컴퓨터·IT부문에 대한 낙후성은 강 건너 불처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제기된다. 지난해 국내 한 대학의 IT관련 교수들이 북한의 대학 강단에서 시험적이나마 강의를 한 것은 좋은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컴퓨터와 IT부분에서도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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