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잡이 길거리 모집 연체자 대량생산
카드사들 적자 자초… 금융대란 불씨로 
관치금융으로 땜질식 위기관리 정부도 문제

며칠 전 금융감독위원회 최고위직을 지냈던 인사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송년회를 겸한 모처럼만의 만남이었다.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신용카드사 문제가 자연스럽게 화두가 됐다. 그는 재임 시절 카드사들의 무분별한 행태를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카드사들의 로비와 여기에 넘어간 정치권, 안이한 정부가 오늘의 카드대란의 원인이 됐다고 통탄했다.

“카드사 문제가 심각한데 나는 일찍부터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다. 내가 2000년 8월 금감위에 부임해서 가장 먼저 손을 댄 게 카드사들이다. 차를 타고 가는데 길거리에서 카드사들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마구잡이로 카드를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큰일 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곧바로 규제 방안을 만들도록 했다. 밤 늦게 카드 빚 독촉을 못하게 하고, 길거리 발급도 제한했다. 그랬더니 카드사들이 난리를 피웠다. 카드사들이 똘똘 뭉쳐 정치권과 정부 실세에 로비를 하고 다녔다. 또 어떤 카드사는 외국인 대주주가 내 방에 두 번이나 찾아와 항의를 하더라. 카드사들에 대해 법으로 규제하려는 것은 이들의 강력한 로비에 부닥쳐 실패하고 말았다. 허탈했지만 속으로 ‘너희들 어떻게 되는지 두고보자’ 했는데 결국 이 꼴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딱 한 곳은 내 말을 듣고 내실경영을 했다. 그 회사 임원들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고맙다고 한다.”

이에 앞서 자산관리공사의 고위 인사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는 자산관리공사가 카드사들의 채권을 인수해 카드 빚을 탕감해 줄 것이란 보도가 있고 난 직후였다. 그는 어이없는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우리 회사 홍보담당자가 기자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카드사들의 부실채권을 인수할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담당자는 이자와 원금 일부를 탕감해주더라도 이익이 남는 장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카드사들의 연체비율이 높기 때문에 우리가 연체율을 줄이면 이익을 낸다는 계산이다. 다음날 이러한 내용이 보도됐다. 그런데 이후 자산관리공사 전화가 완전히 먹통이 됐다. ‘정부가 카드 빚을 탕감해준다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 사람부터 ‘빨리 내 카드 빚을 자산관리공사가 가져가라’고 독촉하는 사람까지 전화가 폭주한 것이다. 이런 사태를 보고 속으로 신용을 근본으로 한 카드가 신용사회를 짖밟는 흉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우리나라 신용카드사들의 방만하고 무분별한 경영 행태를 꼬집으며 미국의 예를 들었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대학에 연수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학생들에게는 카드발급이 허용되지 않았다. 학생뿐 아니라 신용조사를 해서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는 카드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루는 게시판에 시티뱅크에서 안내문을 붙인 걸 봤다. 내용은 60달러를 내면 학생들에게도 카드를 발급해주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60달러 중 45달러는 신용 불량에 대비한 보험료고, 15달러는 가입금이었다. 따라서 카드를 발급받은 학생이 신용불량자가 되더라도 보험사에서 이를 갚기 때문에 카드사들은 전혀 손해를 보지 않는다. 참으로 철저한 신용관리였다.”

신용카드사들의 부실 문제가 심각하다. 이들의 유동성 위기는 곧바로 금융 혼란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LG카드는 얼마 전 채권단으로부터 2조원을 수혈받기로 해 급한 불은 껐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3천200억 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 직전까지 갔다가 채권단의 지원으로 한숨을 돌렸다.

LG카드뿐 아니다. 전 카드사들이 폭증하는 적자로 휘청거리고 있다. 올 9월까지 8개 카드사들의 적자 규모는 3조7천억 원에 달했다. 카드사들이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 카드채만 수십조 원에 달한다. 이들이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거나 중도 환매 사태가 벌어지면 연말에 우리는 또 한번의 금융대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카드사들의 실질 연체율이 30%에 달해 조만간 경영이 개선될 여지도 없다는 게 문제다. 100원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는 커녕 원금에서 30원을 손해본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황금알을 낳는다던 카드사들이 부실덩어리로 변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게 카드사들의 책임이다. 카드사들은 외환 위기 이후 경기가 좀 나아지자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회원수를 늘이기 위해 80대 노인과 노숙자, 실업자들에게까지 카드를 발급해줬다. 제대로 신용조사도 하지 않고 수천만 원의 카드대출을 해주기도 했다.

정부도 할 말이 없다. 정부는 지난 4월 3일 카드사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자 은행과 투신사들을 독려해 겨우 위기를 수습했다. 그러나 몇 개월도 안 돼 약발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번에 LG카드가 위기를 맞자 정부가 다시 나서 지원을 해줬지만 언제 다시 부도의 불씨가 살아날지 아슬아슬한 국면이다. 이는 유동성 위기를 일시적으로 막아주는 관치금융으로는 근본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정부는 시장에 충격이 가더라도 시장 원리에 따라 해결되도록 하고, 자율 구조조정이 되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내놨어야 한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번 카드대란이 신용사회의 근본을 흔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은 신용이다. 모든 거래는 신용이 있어야 성립된다. 카드는 신용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첨단 상품이다. 그래서 이름도 ‘신용카드’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사람들에게 ‘혹시 카드 빚은 안 갚아도 되는 것 아닌갗하는 의심을 심어줬다.

 LG카드는 국민경제를 담보로 신용 질서를 무너뜨렸다. 채권단이 대주주의 연대보증을 요구하자 현금서비스 중단으로 맞선 것이다. 정부가 설마 우리를 망하게야 하겠느냐는 식의 배짱이다. 신용카드사 스스로 현금서비스를 중단한(또는 방치한) 데 대한 결과는 시장의 냉혹한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360만 명의 신용불량자는 도대체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신용카드사들은 답해야 한다. 신용사회를 짓밟는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것은 카드사 자신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