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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분석⑦ ] 이종윤 목사(서울교회 원로)의 표절을 밝힌다
이종윤과 보이스의 책 <빌립보서 강해> 본문 비교
2016년 08월 02일 (화) 12:01:21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최삼경 목사 / <교회와신앙> 상임이사

이종윤 목사님의 표절 시비에 대한 옹호 논리도 반대 논리도 다양하다.

필자가 이종윤 목사님의 표절 문제를 취급하면서, 필자를 옹호하는 자들의 옹호 논리도 여러 가지이고, 필자에게 자제 내지 중단을 주문하는 분들의 논리도 다양하다. 이와는 반대로 이종윤 목사님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옹호 논리도 다양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다 일리가 있어 보였다.

1. 이 목사님 표절로 비쳐진 한국교회의 모습이 가슴 아프다.

필자가 이종윤 목사님의 표절 문제를 분석하면서 이를 즐기려는 못된 마음도 있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그냥 하는 빈 말이 아님을 당사자인 이종윤 목사님과 또한 이 목사님을 옹호하시는 서울교회 교인들과 그리고 독자들까지 알아준다면 고맙겠다. 개인적으로 선배인 이 목사님에 대한 죄송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것이 한국교회 윤리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되어 마음이 아픈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숱한 문제꺼리를 들여다보게 하는 또 다른 단면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외치지만,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란 사실은 모르거나, 알고도 숨긴 채로 개혁을 말하여 개혁자로 자처하고, 회개를 하지만 진정 뉘우치고 고치기 위해서라기보다 죄의 책임을 피해가기 위한 수단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우리의 피는 몸 어디에서 뽑더라도 그 성분이 말해주는 결과는 같은 것처럼. 문제 한 가지만 보아도 한국교회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목사, 장로, 신학교, 연합기관, 언론, 정치, 선교, 이단, 돈, 이성 문제 그리고 분열 등이 보여주는 한국교회의 문제의 수준은 거의 같아 보인다. ‘표절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느 교회에서 낮에 담임목사가 한 설교와 저녁에 오신 강사가 한 설교가 대지와 예화, 핵심 문장(Topic sentence) 등이 똑 같아 교회가 큰 시험에 빠졌다고 한다. 두 분이 다 표절하여 설교를 한 것이다.

대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 시내 모 교회에서 학생들이 지도목사의 설교가 인터넷에 떠있는 설교와 똑 같은 점을 우연히 발견하자, 그때부터 주일이면 학생들은 설교를 들으려 하기보다 모바일 폰으로 “이번에는 어디에서 표절하여 설교를 할까”를 생각하며 검색하는 것이 일이 되었다고 한다.

이종윤 목사님의 표절 문제는 그가 서울교회 목회를 할 때도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에야 공론화되었다고 본다. 이 목사님의 학문성, 영성, 지성은 어쩌면 보이스 목사로부터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옹호자의 글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그렇게 많은 설교를 표절에 의하여 하였고, 거기에다 20권이 넘는 책을 출판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런 결과라고 본다. 만일 이 목사님에게 어떤 창의성이 있다면, 그것도 표절로부터 온 창의성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이것이 신학생이나 목회 초년의 목사에게서 온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하며 동정해 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종윤 목사님은 그렇게 동정을 받을 수 없는 위치란 점에서 다르다.

한 교수님은 필자에게 “이종윤 목사님의 사건을 통하여,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설교 표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제부터 성숙한 강단을 만들고, 더 나아가 과거에 한 표절에 대하여 철저히 회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는데, 같은 마음으로 일곱 번째 글을 쓴다.

이 목사님은 자신의 표절을 밝히고 반대하는 서울교회 교인들에 대하여 배신감에 사로잡혔다고 들었는데,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것이 후임자에 대한 섭섭함과 미움으로 표출될 수도 있고, 필자와 같은 폭로자에게도 같은 심경일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 반대로도 생각해 봐야 성숙한 자세라고 본다. 순수한 교인들이 이 목사님에게서 느끼는 배신감도 생각해야 한다. 이종윤 목사 이름으로 출판된 <빌립보서 강해>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되 특별히 성도들의 영혼을 책임진 교회의 교역자님들을 위한 기도와 하나님의 사역을 직접 위임 맡아 일하는 이들을 위하여 날마다 쉬임 없이 기도해야 하는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가 은혜에 충만하고 말씀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길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잘 깨달아서 이 일을 부단히 시행해야 될 것입니다.”(289쪽) 이 말에 순종하여 그렇게 기도하고 존경하는 목사님인데, 표절 설교로 자신들을 먹였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 그들이 느낀 배신감은 이 목사님이 느꼈던 배신감보다 더 컸을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목사의 한 옹호자인 H 씨는 필자가 이종윤 목사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H 씨는 필자가 이 목사님의 표절을 지적한 것 자체가 죄이기에 빌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 목사님이 표절을 하지 않았는데 표절했다고 했으니 사죄하라는 미련한 주장을 했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필자는 이 목사님에게 사죄할 필요는 없게 됐다. 혹시 필자가 이종윤 목사님의 표절을 밝히는 것이 죄가 된다면, 그것은 필자가 회개해야 할 죄다. 그러나 표절한 죄는 이종윤 목사님께서 회개해야 할 죄다. 이 점을 잊지 않기 바란다.

2. 이종윤 목사님을 공개적으로 옹호한 K 목사와 H 씨를 지켜본다.

‘이종윤 목사님은 표절하지 않았다.’ ‘표절을 했어도 비난 받을 정도는 아니다’ ‘필자(최삼경)는 이종윤 목사님에게 엎드려 사죄해야 한다’라는 등의 엉터리 논리로 이종윤 목사님을 공개적으로 옹호한 사람들 둘이 있는데, 하나는 K 목사이고, 하나는 H 씨다.

전자는 교수이고, 후자는 언론인 내지는 본 교단으로부터 ‘상습적 옹호언론을 운영하는 자’이며 ‘상습적 이단옹호자’로 규정되었고, 목사직도 잃어 지금은 목사도 아니다. 그는 또 전직 목사라는 직함이 무색할 정도의 전과자로, ‘지하철 성추행’과 ‘절도미수’ 같은 전과까지 있는 자이다.

이 두 사람이 필자가 쓴 앞의 6번째 글과 이 7번째 글을 보고도 또 전과 같은 엉터리 옹호를 할 용기와 논리가 있는지 지켜보겠다. 펜이 있어 무슨 글을 쓰고, 입이 있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진실과 정직이 있다면, 이제라도 필자를 공격했던 것을 사과하고 필자가 아닌 이종윤 목사님께 사과와 회개를 촉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할지 지켜보겠다.

그러나 H 씨에게서는 아예 그런 정직 자체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필자가 검다고 하면 희다고 하고, 필자가 희다고 하면 검다고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K 목사는 다르다. 그는 교수다. 교수로서 가져야 할 논리적, 윤리적 균형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제라도 바른 자세를 취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계속 지켜보되, 그들이 어떤 형태의 변론을 다시 시도한다면 필자도 즉시 인내를 접고 하나씩 조목조목 반격할 것이다. 이렇게 지혜롭지 못한 옹호자가 없었다면 필자가 이렇게 이 목사님의 표절을 밝히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3. 필자가 살펴본 결과 이종윤 목사님이 표절한 책들과 표절 설교로 서울교회에서 설교한 기간과 횟수는 다음과 같다.

이종윤 목사님의 표절은 책에서 책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한 서적에 있는 보이스 목사의 주장이나 경험을 다른 곳에서 그대로 자기 것으로 가져다 쓴 것이 종종 나타난다. 그것은 표절하는 분들이 떨칠 수 없는 함정이다.

그러나 서적에서 서적으로 표절한 것만 조사해 본 결과, 총 21권이었다. 로마서 4권, 마태복음 2권, 시편 3권, 창세기 2권, 크리스천 지도자들 1권, 제자의 길 1권, 소선지서 1권(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빌립보서 1권, 예수의 비유 1권, 에베소서 1권, 요한복음 4권이다. 혹시 필자가 파악하지 못한 표절 서적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위의 책들을 통하여 표절 설교를 얼마나 했는지 조사해 보았다. 할렐루야교회에서 한 표절 설교와 충현교회에서 한 표절 설교나 기타의 곳에서 한 표절 설교의 자료는 현재로는 찾을 방법이 없어, 얼마나 표절 설교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충현교회에서부터, 아니 그 전부터 표절 설교는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입으로 한 이 목사님의 표절 설교는 서울교회 홈피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서울교회 홈피를 통하여 나타나는 표절 설교의 기간과 횟수를 보니 다음과 같다. 무슨 이유인지 설교를 폐쇄하기도 하고 또 내리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 표절을 은폐하기 위하여 내린다면 다 내려야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대로 두고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와 회개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미 어떤 사람들은 이런 때가 올 것을 알고 다 캡처해 둘 정도로는 지혜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조사해 본 결과는 이렇다. 마태복음의 경우, 2004년 10월부터 2009년 8월까지. 4년 10개월 동안 172회를 하였다. 시편의 경우, 2005년 4월부터 2010년 6월까지, 5년 2개월 동안 166회나 했다. 로마서의 경우, 1998년 6월 28일부터 2003년 3월 30일까지 4년 9개월 동안 무려 182회를 하였고, 2009년 8월 23일부터 2010년 12월 12일까지 1년 4개월 동안 전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다시 하다가 다 끝내지 못하고 은퇴하셨다고 들었다.

이 목사님은 그것들을 저자 ‘이종윤’이란 이름으로 버젓이 출판까지 하였다. 모든 책 서문을 보면 이 목사님은 자신이 저자인 것처럼 했다. 역자라거나, 번역자라거나 편집자란 말은 한 마디도 없다. 누가 보든지 그 책의 저자는 이 목사님이다. 이 일이 무려 40여 년간 계속되었다.

이종윤 목사님은 서울교회에서 20년이 채 안되게 목회를 하셨는데도(1991. 11. 24. - 2010. 12. 31.) 원로목사가 되셨다. 그런데 그 목회기간의 약 절반이 넘는 10-15여년 정도 표절 설교를 하며 목회를 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별 노력도 없이(?)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볼 때 얼마나 쉬운 설교 아니 쉬운 목회를 했을까 생각된다. 목사에게 설교처럼 무거운 짐은 없다. 설교의 짐 하나만 덜 수 있다면 목회는 가벼워진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표절 설교로 큰 교회를 이루었고, 또 명예까지 얻으셨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이 될까?

필자는 찰스 스펄전을 훌륭한 설교가로 보고 좋아한다. 그 분의 설교 한 편을 읽고, 필자 말을 잘 섞어 넣기만 하면 2-3편 설교를 만드는 것은 여반장이다. 꼭 설교를 그대로 하지는 않더라도 동기부여와 방향과 그 줄거리와 핵심 문장 몇 개만 주어져도 설교는 쉬어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목사님은 얼마나 쉬운 목회를 했는가를 생각하는 동시에 또한 그것이 얼마나 큰 악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 교수의 경우, ‘창세기, 에베소서, 빌립보서의 내용을 직접 대조하며 검토하였으나 심각한 문제를 찾아낼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필자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래서 본 7번째의 글에서는 표절이 별로 없다는 빌립보서의 표절을 취급하려고 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후에 다른 책들의 표절을 계속해서 소개해 갈 것이다.

4. 이 목사님의 첫 표절은 빌립보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종윤 목사님의 첫 번째 표절 설교집은 <빌립보서 강해>라고 할 수 있다. 서울교회에서 출판한 <빌립보서 강해>를 보면(필그림 출판사) 1977년 4월 2일에 초판을 발행하고, 2002년 3월 20일에 4쇄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판을 발행한 후에 이 목사님께서 충현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는데(1988-1991) 이 때 발행한 <빌립보서 강해>에서는 이미 13년 전에 발행한 초판을 감추고, 1990년 5월 30일에 초판발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후 서울교회에서(1991년 개척 그리고 위임) <빌립보서 강해>를 발행할 때는 초판 발행을 소급하여 1977년을 초판 발행이라고 하였다는 점이다. 의아스럽지만 이유를 모르겠고, 여기에서도 정직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 서울교회에서 출판한 이종윤 목사의 <빌립보서 강해> - 1977년 4월 2일 초판발행(2002년 4쇄)
   
▲ 충현교회에서 출판한 이종윤 목사의 <빌립고서 강해> - 1990년 5월 30일 초판발행

좀 분석해보겠다. 빌립보서 초판을 발행한 1977년은 이 목사님이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의 교수로 있을 때(1976-1984)이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1980년 11월에 최순영 장로와 함께 할렐루야교회 창립을 하였다. 그리고 그 후 충현교회를 담임했다가 서울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렇게 보면 이 목사님의 보이스 목사 표절은 아세아 연합신학교 교수 시절에도, 할렐루야교회에서도, 충현교회에서도, 서울교회에서도 이어진 셈이다. 참으로 놀랍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나온 표절을 밝혀보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든지 이 목사님을 옹호하려는 자는 ‘빌립보서의 표절은 심각한 것이 없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형편없는 옹호인가를 보여주면서 아울러 얼마나 심각한 표절인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5. 이종윤 목사님의 <빌립보서 강해>와 보이스 목사 책의 표절 대조표

앞의 글에서처럼 먼저 이종윤 목사의 표절 설교를 왼쪽에, 그리고 원본인 보이스 목사의 설교를 오른쪽에 대조하여 얼마나 표절이 심했는가를 비교하여 보게 하겠다.

빌립보서 강해 / 이종윤 목사 지음
1977년 4월 2일 초판 발행

빌립보서 / 보이스 지음 - 지** 옮김
원서;1971년 발행, 번역판 1988년 초판 발행

제1강 사도의 문안 (그리스도 예수의 종) (p.12)

예수그리스도의 종 (p.28)

당시에 노예로 떨어지는 신분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BC413년경에 희랍이 시라큐스에 패하므로 많은 시실리언들이 노예로 잡혀가게 됐습니다. 패전한 패잔병들이 노예가 됐던 것입니다. 또 당시에는 날 때부터 노예가 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노예이거나 어머니가 노예일 경우 나면서부터 노예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부류가 있는데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채무를 감당하지 못할 때에 노예로 팔려가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50년마다 희년이라고 하는 제도를 두어서 50년이 되면 노예를 놓아주는 상례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레 25장). 고대사회에서 육신적인 노예가 있었듯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아테네의 시실리 침공에 참여하였던 많은 이들이 BC413년 시라큐스에서 그리스가 참패하였을 때, 시실리 사람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출생에 의하여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자동적으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셋째로 빚 때문에 노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가난한 많은 이들이 빚을 갚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들을 노예로 팔아버렸고,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그들 자신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어서 유대 민족은 이 관습을 억제시키기 위한 법을 만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즉 오십년마다 다시 말해 50년절이 돌아오는 해가 되면 빚 때문에 노예가 되었던 이들이 자동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법은 레위기 25장에 똑똑히 설명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성경이 모든 인간은 옛날 사람이 육체적 노예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감독과 집사 (p.18)

감독들과 집사들 (p.34)

AD65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본 서에 집사제도 장로제도 감독제도가 있는 것을 보니 이것은 후기의 작품이 아니냐는 논쟁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집사, 장로제도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바울이 죽은 다음에 바울의 제자들이 교회의 제도를 만든 다음에 기록한 책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비평주의 학자들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잘못된 가설입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발견된 AD70년 이전에 기록되기 시작한 사해 사본을 보면 이미 감독제도와 집사제도가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비판적으로 그 쓰여진 시기를 잡아도 AD65년 이전 아마도 AD60년이나 61년으로 귀착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감독이라는 직분은 사해(死海) 사본들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 사본들은 모두 AD70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들 중 많은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제2강 위대한 교제 (복음에서의 교제 ) (p.26)

큰 교제 (복음 안에서의 교제) (p.49)

가) 복음에서의 교제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1:5)
바울은 교제로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교제’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데 요즘에는 잘못된 내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교제’라고 하는 말의 뜻은 대개 ‘동무됨’으로 통합니다. ‘동무’(comradeship)는 이북에서 쓰는 말 같지만 참 좋은 말입니다. 동무, 또는 좋은 시간을 나누는 친구, 그 사람과 나누는 시간을 교제라고 합니다.
교제는 도적이 도적질 한 것을 나누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제라는 것은 기쁨을 나눈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하여 가장 감사드리고 있는 것은 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1:5) 복음에서 그와 교제를 나누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교제라는 것은 너무도 모호한 말이 되어서 그것은 이 단어가 이전에 의미하였던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제라고 말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동지애(comradeship), 또는 좋은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교제는 본래 이 의미 훨씬 이상의 의미를 지닌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은행 강도가 그들의 탈취물을 나눌 때의 교제와 같이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에서 함께 나누는 것, 사람들이 몰두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무엇인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 (p.27)

복음 안에서의 교제 (pp.50-51)

우리는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어떤 모임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빌립보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방인들이 모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나타난 이름을 보니 모두가 다 이방인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갇혔던 감옥의 옥사장, 귀신에 잡혔다가 구원받은 노예 소녀, 아시아에서 온 자주장사, 유대인 가운데 개종자, 기타 인물들로 이 교회가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적 표준으로 보면 빈부의 차이가 심하고 지식의 차이가 심하고 사회적 계급의 차이가 심하여 이들이 하나될 만한 가능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이 교제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복음 안에서 교제를 나누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과 관련된 이름들이 모두 이방인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것이 주로 이방인의 교회였다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우리는 그 교회가, 바울이 말리지 않았다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살하려 하였던 난폭한 간수와 악령으로부터 풀려난 노예 소녀와 아시아에서 자줏빛 옷감을 가져와 장사하였으며 또 유대인으로서 개종한 자였던 사업가 여인 그리고 그밖에 여러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세상적 표준으로 보면 이들을 함께 결합시킬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교제 (pp.28-29)

그의 고난에 참여함 (pp.51-52)

나) 성령의 교제
「성령의 무슨 교제나」 (2:1)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빌립보 2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교제가 나와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교제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성령의 교제가 무엇입니까? 복음의 교제는 복음 안에 상호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 상호 참여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교제는 나의 성령과 너의 성령이 교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가 대기층에 주소를 삼습니다. 물고기는 바닷속을 살 곳으로 삼습니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같은 마음과 같은 사랑과 한 뜻을 갖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에 참여함)
이 편지의 다른 두 곳에서도 바울은 교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2장 1절에서는 그는 “성령의 교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음의 교제가 복음 안에서의 상호간의 참여를 의미한다면, 성령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의 상호간의 교제를 의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들 사이의 교제 즉 여러분의 영과 나의 영 사이의 교제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새들이 공중에 그들의 집을 짓고 또 물고기가 바다에 집을 짓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처소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성령에 참여하기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pp.33-34)

하나님과의 교제 (p.54)

라) 하나님과의 교제
바울은 본 서에서 이 교제라는 말을 3차례 나타내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한다. 성령 안에서 교제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한다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의 교제이니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나눔입니다. 하나님과의 참여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성령의 교제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성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교제에 들어가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온유한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서 교제라는 단어를 세 번 언급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의 우리의 교제와, 성령과의 교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교제를 말해줍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완전하신 본성 즉 아버지, 아들, 성령에 참여하는 특권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이미 복음에 참예한 것입니다. 그 교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회심함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성령과의 교제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자라가는 그 어떤 것입니다.

 

제6강 크리스챤 문제아 (p.69)

문제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인 (p.100)

고린도전서 1장 1-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근거를 가지고 우리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진 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성도라고 불렀습니다(고전 1:2).
둘째,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성도라고 불렀습니다(고전 1:4).
셋째, 모든 지식과 말에 풍족한 자이기 때문에 성도라 불렀습니다(고전 1:5).

고린도전서의 맨 처음 아홉 구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2절) 사람들이었으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한”(5절) 자들이었습니다.


 

 

제7강 낙심을 모르는 자 (p.79)

낙심하지 말라(p.110)

인간의 삶 속에는 크고 작은 실망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고 또 바깥에서부터 오는 일들로 인하여 실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이 실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원하는 것이 손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실망을 합니다. 소년과 소녀들은 친구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원하는 친구와 사귐의 관계를 갖지 못할 때에 또는 배신을 당했을 때에 실망을 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업가도 가끔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마지막 단계에서 한없이 실망과 낙담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다가 실망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실망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낙심할만한 일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체험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굉장히 원하던 어떤 것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 어린아이처럼 낙심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피하거나 자기를 잊어버릴 때에 낙심하게 됩니다. 사업을 성공시키려고 애를 쓰는 사업가들도 종종 낙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가운데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정상에 도달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 때문에 낙심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게 됩니다.
 

 
 

 

제8강 악으로부터의 영원한 자유 (pp.89-91)

악으로부터의 자유(pp.145-151)

(1) 악으로 부터의 영원한 자유
악이라고 하는 것은 죄악을 말합니다. 고통을 의미합니다. 근심을 말하는 것이고 질병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죽게 되면 이런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2) 예수와 같이 되어진다
성도가 죽으면 예수와 같이 되어지는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 의하면 예수님과 같이 되어지는데 우리가 죽음을 면대하게 되면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되니 우리가 완전히 의로워집니다. 아직은 우리가 완전한 의인은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 주님 앞에 서게 되면 완전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어진다는 말은 지식에 있어서도 완전해 진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한 지식 밖에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고전 13:12).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희미할 수밖에 없고 내세에 대해서도 희미한 지식 밖에 가진 것이 없지만 우리가 죽게 되면 눈과 눈으로 보는 것처럼 손으로 만진 것보다 더 확실한 지식을 갖게 되고 예수님이 마치 그 지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우리가 온전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3) 천국이 주어진다.
새 예루살렘 영원한 천국이 죽은 자에게 주어집니다. 신랑 예수와 사는 최대의 유익을 천국에서 누리게 되니 신부가 신랑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국은 단순히 황금 보석으로 꾸민 집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천국을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도움이 되시고 나의 모든 힘이 되시니 그 하나님과 내가 동행을 하게 됩니다.
시편 116편 15절에 성도의 죽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사망으로 인한 첫 번째 유익은 사망이 악으로부터의 영원한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고통, 걱정,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합니다.

(2)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악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치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이 지상에서 시작된 신자들의 성화의 마지막 완성을 가져온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분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 안에서 그분을 닮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지금 의에 대해 잘 모르며 단지 그것을 조금 알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식에 있어 그분과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사물을 보게 되며, 우리의 지식(영적인 것에 대해서라도)은 언제나 오류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우리도 알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분과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

(3) 천상의 예루살렘의 실례는 신자들이 그들의 사망으로 인해 맞게 되는 세 번째의 유익을 미리 예견해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예가 성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을 하며 신랑과 신부가 결합하는 표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커다란 유익은 그가 예수와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시 116:15). 



 

 

제13강 지극히 높아지신 그리스도 (pp.137-138)

그리스도의 위대한 이름 (p.237)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마란 아타는 계시록 마지막 절에 있는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마란 아타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또 어떤 성경을 보면 “마란아 타” 다시 말해서 띄어쓰기를 잘못하였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학자들이 연구를 많이 해보아도 답이 구구합니다. 마란 아타가 맞는지 마란아 타가 맞는지 잘 알기가 어렵습니다.
마란 아타는 Our Lord comes, “우리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로 신앙고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마란아 타”로 읽게 되면 our Lord is here, 우리 주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그것은 고린도 전서의 끝 부분에 아람어로 되어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은 “마라나타”라고 합니다. 사실상 그 단어는 두 개의 아람어 단어인 “임하다” 와 “주” 라는 말을 혼합한 것이며, 두 가지로 사용되면서 각기 다른 의미를 띄우게 됩니다. 기도할 때 사람들은 “마란-아타”라고 읽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우리 주가 강림하신다”는 것이며, 다른 식으로 “마라나-타”라고 읽을 때는 “주께서 임하시느라”고 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제23강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전투 (pp.221-222)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 (pp.360-361)

2. 전투자의 자세
이제는 경기자의 수준이 아니고 전투자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투쟁을 해야 합니다. 환경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이 세상의 어두움의 권세와 전투를 해야 됩니다.




우리 성도가 가져야 할 무기는 진리와 의와 복음과 신앙과 구원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들보다 세상의 무기를 더 좋아하고 그것들을 사용해서 영전에서 이기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지혜, 자기만족, 물질, 성공 혹은 유명세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전투복은 못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전투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 큰 싸움 즉 하나님의 선을 위한 싸움에 우리가 정말로 참여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 영적인 싸움에 원기왕성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은 우리 자신 또는 우리가 처한 환경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방해하려고 애쓰는 이 세상의 영적인 세력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비울은 하나님의 무시들은 진리와 의와, 복음, 믿음,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너무도 흔히 세상의 갑주를 즉 지혜, 자기 확신, 재정적인 안전, 성공 그리고 인기를 선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투사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신 갑주가 아닙니다.

 

제24강 하나님의 뜻을 아는 비결 (pp.224-226)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 (p.368)

성도로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모든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는 중 나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 계획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의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많은 노력과 의지를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힘쓰고 노력을 하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장 17절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있는지 아니면 인간으로부터 오고 있는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자기 교훈이 거절되고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것을 행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될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 일을 행코자 함)
왜냐하면 성경은,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한다면, 여러분은 그 뜻이 무엇인지도 알기도 전에 먼저 기꺼이 그의 뜻을 행하려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17의 말씀이 분명히 이 점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말을 ‘그것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 교훈이 하나님께 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을 문자 그대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주로 그 뜻을 기꺼이 행하려 하는 태도에 있다는 더욱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제25강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pp.236-237)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함 (p.377)

사람의 몸가짐 특히 걸음걸이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심적 동향과 정신적 자세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것이 있거나 자신만만한 사람은 허리를 곧게 펴고 목을 곧게 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는가 하면 그 마음에 무언가 어두움이 있는 사람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허리를 숙인 채 절절 매면서 걸어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행동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가) 지혜로운 자의 걸음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엡 5:15)

나) 단정한 걸음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함이라” (살전 4:12)

다) 빛 속에의 걸음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여러분은 사람의 걸음걸이가 흔히 그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나타내 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꼿꼿한 자세로 머리는 높이 들고 걸을 것입니다. 비겁한 사람은 살금살금 걷거나 또는 점잔빼며 뽐내며 걷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모범적으로 걸으라는(행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라고 요청받고 있으며, 또 그들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야 하고 (엡 5:15), “단정히” 행하고(살전 4:12)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요일 1:7).







 

 

제30강 기도의 중요성 (pp.284-285)

기도의 의미 (pp.429-430)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인가? 기도는 사람을 새롭게도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도록 감동도 주시고 감화도 하시는 것인가? 우리에게 쉬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기도하라고 했는데 누가 기도할 수 있으며 어떻게 기도할 수 있으며 왜 성도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믿는 자만이 할 수 있지 하나님의 실존과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도를 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들으실 만한 기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살고 있는 이방 사람들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 또 가르쳐주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자, 그리스도인만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우리의 염려와 근심에 대한 모든 잘못된 것을 교정해 주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일을 변화시킵니까? 또는 기도가 사람들을 변화시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기도로 자신의 마음을 바꾸십니까? 혹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까?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기도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진정한 정의는 오직 믿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가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 사는 이교도나 혹은 이 세상에게 기도에 관한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한다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배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감화받은 부족을 느끼는 영혼이 하나님의 은총의 생명샘 속에 잠길 수 있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고 일상의 일들을 수행함에 있어 초자연적인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또한 기도는 그리스도인을 걱정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독제입니다.

제30강 기도의 중요성 (타인을 위한 기도) (p.288)

중보기도 (pp.433-434)

 3. 타인을 위한 기도
우리는 자기중심의 삶에서 타인을 기도에 포함시키기 시작하므로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부부간에 대화를 할 때 보면 언제나 자기 두 사람만의 문제에 맴돌지 않고 친지나 사랑하는 이웃에 대해서도 소식을 나누듯이 기도 속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의 기도도 포함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내가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므로 우리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새벽에, 하루를 마무리 지으면서, 순간순간 일을 진행하면서 기도를 하므로 매사를 하나님과 의논해야 합니다.
 

중보기도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중심은 우리들 자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께서 기도가 무엇인지 알려 한다면 기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대화가 아무리 친밀한 것이라 해도 그 대화의 중심 화제가 언제나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그들에 대한 관심을 서로 나누기도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1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를 감사를 하되.”
하루를 시작할 때, 혹은 마칠 때, 또는 하루 중 어느 순간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다른 이들을 위한 관심이 하나님과의 대화의 일부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제33강 은혜와 영광 (인간의 필요) (pp.317-318)

우리들의 필요 (p.463-466)

2. 인간의 필요
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로 용서입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풍성히 제공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는 주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면 하나님의 용서가 효험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자백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십니다.




2)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는 영적으로 배고픈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우리는 비참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3)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보다 훨씬 힘이 셉니다. 훨씬 꾀가 많습니다. 사탄과 열 번 싸우면 열 번 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왕이 하나님의 보호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2-3).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 뒤에 우리가 숨어야 합니다.

4) 훈련과 교훈과 시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는 유쾌하지 못한 훈련과 시험을 우리에게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하신 대로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용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실만큼 풍부한 용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한 용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적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

2)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리고 공허하며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또 적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까? 예, 때때로 우리는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2,3) 하나님께서는 또한 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실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단련 받고 가르침 받고 시험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빌 4:19 말씀을 우리에게 기쁘지만은 아니한 단련이나 시험을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라”

 

은혜와 영광 (성도의 교제) (pp.320-321, 마지막page)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pp.473-475)

마지막으로 바울은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하는 말로 빌립보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선물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본서는 시작이 되고 끝을 맺습니다. 바울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언급하고 특별히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을 40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성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다.

빌립보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관계에 예수의 이름이 언급되어지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이름은 40번이상이나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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