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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분석⑥ ] 이종윤 목사(서울교회 원로)의 표절을 밝힌다
이종윤과 보이스의 책 <로마서 1권> 본문 비교
2016년 07월 20일 (수) 17:18:59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최삼경 목사 / <교회와신앙> 상임이사

필자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종윤 목사님의 표절설교문을 보이스의 원문과 비교할 것이다. 아마 모든 책들을 다 비교하려면 몇 백회의 글을 연재해도 부족할 것이다. 문제의 표절서적들을 보면 온통 표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필자가 쓴 앞의 글들을 보신 분들은 목차보다는 구체적으로 책의 본문을 비교 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앞의 글만으로는, 특히 옹호자의 물타기의 영향 때문에, 표절의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계속해서 비교분석하는 쪽으로 힘을 쓰겠다. 열심히 타이프만 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역시 로마서부터 비교하겠다. 왜냐하면 로마서가 중요하고, 이 목사님은 서울교회에서 무려 4년 반이나 로마서 표절 설교를 하였다. 그것도 주일 낮 설교에 말이다. 주일 저녁 설교나 수요일 설교나 새벽설교에는 표절을 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주일 낮 설교보다 동정의 여지가 넓다고 본다. 목회자마다 틀림없이 주일 낮 설교를 가장 힘 써 준비하고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분은 주일 낮 설교 한 편을 위하여 20시간 이상 30시간까지 준비하는 분도 보았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4년 반에 걸쳐 주일 낮 설교에 표절 설교를 하였다. 가진 영어 실력으로 번역만 하면 되었다고 볼 때, 이렇게 쉬운 설교 준비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목사님은 보이스 목사의 탁월한 분석능력과 학문성과 경건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시며 목회를 하셨다. 추측하기로 서울교회 교인들은 진실을 알고 난 후에 그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문제를 삼았다고 본다.

<로마서 1권>의 이종윤 목사의 설교와 보이스 목사의 설교를 비교한다.

우선 책만 비교하겠다. 왜냐하면 테이프를 다 듣고 비교하는 것은 너무 힘든 작업이지만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은 책만 비교하여도 족하고, 책이 가장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종윤 목사님의 책 본문(로마서 I권, 1995년, pp.15~317)을 왼쪽에 그대로 소개하고, 오른 쪽에는 보이스 목사의 책 본문(Romans I, 1992년, pp.35~659)을 붙여서 서로 대조 비교하도록 하겠다. 표절의 정도와 심각성을 평신도가 보아도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필요하면 필자의 설명을 붙이려고 하였으나 붙일 필요도 없다. 아래 비교표를 보라.

이종윤 목사님의 설교 <로마서 I>

Boice 목사의 설교 <Romans I>

제1강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1:1) p.1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p.35

[1]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이라 부름으로 이 서신의 수신자도 자기와 같은 위치에 두려 한다.

[1] 바울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함으로써 편지를 받아 볼 사람들과 동일한 범주에 자신을 둔다.

로마서 3장에서 그는 복음의 핵심 단어인 ‘구속’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24절). 그것은 그 당시 시장에 가서 무엇을 사는 것을 말한다. 특별히 노예를 살 때 사용된 말이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는 말은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노예가 되는 순간 자유를 실제로 얻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종)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밝혔다.
 

바울이 3장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중요한 상황에 사용하게 될 “구속”(救贖)이란 단어이다. 당시에 이 단어는 시장에서 특히 노예를 사는 것을 뜻했다. 물론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좀 특별한 성격을 띤다. 노예가 되되 실제로는 자유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또는 노예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적절히 표현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렇게 쓸 수 있었다.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사도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 할 때 그 말 속에는 “나도 당신들처럼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산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나는 그의 것이고 그를 따르는 자”라는 뜻이 있다.
 

바울이 자기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을 때,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같이 나도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사신 사람이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제2강 하나님의 가장 크고 오래된 복음(1:1-2) pp.18-19

하나님의 위대하고 유서 깊은 복음 p.41

I. 좋은 소식 (2절)

위대하고 좋은 소식

1. euangelion은 좋은 소식이다. 복음의 선함을 감사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우리들 대부분은 복음(유앙겔리온; 헬라어)을 “좋은 소식”(Good News)이란 뜻으로 알고 있다.
 

2. 그들은 오히려 인생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하는 아주 나쁜 소식을 준다.

 

2. 복음이 좋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기독교를 제외한 세계의 종교들이 전혀 좋은 소식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시작해야 한다. 오히려 다른 종교들은 아주 나쁜 소식들이자 짐이다.

3. 그들은 자기들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 종교는 자력도움(self-help)이나 행위(works)종교이기 때문이다. 인간 노력으로 어떻게 신을 찾을 수 있는지, 행복과 평화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 과제가 인간 노력으로 해결이 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종교가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준다고 할 수 있을런지 모르나 그 같은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신은 너무 거룩하시고 우리 인간에게서 너무 멀리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가까이 할 수가 없다.

3. 이들이 가르치는 종교들은 추종자들에게 행복을 주는 종교들이 아니다. 그 이유는 찾기 어렵지 않다. 기독교 외에 세계의 다른 모든 종교들은 자력(自力) 또는 “행위” 종교들이다. 즉 인간의 노력으로 신(神, 또는 평화, 행복 따위)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그 일이 가능하다면 대부분의 종교가 좋은 소식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우리 죄는 너무 깊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다.
 

4.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알게 된 것이다. 종교란 선행과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좇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평화와 또는 참된 의미의 성취를 주지 못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은 후 자신은 ‘곤고한 사람’(롬 7:24)이라고 고백했다.

 

4. 바울이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사실이다. 그는 엄격히 정의된 선행들과 높은 도덕 표준들을 요구하는 종교를 따랐다. 그러나 이 종교는 그에게 평화를 주지 못했고, 진정한 성취감조차 주지 못했다. 이 서신서 후반에서 바울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는 배웠으나, 그것을 행할 힘이 없었고, 따라서 자신이 아주 “곤고한 사람”임을 발견했다고 술회한다(롬 7:24).

 

로마서 p.3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p.65

최근 복음주의 신학계 일각에서 그리스도의 주성(主性, Lordship)과 구주되심(Saviorhood)을 구별하자는 입장이 대두되고 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함이 없이 구주(Savior)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달라스 신학교의 Charles C. Ryrie가 이 문제를 제시했다.

최근 복음주의 진영의 일각에서는 주이신 예수님 없이 구주이신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구주 되심을 구분하는 게 관습이 되어왔다. 이것은 과거에 달라스신학원장과 조직신학 교수를 지낸 찰스 라이리(Charles C. Ryrie) 같은 사람의 견해이다.

그에 의하면 주로서의 예수와 구주로서의 예수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구원신앙에 헌신을 첨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믿음으로만’과 ‘믿음에 생활헌신을 첨부한 것’은 둘 중 하나는 잘못된 복음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라이리는 “주이신 예수”를 “구주이신 예수”와 연결하려는 시도를 구원에서 “믿음”에 “헌신”을 보태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오직 믿음에 관한 메시지와 믿음에 헌신을 더한 것에 관한 메시지가 한꺼번에 복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거짓 복음이며, 복음을 왜곡하거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저주(갈 1:6-9)하에서 온다.”

그러나 Ryrie 교수는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믿음에서 헌신을 뺀 것이 성경적 믿음관이 될 수 있을까?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중대한 오류가 있다. 첫 번째 오류는 라이리가 헌신과 구별하는 듯한 믿음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믿음”에서 “헌신”을 뺀 것이 과연 참된 성경적 믿음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적 믿음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성경적 믿음은 지식과 중생으로부터 오는 응답, 그리고 헌신이 포함된다. 헌신 없는 신앙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죽은 신앙이라 할 것이다.



 

[1] 믿음을 떠받치는 지식
[2] 신생(新生)의 결과로 나오는 마음의 반응
[3] 헌신
이것이 없다면 믿음은 귀신들의 동의(“…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와 다를 게 없다.
헌신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다.

 

제5강 로마의 성도들(1:6-7) pp.40-41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p.83

그러면 로마교회는 어떻게 세워졌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을 통해 희미한 빛을 보게 된다. 오순절에 여러나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왔다. 그 중에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행 2:10). 아마도 그들이 로마로 돌아가 이태리의 로마에 처음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로마교회는 기독교 역사의 매우 초기에 세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을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게 대답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는 일어났음직한 일에 대한 암시가 있다. 이 장은 오순절에 관해서 말하며, 그 날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출신 지역들을 열거하는데, 그중에는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포함된다(10절). 그 본문이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이들 대부분이 유대교 절기가 끝나고 제국의 수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이탈리아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고 보는 것이 아마 옳은 듯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 교회는 기독교 선교 초창기부터 존재한 셈이다.

로마는 교통의 요지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다. 바울의 이방선교 기간동안 신자가 된 이들이 로마로부터 온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로마로 들어간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마지막장에서 많은 이름들을 언급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이미 바울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 여행계획을 말하면서 기도 후원과 서바나 선교여행계획을 위한 물질 지원도 주저함 없이 초청할 수 있었다(롬 15:24, 30, 31).

 

더욱이 이것이 앞으로 계속될 전형이다. 고대 세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여행이 이루어졌다. 로마는 이 왕래의 중심지였다. 바울의 이방 전도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틀림없이 로마로 갔고 로마에서 왔을 것이며, 틀림없이 많은 수가 그곳에 정착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장에서 보여주듯이 그렇게 많은 로마 그리스도인들을 알게 되었을 것이며, 자신의 예루살렘 여행을 위한 기도 지원과 서바나(Spain) 전도 여행 계획을 위한 재정 지원을 이 교회에게 서슴없이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롬 15:24, 30-31).

 

로마서 pp.41-42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p.85

[1]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성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1]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다.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7절)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NIV 번역 성경에서는 ‘to belong to’를 삽입하고 있다. 예수가 성도를 불렀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로 성도는 예수께 붙여졌고, 그와의 관계에서 진정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전에 죽었던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 2:1-3)이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결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고 착한 일을 하게 되었다(4, 9절).

 

이 점에서는 “…께 속하도록”(to belong to)이라는 단어들을 삽입하는 NIV의 해석이 분명히 정확하다. 그 뜻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셨다는 게 아니라 –그 일은 주로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평가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속해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진정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2:1-3에서 말했듯이, 전에 그들은 “[그들의] 허물과 죄로” 죽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결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선한 일”을 할 일로 받았다(5, 10절).

이것이 기독교인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예수께 속한 다른 형제를 찾아 사랑하며 협력하는 자다. 성도의 삶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의 사람)을 정의하자면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이 사실이 그 사람을 다르게 만들며,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마찬가지로 예수께 속한 다른 사람들의 무리를 당연히 찾는다. 성도의 삶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해 있는가? 그렇다면 주님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처럼 살 수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했든지 참 신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묘사되는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겉으로 어떤 고백을 하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제22강 악한 자와 선한 자(2:6-11) p.143
 

제3부 멸망에 처해있는 인류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pp.298-299

[1] 의인의 길 (7, 10절)

의로운 자들의 길

여기에 묘사된 사람은 선을 행한 자와, 참고 선을 행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에겐 영광과 존귀와 영생(7절)이 있다. 영광은 신자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의로운 자들이 행하는 일을 여기서는 두 가지로 묘사한다 :
(1) 선을 행하는 사람들과
(2)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주요 동기로 꼽히는 세 가지 것들이 있다. (1) 영광, (2) 존귀, (3) 썩지 아니함(불멸).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 이 단어들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대망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사람에게 반영될 것이다(롬 5:2, 8:18,30, 9:23, 고전 2:7, 15:43, 고후 3:12-18, 4:17절 참조). 존귀는 신자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히 2:7, 벧전 1:7절 참조). 영생은 하나님 백성의 부활 소망을 말한 것이다(고전 15:42, 50, 52-54절 참조). 이상의 세 단어들은 모두 구속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소망이 된다. 





 

“영광”(Glory)은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변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사람 안에 반사될 것을 가리킨다(참조, 롬 5:2; 8:18,30; 9:23; 고전 2:7; 15:43; 고후 3:12-18; 4:17).
“존귀”(Honor)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인정하시는 것을 가리키며, 세상이 그들을 멸시하고 심지어 조롱하는 것과 대조된다(참조. 히 2:7; 벧전 1:7).
“썩지 아니함”(Immortality)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니는 부활의 소망을 가리킨다(참조. 고전 15:42, 50, 52-54).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쓴다 : “바울이 이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할 때는 명백히 구속(救贖)과 관련된 의미들을 지니며,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종말에 대한 대망을 구속적 계시가 주는 소망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제22강 악한 자와 선한 자(2:6-11) p.143
 

제3부 멸망에 처해있는 인류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pp.298-299

하나님께서 의인의 길을 걷는 자에게 네가지 상을 베푸신다. 영생, 영광, 존귀 그리고 평강이다. 영생은 구원을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사는 것이다.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 백성들이 바라는 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그런 대망을 품고 산 보상으로 주시는 네 가지 것이 있다.
[1] 영생, [2] 영광, [3] 존귀, [4] 평강
“영생(Eternal life)”은 구원, 즉 멸망을 받지 않고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을 가리킨다. “영광”과 “존귀”는 그 사람들이 얻으려고 투쟁하는 목표들 가운데 두 가지이다.

마지막으로 평강은 불멸과 병행구다. 여기서 평강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그 결과 의롭다하심으로 얻은 하나님과의 평강을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평화를 말한 것이 아니다(빌 4:7). 여기서 말씀한 평강은 ‘하늘의 평강’을 의미한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모든 갈등에서 풀림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
 

마지막 용어인 “평강(Peace)”은 “썩지 않음”과 병행되는 듯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우리가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리키지도 않고, 심지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께 속한 초자연적 평강(빌 4:7)을 가리키지도 않으며, 하늘의 평강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와 죄에 대한 투쟁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제25강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p.162
 

제3부 멸망에 처해있는 인류
두 번째 핑계: 종교 p.329

I. 종교적, 영적 기득권을 가진 유대인

바울 당시 종교적인 사람의 대명사로 알려진 유대인들은 영적 특권과 종교적 기득권을 행사하던 이들이다. 그들 스스로 주장한 영적 특권이다.

 

장점들의 목록

유대인(바울 당시의 “종교적인 사람”)이 여덟 가지 중요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네 가지는 유대인이 지닌 특별한 종교적 이점들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그들의 종교적 특권들에 관한 것이다. 유대인의 영적 이점들과 관계 있는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고
2. 특별한 관계로 불러주셨으며
3.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고
4. 자신들은 인간의 가장 높은 도덕 수준을 갖고 있다고 한다(17,18절).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다.
3. 우리는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안다.
4. 인간의 도덕 표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것만을 인정한다.

또한 그들 스스로 생각한 종교적 특권은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1.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2.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며
3.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4. 어린아이의 선생이라 한다(19,20절).

그들의 특권과 관계 있는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 소경들을 인도함
2. 어둠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줌
3. 어리석은 자의 훈도(訓導)가 됨
4. 어린 아이들의 선생이 됨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고 유일한 계시를 받았다고 자랑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독특하고도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제26강 마음의 할례(2:25-29) p.169

할례 pp.341-343

II. 성례전은 무엇인가?

성례란 무엇인가?

성령의 사역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경건한 일(29절)이 이제는 우리의 관심이다. 할례가 아닌 세례와 성찬은 우리의 내적변화를 요청한다. 이 같은 성례는 영적 실제 자체라기보다는 영적실체의 Sign이다.


 

성령의 사역에 힘입어, 우리 속에 경건한 행동이 뿌리를 내리는 문제(29절)는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성례들에 관한 한(우리의 성례들은 할례보다는 세례와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 성찬>이다) 쟁점은 성례들이 필요한 내면의 변화와 실체를 반영하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례를 정의해 보겠다. 성례에는 네 가지 요소들이 있다.

1. 성례는 그리스도 자신이 세우신 하나님의 의식이다.
2. 성례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가견적 Sign으로 물질적인 것을 사용한다.
3. 성례는 은혜의 수단이다.
4. 성례는 은혜의 Seal이고 Certification 또는Confirmation이다.

1.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신적 규례이다.
2.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가시적인 상징들로서 물질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
3. 성례는 은혜의 방도이다.
4. 성례는 그것이 상징하는 은혜의 인(印), 보증, 또는 확증이다.

신학자들은 성례를 실제의 Signs와 Seals로 설명한다. 실제를 지적한다는 의미에서 Signs이고 성례 전에 제시된 것을 입증하기 때문에 Seals라 한다.
 

신학자들은 성례들을 어떤 실체들의 “상징들이자 인(印)들”이라고 언급한다. 상징들인 이유는 그 실체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인들인 이유는 성례를 받는 사람의 신분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다.

M. Luther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붙일 때 그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도 해보고 종교개혁의 가치도 다시 생각도 하면서 어두움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 그는 백묵으로 자기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Latin어로 “baptizatus sum”(나는 세례를 받았다)고 자주 썼다고 한다. 그 Sign은 그로 하여금 영적 실존을 보게 하였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그와 연합된 –죽으심과 부활에서- 존재임을 재확인케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가장 풀이 죽은 시기에는 종교개혁의 가치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해 주신 사역의 가치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루터는 그럴 때마다 칠판에 라틴어로 “나는 세례를 받았다”(baptizatus sum!)라는 말을 쓰곤 했다. 그 상징어는 그에게 영적 실체를 가리켜 주었고, 그는 다시금 자신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였음을 재확인하곤 했다.

 

제30강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9-12) p.191

제3부 멸망에 처해 있는 인류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p.405

IV.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로마서 3장 12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두개의 단어로 표현되었다. 즉 Pantes(all)와 ekseklinan(to deviate, wander, depart from the right way)이다. 옳은 길(right way)은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인식하고 그에게 영광과 감사와 예배와 봉사를 하는 길이다(롬 1:21, 25). 하나님을 찾아 감사한 예배를 드리는 대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억압했고 우리 자신의 길을 갔다. 참 하나님의 자리에 거짓 신들을 세움으로 지적,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다. 


 

이제 로마서 3:12을 택하여 그런 일을 하려고 한다. 처음 볼 구절은 “다 치우쳐서”이다.
이 구절은 헬라어에서는 두 단어로만 되어 있다. 먼저는 “다”(모두)라는 뜻의 판테스(pantes)이고, 다음은 바른길에서 “벗어나다” “방황하다” 또는 “떠나다”라는 뜻의 동사 과거형 엑세클리난(exeklinan)이다. 그 “바른길”은 로마서 첫장에 개략되어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인정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고,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다(1:21,25). 그러나 인간은 바로 이 바른길에서 벗어났다. 하나님을 찾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하기는커녕 그분께 관한 진리를 막고 자기 길을 가면서 거짓 신들을 만들어 참되신 하나님의 자리에 두었고, 그 결과 지성과 윤리가 점차 타락해 갔다.

이 같은 형편은 ‘모두’라는 단어가 강조됨으로 긍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났고 12절 끝에서 ‘하나도 없도다’라는 말로 부정적 표현을 하게 된다. 바르게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고 악을 행하는 자는 모두라고 할 수 있다.

 

서두에는 “다” 라는 강한 단어를 사용하여 긍정적인 방법으로 포괄성을 강조한다. 말미에는 하나도 없도다 라는 단어들로 그 점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주석가 존 머리(John Murray)는 이렇게 쓴다. “선행의 범주에는 포함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반면에, 악행의 범주에는 제외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제35강 하나님의 의로 주어진 구원(3:21-24)
pp.218-219

제4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신 구제책
율법과 무관한 일 pp.456-457

오늘날 우리는 어려운 중에도 복음 진리를 전하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진리를 우리도 전해야 한다.
로마서 3장 21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이란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바울과 다른 복음 전파자들이 선포하고 있던 좋은 소식의 실재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 가르침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한 의를 제공하셨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으로 신약에서 성취되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소유하지 못하는 자신의 의를 사람들에게 베푸셨다. 이것은 실현되었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것이지만, 이미 구약에 충분히 예언되어 왔다.

2. 이 의는 은혜로 주어졌다.

2. 이 의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3.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씀하신 것이다.
 

3. 하나님 편에서 이 은혜를 사람에게 주실 수 있게 만든 것은 그 백성을 위해 죽으사 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4.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이 의를 우리가 단순히 믿음으로, 그 의가 우리의 의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구원함에 이른다.

4.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이 의는 단지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의가 된다. 예수님의 사역에 관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제35강 하나님의 의로 주어진 구원(3:21-24)
pp.219-220

제4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신 구제책
율법과 무관한 일 pp.458-459

I.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의를 인간 위해 제공하셨다

 

 

번역상 문제가 야기된다. 이것은 주격 소유격(subjective genitive), 즉 다음의 말의 주격인지, 아니면 목적격 소유격(objective genitive), 즉 of 다음의 말이 첫 단어의 목적격인지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예컨대 전자에 의하면 love of God은 God’s love를 의미한다. 사랑의 근원과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world of misery라고 할 경우 misery가 세상의 근원이 되거나 세상 문제의 기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세상이 ‘비참’으로 특징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비참이라는 단어는 구조상 형용사적 역할을 한다.


 

이런 번역상의 차이는 헬라어 본문이 단순한 소유격 구조로 되어 있는 데서 생긴다. 영어로는 대개 그 소유격을 “의”(of)라고 옮긴다. 그러나 영어와 마찬가지로 헬라어에서도 그것은 문법학자들이 주격 소유격(subjective genitive)이라고 부르는 것일 수도 있고 목적격 소유격(objective genitive)이라고 부르는 것일 수도 있다. 주격 소유격은 “의” 앞에(영어에서는 ‘of’ 다음에) 오는 단어가 주어이거나 개념의 원천일 경우에 성립된다. “하나님의 사랑”(love of God)이 그 예다.
“고통의 세상”(world of misery)을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고통이 세상의 원천이라거나, 심지어 세상의 문제들의 원천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고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구조에서는 “고통”이란 단어가 형용사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21절의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것을 목적격 소유격으로 읽는다면 한 의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결정이 났다. 즉 하나님의 의(divine righteousness)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나타났다고 바울은 지적했다.
반면에 주격 소유격으로 읽을 경우 하나님은 이 의의 기원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능케 하셨다고 할 수 있다. NIV성경의 번역은 아마도 이 같은 입장에서 바울을 이해한 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은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목적격 소유격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의해 결정되는 의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의, 즉 신적 의다. 왜냐하면 바울의 주요 논지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드러났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것이 주격 소유격이라면(목적격 소유격이라기보다는), 바울의 말은 하나님께서 이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NIV 번역자들은 다음과 같이 옮기는 점으로 봐서 이런 개념을 선호한 듯하다 : “그러나 이제는…하나님께로서 온 한 의가 나타났으니.”

우리는 이 두가지 가능성 중 반드시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다. 둘 다 신학적으로 옳은 입장이다. 의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의 의다.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다.

이 문제는 둘 다 옳기 때문에 양자 택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경우이다. 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것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분의 의인 것 또한 사실이다.

 

제39강 자랑할 것이 없나니(3:27-28)
pp.244-245

제4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신 구제책
자랑할 근거가 없음 p.531

I. 가장 큰 죄

이신득의(以信得義)교리에서는 ‘자랑’이라는 자리가 없다. 자랑은 자만(pride)과 관계가 있다. 교만의 표현이 자랑이다. 모든 죄 가운데 교만이 가장 큰 죄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교만을 멸하지 않으신다면 그 계획은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세기에는 일곱가지 죽을 죄목 가운데 첫번째로 꼽히는 교만한 자가 성직자였다. 교만은 실제로 죽은 자와 같이 조용히 나타나는 고로 무해한 돌풍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장 큰 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의 첫째 영향이 자랑과 관련된다는 건 적절한 일이다. 자랑은 교만과 관계되며 –자랑은 교만의 표현이다- 교만은 성경적 기독교에 따르면 여러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이기 때문이다. 교만이 가장 큰 죄 인데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교만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뿌리채 뽑아 던져 버리고, 그것이 났던 곳을 문질러 버리지 않는다면- 그건 좋은 계획이 아니다.
중세 성직자들은 교만을 일곱 가지 대죄(大罪)중 첫째로 꼽았다. 그러나 교만은 무해한 결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C. S. Lewis는 교만(pride)을 본질적으로 경쟁심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한다. 교만한 자는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질 때에만 기쁨을 얻는다. 부나 지혜 또는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근대에 루이스(C. S. Lewis)만큼 교만을 알기 쉽게 쓴 사람을 알지 못한다. 교만은 성격 자체가 경쟁적이다. 교만은 그냥 무엇을 소유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만족한다. 흔히는 사람이 부유하고, 학벌이 좋고, 잘생겨서 교만하다고 말들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남보다 더 부유하고, 더 학벌이 좋고, 더 잘생겨서 교만하다.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드는 건 비교이다. 남보다 우월하다는 쾌감이다.

 

제41강 율법을 세운 믿음(3:31) pp.258-259 
 

제4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신 구제책
믿음으로 세우는 율법 pp.560-561

성경의 핵심(결론)

성경의 심장

로마서 3장 21-31절에 있는 네가지 중요한 교리들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로마서 3:31을 생각한 것을 토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서 단일 단락으로는 가장 중요한 단락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네 가지 큰 교훈들이 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기 의를 제공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의다.

1.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의, 즉 우리가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한 의를 제공해 주셨다.

2. 이 의는 은혜로 주어졌다.

2. 이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심으로 백성들은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은혜로 이루어졌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는 것으로 설명된다. 보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아버지 하나님과 관련 시킴으로 설명한다. 칭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시고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고 선언하심으로 설명된다.

3. 이 의를 하나님 편에서 가능하게 만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죽으시고 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속하신 사역이다. 구속은 우리에게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한다. 화목 제목은 성부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한다. 칭의는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토대로 율법의 요구들을 충족시켰음을 선언하는 행위를 묘사한다.

4.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이 의는 믿음만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고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이미 의를 잘 설명했다.

4.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이 의는 단순한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된다. 예수님의 사역에 관하여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믿음은 필수적인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제42강 아브라함의 믿음(4:1-5) pp.262-263
 

제5부 구약으로 입증된 복음
아브라함의 사례 pp.570-571

성경의 증거

 

그는 구약에 있는 아브라함에 관한 교훈과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을 언급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믿음(faith), 의(righteousness), 그리고 칭의(justification)가 강조된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전의 인물들은 어찌 되었나? 물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이름이 지명되어 의롭게 되었다 한 것은 아브라함이 첫번째 인물인 것같다.

창세기 15:6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맨 처음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최초로 (1) 믿음, (2) 의, (3) 의롭다 함(칭의)에 관해서 언급한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 이전 사람들 –아담, 하와, 아벨, 에녹, 노아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 도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특정인을 가리켜 의롭다 하시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의로운 사람이었나? 이 말씀에 대해 크게 오해된 해석들이 있다. 우선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이들 중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그가 선한 자 또는 경건한 자가 되고, 어떤 선한 행실로 칭의를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의 그에게 많은 자녀들을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기뻐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행함으로 기쁨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신득의 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여기서 우리는 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녀야 한다.
첫째, 본문에 대한 두 가지 중대한 오류를 피해야 한다. 첫째 오류는 자유주의자들이 범하는 오류이다. 이것은 본문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하고 말할 때, 그것을 아브라함이 선한 또는 경건한 사람이며, 그것을 근거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수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을 때 그 약속을 믿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그런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추론해 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것은 그가 그만큼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믿음에 의한 칭의가 아니다. 정반대로, 행위에 의한 칭의이다.

 

제42강 아브라함의 믿음(4:1-5) pp.264-265
 

제5부 구약으로 입증된 복음
아브라함의 사례 p.573

일만원짜리 지폐를 사용하려면 그 지폐의 구매력을 믿어야만 한다. 그 믿음이 구매력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의 가치가 구매력을 가져온다. 영적세계도 마찬가지다.
 

20달러짜리 지폐를 지불할 때는 그 지폐가 지닌 구매력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구매의 근거는 여러분의 믿음이 아니다. 구매의 근거는 돈의 가치이다.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은 의를 대신할 수 없다.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credited)말은 (hasah in Hebrew, Logizomai in Greek) 회계학에 나오는 부기(bookkeeping)용어다. 경리장부는 100% 맞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셨을 때 하나님은 두가지 일을 행하셨다.

셋째, 믿음은 의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신 바”라는 중요한 단어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어(히브리어로는 하사<hasah>, 헬라어로는 로기조마이<logizomai>)는 부기(簿記) 용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구원하실 때 두 가지 일을 하셨다.

1. 7-8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바울은 시편 32편 1-2절, 즉 다윗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8절).
이는 아브라함의 죄가 지워졌다거나 기억에서 상실되었거나 또는 삭감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공상적인 게임을 하시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생의 원장에서 그의 죄의 항목을 옮기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원장에 옮겨졌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모든 죄를 지시고 그 죄를 위해 죽음으로 그 값을 지불하셨다. 아브라함의 죄는 아브라함에게 여겨진 것이 아니고(not reckoned)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여겨진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7-8절(시 32:1-2의 인용)로 다윗의 글을 인용한 내용 –하나님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의 일을 하셨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생명책에서 아브라함의 범죄들을 삭제하신 다음, 마치 그것들을 무시해 버릴 수 있다는 듯이 잊어 버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상 게임을 하시지 않는다. 실제로 생명책에서 아브라함의 죄들의 목록을 지워 버리셨는데, 그 이유는 먼저 그 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장부로 옮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죄들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셨고, 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셨다. 아브라함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죄로 간주되지 않은 것이다.

2. 아브라함을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취하여 아브라함의 원장에 그것을 기록하셨다(창 15:6).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며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계좌에 전가됨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2. 위의 비슷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 이것이 창세기 15:6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취하시고 그것을 아브라함의 장부에 써넣으셨다.
누구든 이런 식으로만 구원을 받아 왔으며, 누구든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정확히 그런 일이 발생해 왔다. 하지만 이해 정도와 관계 없이 사람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계좌에 옮겨 놓는 것뿐이다.

 

제43강 믿음으로 의를(4:3) p.269
 

제5부 구약으로 입증된 복음
의로 여기신 바 된 믿음 p.579

갈라디아서 3장 6절

갈라디아에서 생긴 문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 3:6)
창세기 15장 6절을 신약에서 세번 인용하고 있다. 로마서 4장 3절, 갈라디아서 3장 6절 그리고 2장 23절이 그것이다. 특히 갈라디아서 3장 6절은 우리 질문에 좋은 대답을 준다.

창세기 15:6에 관련된 흥미로운 점은 이 구절이 신약 성서 세 곳 -로마서 4:3(지금 보고 있는 본문), 갈라디아서 3:6, 그리고 야고보서 2:23- 에서 인용된다는 점인데, 그 중 한 곳인 갈라디아서 3:6은 이 질문에 체계적인 대답을 한다.

 

바울은 소아시아 남단에 있는 갈라디아인들에게 그의 1차 전도여행시 설교했다. 사도행전 13-14장에 기술된 바에 의하면 죄로부터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고 선을 행하므로도 아니며 오직 대속사역을 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다고 했다.
 

바울은 사도행전 13, 14장에 기록된 제 1차 전도여행 때 소아시아 남부에 자리잡은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데서, 또는 다른 어떤 형태의 선한 행위나 인품에서 오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믿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 시작했다. 바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은 이 가르침을 이해했고, 믿었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시작했다. 바울의 명백한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심지어 기적들까지 일으키셨다(갈 3:5).

얼마 후 예루살렘으로부터 어떤 유대인들이 갈라디아에 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가르쳤다. 모세를 믿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도 받고 옛 언약의 의식적 요구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라디아로 와서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모세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구원을 받으려면 아울러 할례도 받아야 하고, 옛 언약이 요구하는 의식들을 지키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46강 순례자의 길(4:12) p286-287
 

제5부 구약으로 입증된 복음
믿음의 자취 p609

순종하는 믿음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

창세기 12장 1-3, 7절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묘사하면서 “내가 ~을 할 것이다(I will~)”라는 말이 일곱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록하는 창세기 12장은 이 점을 명백하게 드러낸다(1-3, 7절). 이 구절들에는 “내가…하리라” 하는 말씀이 일곱 번이나 나온다.

1. 내가 네게(땅을) 보여줄 것이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3.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다.

4.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다.

5.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할 것이다.

6. 내가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할 것이다(마침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7. 내가 이 땅을 네게(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1. “내가 네게 지시할 땅.”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3. “[내가] 네게 복을 주어.”

4.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5.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6.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그리고 더 늦은 나중에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했다.

7.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은 그에게 무슨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요 순수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주권행사였다.

아브라함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시게 만들 만한 어떠한 가치 있는 일도 한 적이 없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들에 기여한 것도 전무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경위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선택의 문제였다.

 

제49강 아브라함 신앙의 근거(4:18-22)
pp.306-307

제5부 구약으로 입증된 복음
아브라함이 지녔던 믿음의 근거 p.639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본문의 모든 단어를 철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말씀이 본문 전체 또는 전체 책 속에서 갖는 의미를 찾을 수도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후자의 방법을 통해 본문을 좀 더 깊이 연구하기로 한다.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본문에 쓰인 단어 하나하나를 세밀히 조사해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은 좋은 공부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항상 좋은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복잡한 분석을 중단하고 문단과 그 문단이 들어있는 장과, 심지어는 책 전체를 통해서 단어들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이 유익한 경우도 있다. 로마서 4:18-22에 대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부에서는 나중 방법을 택하고 싶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지녔던 믿음의 근거

 

우리는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의 본질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2.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했다.
3. 환경과 조건이 여러가지로 곤혹스러운 중에도 믿었다.
4. 확신을 갖고 믿었다.
5. 하나님 말씀에 응답으로 행동했다.

1.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2.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것에 기초를 두지 않은 믿음
3. 정반대로 보이는 많은 상황들을 무릅쓰는 믿음
4. 충분한 확신이 따르는 믿음
5.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믿음

어떻게 아브라함은 이 같은 신앙을 가졌나? 외부적 도움이 없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는 여건 속에서 그의 믿음이 강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아브라함 믿음의 근거가 인간(자신) 즉 자기의 견고한 의지, 깊은 감성에 있었다면 그의 믿음은 약해졌고 흔들렸을 것이고 마침내 죽은 믿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강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근거다. 

 

그러나 외적 뒷받침도 없고 세상도 반대하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그런 힘과 특성들을 얻을 수 있었는가?
만약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신에게 근거를 두었거나 아니면 강인한 의자나 깊은 감정에서 힘을 얻었다면 그의 믿음은 약해지고 흔들리고, 결국에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오히려 강해졌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향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도 바로 그곳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가르친다.

 

제50강 우리의 믿음 p.311

 

제5부 구약으로 입증된 복음
기독교 신앙 p.651

 

사도적 복음

C. H. Dodd에 의하면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를 그는 케류그마(kerygma)라고 불렀다. Dodd는 예수 교훈 중 윤리적인 것과 그리고 Didache라 불리우는 부분과도 kerygma를 구별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17절에서 kerygma를 말하면서 그것은 먼저 믿은 자들로부터 받은 것이라 했다.





 

 여러 해 전 도드(C. H. Dodd)는 책을 썼다. 불과 56쪽 밖에 되지 않는 소책자였지만, 사도적 설교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해 널리 받아들여지던 핵심 사실들을 전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도드는 이 핵심 사실들의 목록을 가리켜 케리그마(kerygma)라고 했다. 도드는 예수님의 윤리적인 교훈들 및 그밖에 교훈들을 그러한 핵심 사실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도드는 이 부가적인 자료 군(群)을 가리켜 디다케(didache)라고 불렀다.
케리그마에 관한 고전적인 진술은 고린도전서 15:1-7에 나온다. 거기서 바울은 그것을 자기보다 먼저 믿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어떤 것으로 소개한다. 그 본문에서 케리그마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 하다.

1. 성경을 따라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3절)
2. 그리스도는 장사지낸 바 되었고(4절)
3. 성경대로 그리스도는 삼일만에 살아나셨다(4절)
그리고 부활의 증인들의 이름을 나열하였다(5-7절).
 

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절).
2.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4절).
3.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4절).
이런 간략한 요약에 이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의 목록이 나온다(5-7절).

사도행전에 기록된 설교들에서도 우리는 같은 양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엔 세례 요한의 예비사역,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예수의 기적 사건들로 인한 예수의 신적 권능, 예수의 승천, 종말의 때에 예수의 역할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설교에서는 kerygma가 완전히 나타났지만 어떤 경우엔 추상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모든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선포되었다.
특히 로마서 4장 23-25절에는 이 같은 복음의 기초가 밀도 있게 요약되어 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설교들에서도 동일한 형식을 보게 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세례 요한의 예비 사역,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 예수님께서 기적들로 나타내신 신적 권능, 예수님의 승천,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때 하실 역할, 때로는 케리그마가 온전하고, 때로는 축약된다. 어느 경우든 중심부에 놓이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과 부활하신 일에 관한 선포이다.
이 장에서는 이 두 가지 항목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로마서 4:23-25에는 기본적인 복음 내용이 아주 축약된 형태로 진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신앙(23절) p.312

하나님께 대한 믿음 p.651

23절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우리 크리스챤들이 믿는다는 하나님 신앙의 연속성과 발전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브라함 신앙을 논한 바 있다.




 

이 문장은 아브라함의 예와의 연속성과 그것을 넘어선 발전을 모두 포함한다. 그 연속성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며,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내포된 믿음의 본질도 따라서 동일하기 때문에 중요성을 갖는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적한 바 있다.

1. 하나님 약속을 믿음
2.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믿음
3. 역경 속에서도 믿음
4. 확신하는 믿음
5. 행동하는 믿음 이었다.

1.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2.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믿음.
3. 정반대되는 어려운 상황을 무릅쓴 믿음.
4. 충분히 확신한 믿음.
5. 행동하는 믿음.

우리의 믿음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었다. 이 같은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과 같다.
그러나 우리 믿음은 아브라함 믿음보다 더 발전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적한대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정확히 그래야 하며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믿음은 점차 강하게 성장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에 근거를 두지 않고 하나님께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과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넘어선 발전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바울이 쓰는 대로, 우리의 믿음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제50강 우리의 믿음(4:23-25) pp.316-317

기독교 신앙 pp.657-659

결론

결단의 순간

우리는 로마서 4장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긴 여행길을 지나온 나그네처럼 여러가지 진리를 체험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상황을 언급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자연계시조차 받는 일에 실패했고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예배치도 않았다. 진리를 억압했고 하나님 아닌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섬겼다.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모든 악한 죄에 빠졌다. 인간 중에는 자기 의를 내세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종교적 율례를 들고 나오려 하는 이도 있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이제 로마서 4장을 마칠 때가 왔고, 따라서 로마서의 첫째 주요부를 마칠 때가 되었다. 기나긴 여행이었다.
바울은 인간의 길잃은 상태를 분석하면서 편지를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해 자연 안에 해두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창조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거절하며,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좀더 충분히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진리를 따르는 대신 진리를 억눌렀고, 그 자리에 자기들을 닮은, 심지어 짐승들을 닮은 가상의 신들을 만들어 놓았다.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등을 돌린 인류는 성적 타락과 그밖의 타락들로 얼룩진 내리막길에 접어들었고, 마침내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침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제시한다. 우리 자력으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된다. 구약의 아브라함과 다윗도 믿음으로 구원얻은 증거를 제시하고 그러나 그것은 구약의 신자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우리도 위함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라고 했다. 고로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죽음에서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을 제시하면서,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일해 오셨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 예수님은 그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의 방향을 돌려 놓으셨고,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구약 성도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방법과 동일한 방법임을 증명한 뒤에 다시 그 주제로 돌아간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기록된 것은 구약의 성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롬 4:20).
그 약속을 받아들이고,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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