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조 목사 / 아레오바고사람들

외조부님은 조실부모 하시고 조부 슬하에서 자라셨다. 외조부님의 조부님께서는 노년에도 관직을 가지고 계셨는데 고종께서 특별히 궁에서도 나귀를 타고 다니도록 윤허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다.

개인적으로는 대종교의 도사이셨으며 한 발자국을 떼실 때마다 벌레 한 마리라도 죽이게 될까 염려하시어 반듯이 살피시고서야 걸음을 옮기셨으며 의도치 않게 미물이라도 죽이게 되실까봐 속이 빈 대나무 지팡이를 사용하셨다. 대종교는 나철이 나서기 전부터 있었다.

1882년 고종 19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군사들이 궐문을 지키는 동안에 개혁파 대신들은 즉석에서 살해당하는 판국에서도 외조부님의 조부님께서 나귀를 타고 궐문을 나서시는데 모두들 엎드려 절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동대문 근처에서 기거하시었는데 도착하시자마자 10세의 손자인 외조부님을 데리시고 강원도 양구군 동면 청리로 피신하셨다. 이곳의 청산이 많이 알려지지 아니한 10승지지 중의 하나이어서 말세의 피난처로 적합하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외조부님은 거기서 서당에 다니셨는데 1달 쯤 되어서는 서당엘 가려 하지 않으셔서 조부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되셨다. 서당에서는 배울 것이 없어서 아니 가겠다고 하시니 조부님께서는 천자문을 외어보라 하셨고 단숨에 다 외우셨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배우고 싶으냐고 하문하시니 외조부님께서는 무릇 책이라는 것이 다 뜻이 있는 법이거늘 서당에서는 날마다 글자만 외우라 하니 배울 것이 없다 하였으며 이후로 서당에는 가지 않으셨다.

16살 되시던 때에 산에서 백일기도 하시던 중에 도를 득하시되 특별히 의통을 하셔서 이날부터 의사가 되시어 평생을 강원도 양구, 인제 등지에서는 신의로 소문이 나도록 유명하셨고 일본인의 공의들은 밥을 굶는다고 소문이 나기도 하였다.

필자가 처음 알고 있던 외조모님은 4번째 외조모님이시었으며 전도부인이셨다. 외조부님은 건장한 종 둘을 개성으로 보내셨다. 주소와 약도를 그려 주시고 막다른 골목에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있으며 댓돌에 남자 짚신이 두 켤레가 나란히 있을 것이다. 그 사랑채에 과수댁이 있으니 보쌈을 해 오라고 시키신 것이었다.

외조부님께 전도를 할양이면 나도 하늘님을 섬기니 그 하늘님께서 그의 아들을 믿으라고 지시하신다면 믿겠노라고 하시었다. 모친이 10살이 안 되셨을 때 큰 외삼촌은 춘천에 나가서 중학교를 다니셨고 외조모님은 감리교회 가을 연회에 참석차 출타중이셨는데 한 밤중에 갑자기 청아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시는 소리에 (어린) 모친은 놀라 깨어나셨다.

외조부님은 앉으신 채로 손뼉을 치며 찬송가를 부르셨다. 나중에 들으니 수천, 수만의 천군천사가 하늘에서 둘러서서는 성경을 따라 읽으라고 하여서 따라서 읽으니 찬송가를 부르자 하여서 찬송가를 따라 부르셨다는 것이다.

필자가 어려서 들은 이야기라 성경구절과 찬송가는 다 잊어버렸다. 그날부터 외조부님은 예수를 믿으셨고 그 해에 예배당을 지으셨는데 쌀이 모자라서 벼가 익기 전에 훑어 쪄서 말린 쌀로 밥을 지어 일꾼들을 먹였다. 그 해에 농사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 삼년 먹을 것이 나왔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한글학회의 한글보급회원이 되셔서 <한글교본>과 <동사략>이라는 역사책을 들고 전국에 계몽운동을 다니셨다. 지금 필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타다 남은 <한글교본> 뚜껑과 <동사략>전4권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 <동사략>전4권 (필사본) Ⓒ<교회와신앙>

주시경 선생의 애 제자 김윤경 씨는 <조선문자급 어학사>를 지으셨다. 선친과는 아주 특별한 사이였으며 이 책 3판을 선친께서 발행하셨다. 1946년이었다. 이 책 말미에는 당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을 입수하게 되어 첨부하니 최초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한글학회의 한글보급회원이시면서도 회원 명단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분, 늘 그런 식이셨다. 우여곡절 끝에 강원도 양구에 들어오셨고 외조부님께 제대로 붙잡히셨다. 6세 아래의 처녀 염인순(廉寅順). 필자의 모친이다. 17세에 약혼을 하셨다.

“나를 따라 주시겠소?”
손을 덥석 잡으시며 하신 말씀이다.
“어디 가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꼭 따르겠사와요!”
부끄럼도 없이 말이다.

햇수로 삼년 만에 결혼하셨다. 소문나기는 혼인도 하기 전에 애 낳는다고들 하였다. 웃고 떠들며 달아나고 쫓아가고 온 마당이 떠나갈 듯 시끌벅끌 하였다. 첫 아들은 이름이 혁조(赫朝)였다. 유명화의 예언대로.

해방 당시에 식구들은 양구의 외가 집 근처에 살고 있었고 선친께서는 팔도를 내 집으로 알고 다니셨다. 어느 여름엔가 오랜만에 선친께서 집에 오셨다. 모친께서는 밥상을 차려서 들고 들어오셨다.

두 분께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모친께서는 갑자기 화를 내시며 밥상을 부욱 하고 밀어 내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들은 다들 남으로 간다는데 선친께서는 아직도 준비가 다 되지 않으셨다는 것이니 아니 그랬겠는가?

11월 하순이 되어서 우리 집은 마차를 빌려 짐을 싣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필자와 여동생은 마차 뒤에 타고서 신바람이 나서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야단법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왜 꾸지람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갔다.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해방으로 남하하게 된 순간이었다. 너무 늦어서 38선을 넘는 다고 장담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양구 마을에서는 예전에 계몽차 가르치시던 일을 떠 올리며 남으로 간다 하니 여비조로 가르치신 댓가를 지불하겠다고 하였다. 차라리 트럭을 한 대 빌려서 38선까지 실어다 주면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준비하였다. 운전사는 돈을 받고 몰래 도망쳐버렸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가다가 중요한 순간에 검문소를 피하여 가지 못하였다. 개울을 건너서 여인숙에 하루 밤을 지낸 후에 다시 북으로 갈 계획이라며 소련 군 장교를 속였다. 개울을 건너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듯 하였다. 그 여인숙은 양구로 가는 사람들이 머무는 주막이 있는 유명한 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집은 서울의 하왕십리. 마당은 300평. 적산가옥, 일인들이 체신청 관사를 짓다가 만 집을 인수하여 새로 단장하였다. 건물은 23평. 우리 집은 체신청의 국장의 집이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둘러 있는 집들은 과장 집들과 계장의 집들이다.

짐을 풀고 나니 11월이 거의 다 가버렸다. 모친과 6살배기 나는 채마밭에 가서 남들이 김장하고 버린 무청과 벗겨버린 배추 이파리를 되는 대로 많이 주워 굵은 소금에 절여서 그해 겨울을 났다.

외조부님은 양구감리교회의 염형기(廉亨基) 장로님이셨는데 구약성경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시더니 몇 년 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고 계셨다. 도통하신 이후로는 배우지 않아도 모르는 한문이 없으셨으며 세상에 모르는 일이 하나도 없으실 지경이었다. 그러나 전도부인을 보쌈 해 와서 결국에는 예수를 영접하게 될 줄은 그런 외조부님도 정말로 꿈에도 모르셨던 일이다.

부라운 선교사는 외조부님의 집에 기거하면서 강원도 일대에 선교 일을 보셨다. 외조부님은 양구 일대에서는 가장 큰 부자이셨고 마을의 세금을 모두 내어주셔서 온 마을사람들이 외조부님의 일이라면 열일을 젖혀놓고 도왔다.

1925년 을축년 장마 때에 외조부님 네 산이 무너져 내려서 논과 밭을 다 휩쓸었고 강줄기가 바뀌면서 논밭은 모래사장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알거지가 되어 3년을 개간 하였는데 온 동네 청년들이 함께 콩죽을 먹으며 고생하여 논 30마지기를 마련하였다.

전도부인이신 외조모님은 부지런하기가 한이 없으셨고 욕심도 끝이 없으셨다. 농사일 외에도 양잠을 하셔서 벌이가 만만치 않았다. 필자가 5살 때에 동생 4살 자리와 함께 땅콩 밭에서 모래밭에서 자란 땅콩 뽑는 일을 하였다. 동생이 땅콩 한 알을 허리춤에 숨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쫓아와서는 야단야단이 말이 아니셨다.

땅콩 농사가 다 끝나면 땅콩을 큰 가마솥에서 볶는데 그 고소한 냄새가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외조모님께서는 땅콩 찌꺼기만을 한데 모아서 큰 광주리에 담아놓고는 까먹고 남은 껍질을 다시 그 광주리에 버리도록 시켜서 그 광주리는 아마도 근 두 달 이상 필자와 동생의 심심풀이 먹거리가 되곤 하게 하셨다.

마당에는 항상 이층집 높이의 솔 낟가리가 두 덩치나 되었고 그 중에서 마른 솔가지 하나만 뽑아가도 외조모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불호령이 이반 저만이 아니셨다, 대청마루 밑에는 쌀 20가마 드는 어마어마하게 큰 독이 있었는데 일 년이면 그 쌀 20가마가 모자랄 지경이셨다. 육이오 사변이 나서 마을의 쌀이 모두 군량미로 빼앗기게 되었는데 마을 당원들이 외가 집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쌀 한 톨도 찾지 못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일찍 다시 뒤지러 오는데 틀림없이 대청마루 밑에는 쌀이 수십 가마가 나올 것이라는 통보가 미리 왔다. 외조모님은 밤새도록 솔 낟가리를 옮기고 그 속에 쌀 20가마를 숨기도 다시 솔 낟가리를 멀쩡하게 쌓아놓으셨다.

그들은 다시 빈손으로 돌아갔고 언젠가는 다시 올 것을 아신 외조모님은 때 마침 이른 봄 음력 2월이어서 거름을 논에 미리 가져다가 뿌리는 일을 할 때인지라 외조모님은 소달구지에 쌀을 숨겨두고 거름더미로 덮고 그것도 모자라서 쌀 한 자루를 애기처럼 업고 논으로인지 산으로인지 밤새도록 여러 날을 끌고 다니셨다.

과연 며칠 후에 마을 당원청년들이 다시 찾아와서 솔 낟가리 두 둥치를 모두 뒤져보았지만 허사였다. 중공군이 내려와서 강원도에서도 급히 밀려 내려오고 있었는데 마을에서 시가전이 있을 예정이라 모든 마을 사람들이 다 맨몸으로 피신하여 강을 건너왔다. 아침이면 다시 올라갈 예정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외조모님께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급히 강을 건너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시면서 만류해도 듣지 않으시고는 작은 외숙모-며느리를 데리고 그 전쟁터에 다시 들어가셨다. 새벽녘에, 임시로 피난 온 마을사람들 모두가 하도 급하여 정신없이 남으로, 남으로 밀려 내려오게 되었다.

서울이 수복되고 얼마 안 있어서 정전회담이 있었다. 작은 외삼촌은 알음알음으로 강원도 양구에 몰래 들어가셨다. 외조모님과 외숙모님은 온데 간데 없으셨고 아무 흔적조차도 없었다. 다시 몇 년이 지나고 양구에도 사람들이 다 모였다.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집안의 세간이 쪽박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없어진 상태였다.

도둑 줄 것은 없어도 거지 줄 것은 있다는데 젓가락 한 짝도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틀림없이 놋의 아내보다 더 영악하신 외조모님이 세간을 몽 땅 실어서 선산 어디엔가 땅을 파고 숨겨놓고는 납치되어 이북으로 끌려갔으리라.

몇 년 후 찾은 것은 단 하나, 외삼촌이 산길을 가다가 발에 돌이 걸리는 것 같아서 보니 쇠붙이였다 그것은 옛날 일제 미싱이었다. 이것이 외조모님의 유일한 흔적이셨던 것이다. 빗물에 산길이 쓸려나가서 밖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그 일대를 다 뒤져보고 일주일을 쇠꼬챙이로 땅을 쑤셔 봐도 아무 것도 찾지 못하셨다.

외삼촌은 거의 50이 다 되어서 새 장가를 드셨다. 여러 해 후에 외조부님도 새 장가를 드셨는데 5번 째 외조모님이셨다. 고향이 4번째 외조모님처럼 경상도이셨으며 이분도 외조부님이 미리 이름과 생김새나 사시던 동네까지 다 알고 계셨었다.

그런데 이분은 주책이 없으실 정도로 욕심이 많으셔서 외조부님께 찾아오는 환자들을 괴롭히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외조부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약값을 받지 않으셨는데 집으로 가는 도중에 기다리고 계시다가 불호령을 치면서 약갑을 내라고 야단치셨다. 그런 일을 수년간 하시다 보니 점점 약방에 찾아오는 이가 없게 되었다.

필자가 여름이나 겨울 방학 때면 밥술이라도 줄여보려고 외가 집에서 지내곤 하였는데 외조부님은 조용할 때면 언제나 조용히 필자를 부르셨다.

“정조야아!”
“.....네에.”

“너 밖에 없다아.”
“.......”

92세 되셔서 안경도 지팡이도 사용하시지 않으신 채로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필자에게 손수 만드신 침과 침통, 그리고 책 두 권을 남겨주셨다. 필자가 한의학을 전수받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는데.... 생각하면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여러 해 후에 필자는 의술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늦게도 말이다.

외조부님은 축지법(縮地法)이나 변신술(變身術)에 대한 책도 많이 읽으셨다. 그분의 논지는 이렇다. 옛날에는 신께서 인간세계를 그의 뜻에 맞도록 다스리시기 위하여 때로는 멀리 소식을 전하시기 위하여 축지법도 필요하였고 변신술도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신문화가 들어와서 비행기가 있으니 축지법이 필요가 없으며 기타 무슨 기적 같은 것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무슨 해 몇 월 며칠이라고 육갑을 써서 말씀하셨는데 듣던 당시에 계산해보니 갑신정변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가지고 계시던 기서이문(奇書異文)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셨다고 하시며 혹시 그런 책을 발견하더라도 현혹되지 말라고 하시며 이제는 옛날이 아니라 신문화시대이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옥추경(玉樞經)은 절대로 읽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작은 귀신을 쫓아내려고 더 큰 귀신을 불러내는 일이니 삼가라고 하셨다.

외조부님은 평생에 옛날 이인전(異人傳)에나 나옴직한 기적을 아주 많이 하셨다, 16세에 산기도 다니실 때 칠흑 같은 밤이면 범이 나와서 길을 안내하곤 하였고 한 번은 범의 등을 타고 기도를 가신 일도 있으시다.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으니 되도록 삼가려 한다. 그런 분이 하나님을 믿고 또 그의 아들을 믿게 되다니 정말로 하나님은 크시고 오묘하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