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범 선교사 / 스리랑카 키룰라포네교회 

스리랑카에서 원주민 선교를 하고 있는 정은범 선교사가 작년 연말 선교편지를 보내왔다. TV 드라마 <미생>에 빗대어 19년의 사역을 돌아보며 아직 ‘미생’이라는 정 선교사의 자평은 우리 모두가 깊이 되새겨 봐야할 고백 같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미생 in Mission 

중학교 때 병원에 입원해서 처음 바둑을 배웠고, 고등학교 때는 클럽활동으로, 그리고 대학교 때는 종종 친구 기숙사나 휴게실에서 바둑을 두었지만 그야말로 초짜였습니다. 그래서 동기들과 바둑을 두면, 내 바둑돌들은 언제나 곤마가 되어 쫓기기 바빴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요리조리 피하기도 하고, 반격도 시도해 보고, 말 그대로 꼼수도 부려보았습니다. 바둑에서의 ‘미생’ 이었습니다. 

▲ 스리랑카 지도를 펼쳐 들고 현황을 소개하는 정은범 선교사 Ⓒ<교회와신앙>

그 시절 내 신학 함과 신앙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신학생, 모범적인 교육전도사 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의 나’는 그 신학과 신앙의 골짜기에서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모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았고, 죽은 것 같다가도 다시 꿈틀 대었습니다. 그 처절함, 간절함, 긴장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신학 함에 있어서의 ‘미생’이었습니다!

12월 2일은 우리의 결혼 19주년 기념일 이었습니다. 사실은 19년 전 결혼식과 선교사 파송식을 같이 가질 예정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나 됨도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이해했고, 그래서 선교지에 내딛는 첫 발이 우리의 신혼여행이길 바랬습니다. 그 만큼 간절했고, 그 만큼 흥분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의 삶은 역시나 만만치 않았습니다. 문화적인 충격, 파송교회와의 관계, 선후임 선교사님들과의 관계, 재정적인 어려움, 현지인들과의 관계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 최소 8시간은 언어공부에 땀을 쏟고, 파송된 지 일 년도 안 되어 파송교회에 사표를 낸 후 금식하며 기도하고, 빗자루로 뱀과 전갈을 때려잡으며, 만삭인 아내를 삼발택시에 태워 덜컹 거리며 병원에 다니고, 믿었던 현지 동역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이런 저런 관계 속에 생긴 상처들에 베개를 적시고...

선교지에서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이렇게 살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고 한 수 한 수 놓아갔던 그 옛
날의 내 바둑돌 같았습니다. 가로 세로 19선의 바둑판을 바라보듯, 어느 덧 19년의 시간이 흐른 선교의 현장을 바라봅니다.

완생일까? 아니면 아직도 미생일까?

이제 한국에서의 삶보다 스리랑카의 삶이 더 편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더 편. 해. 졌. 습. 니. 다.
언어도, 음식도, 사역도 이제 너무 익숙합니다. 어쩌면 선교사로서 제대로 자리매김을 했다고, 혹은 그 동안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쫓기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습니다. 완생일까요?!

언젠가 들었던 목회학 강의에서 “목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교수님의 질문에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대답은 소위 말하는 3G(Gold, Girl, Glory)가 아니었고, Familiarity, 즉 친숙함,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긴장감이 사라진, 타성에 젖은, 안주하는 목회였습니다.

너무 익숙해져 버린 선교. 긴장감이 사라진 선교현장. 타성에 젖은 사역들….
나는 완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무감각, 타성, 교만함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나 봅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그 날까지 우리의 사역은 ‘미생’이어야 합니다.
십자가까지의 예수님의 삶이 ‘미생’이었던 것처럼.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처음에 받은 감동은 “한국 직장인들이 저렇게 번 돈을 내게 선교비로 보내주는구나. 참 미안하고 감사하다”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나는 선교를 위해 정말 목숨 걸고 있는가? 간절함이 있는가? 처절한 몸부림이 있는가?” 라는 생각이 마음을 요동케 했습니다.

2014년 끝자락에 서서. 광야를 바라봅니다.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2014/12/29 생일날에 정은범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