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홍 목사 / 예장통합 분당 아름다운교회 원로

인생은 소망으로 산다. 미래가 지금보다 좋으리라고 기대하니까 오늘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 하지만 미래는 더욱 비참해지고 고통이 많으리라고 믿는다면 자살을 하고 말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자살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박사과정에 있다가 보면 목표가 분명해진다. 최종목표는 학위를 받는 것이다. 마치 천국에 들어가고 마치 인생을 마치는 것처럼 거기다가 목표를 두고 그 이상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 목표를 눈에 보면서 점점 가까워지니까 현실의 어떠한 고통도 참아낼 수가 있다. 만약 그 목표가 도달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멀어진다면 포기하고 말 것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삶이 괴롭겠는가!

다행히 나는 과정 과정이 힘들기는 해도 작은 목표들이 하나씩 이루어져갔기에 충분히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우선 성적을 C는 받지 않았다. 그럭저럭 코스워크 2년이 지나갔다. 그러면서 독어, 불어, 라틴어 시험을 치러야 했다. 모두 턱걸이로 통과했지만 통과는 통과였다. 다 마친 뒤에 논문 쓰는 자격을 위해 종합고사가 있었다. 두 번 떨어지면 끝이다. 그것도 한 번에 통과했다. 다음은 논문의 개요를 내는 것이다. 얼마나 까다로운지, 계속 퇴자를 맞다가 겨우 통과가 되었다.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를 전투병들이 고지 하나씩 점령해 가는 것처럼 올라갔다. 개요가 통과된 다음은 한 장씩 논문을 써나가야 했다. 하루에 3면 쓰면 잘 쓰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 두 해가 지났다. 논문을 써서 내면 잔뜩 비판을 붙여서 다시 써오라고 한다. 당시에는 아직 컴퓨터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전동타자기로 내용을 쳐야 한다. 고치느라 몇 주, 전부 다시 타자로 치느라 몇 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세월이 가는지 내가 나이가 몇인지 모른 상태로 지내기를 몇 년, 드디어 지도교수가 오케이를 불렀다. 이제는 전체 교수들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질문을 받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질문에 답변을 다 한 뒤에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한다. 교수들이 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줄지 안 줄지를 거기서 투표한다. 밖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앉아있었는지! 한참 뒤에 들어오라고 한다.

만약 “미안합니다.”로 시작되는 말이 나오면 떨어진 것이다. 다시 쓰거나 그만 두고 집에 가거나 해야 한다. 그런데 교수들이 다 몰려온다. 지도교수 먼저 손을 내밀면서 말한다. “축하합니다. 김박사님!” 바로 이것이다.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앞에 석사 하느라 1년 뒤에 박사과정 4년을 보낸 것이다. 이 말을 듣자 다리에 맥이 확 풀려버렸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겨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모든 게 다 귀찮았다. 기쁨이 넘쳐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별로 그렇지가 않다.

올라갈 데까지 다 올라갔다. 전에는 목표가 있었다. 이제는 그게 없어졌다. “저 목표에만 이르면 다 된다.” 이것이 모든 고통을 이기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목표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제 걱정이 나를 지배한다. “내가 선생이 되려고 이 공부를 했던가?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아무 의욕도 없고 힘도 없었다. 하루 종일 그냥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도대체 내 소망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에 가서야 깨달았다. 그때까지 소망으로 알았던 것은 연기와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때 분명한 깨달음이 왔다. 오직 하나님만이 변하지 않는 소망 그 자체였다. 다른 건 소망처럼 보일뿐이지 속이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목표로 해야만 제대로 된 삶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