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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도 정치 비자금 있다
북한/김정일의 비공식 ‘주식펀드’ 실체
2003년 11월 19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국책사업 지원금이 통치자금으로
관리운영 위해 무역회사 거느려
금강산 관광 비용 상당액 유입설


지난해 대선 기간 중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기업체로부터 거둬들인 대선자금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검찰 수사를 계기로 더 이상 더러운 정치자금으로 정치가 오염되고 기업들이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환골탈태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정치권이 깨끗한 정치를 염원하는 국민여론에 부응하기보다는 정치자금 수사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상호비방 등 정쟁에 더 매달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도 남한의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 북한의 <노동신문>과 <중앙방송> 등 관영매체들이 ‘남조선 소식’을 통해 보도를 비교적 소상하게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화폐단위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백, 수천 억원의 현금을 주고받은 사실을 전하면서 ‘이 돈을 속도국수(라면의 북한식표현)상자에 담으려면 얼마만큼의 분량’이라는 식의 설명도 한다. 물론 목적은 남한체제의 ‘썩은 모습’을 통해 이른바 ‘공화국(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북한도 이런 정치자금이나 통치 비자금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우리 정부 당국자와 고위급 탈북 귀순자들의 말이다. 정권 수립 이후 반세기 넘는 동안 김일성· 김정일 부자체제로 이어지는 독재과정에서 변칙적인 비자금과 정치자금의 조성과 운용은 불가피한 측면까지 있다는 얘기다. 북한도 해마다 봄·가을에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전체회의를 열어 예산안을 심의하고 의결한다.

 ‘독재체제에서 정부예산이 다 김정일 돈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예산과 별도로 노동당의 자금이나 우리의 청와대에 해당하는 주석궁(과거 김일성이 집무하던 금수산의사당의 별칭으로 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칭)의 돈줄은 따로 있다는 게 우리 정보 관계자의 설명이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린 즉흥적인 지시를 당장 이행하거나 고위간부들에 대한 사기진작책을 즉석에서 실행하려면 많은 현금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자신의 생일을 기념해 북한군 고위 장성들에게 최신형 벤츠를 선물한다든가 하는 것은 그 중 하나다.
북한 노동당과 주석궁의 비자금은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극비에 부쳐졌으나 김일성 사망 이후 황장엽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 고위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베일을 벗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은 이른바 ‘주석펀드’로 불린다. 북한은 일정한 목적에 쓸 자금이나 물건을 펀드라고 부른다. 외래어의 사용을 극히 제한하고 있는 북한이 이런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펀드는 본래 김일성 주석이 살아있을 때 직접 특정 경제분야나 국책사업을 격려하거나 진흥하기 위해 지원하는 성격을 띠었다. 그렇지만 그 규모가 커지고 은밀해지면서 점차 비자금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됐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주석직을 승계하지는 않았지만 이 자금은 그대로 김 위원장에게 넘겨졌고 명칭도 주석펀드라고 불린다는 얘기다. 김일성은 생전에 후계자이자 맏아들인 김정일에게 비자금의 운용을 맡겼다고 한다. 고위 귀순자는 “비자금 중 특히 달러에 대해서는 김일성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으며 외화가 꼭 필요한 경우 김정일이 직접 챙겨주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정보당국에 따르면 김일성 부자가 비자금을 둘러싸고 벌인 갈등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90년대 들어 김일성은 국가예산관리문제와 관련해 경제담당 기구인 국가계획위원회 외에도 무역문제를 담당하는 대외경제위원회와 대성총국·인민무력부·사회안전부(우리의 경찰에 해당하는 기관) 등에도 비자금 형태의 은닉예산이 편성돼야 한다고 밝혔지만 김정일은 이에 반대했다.

 김정일은 국가계획위원회에서만 자금을 일괄 관리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한 정보당국자는 “비자금을 주석펀드로 사용해 각 분야의 통치자금으로 활용해온 김일성과 이를 개인비자금으로 축적하려는 김정일 사이에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주석펀드의 운용이 여의치 않거나 돈줄이 말랐을 때를 대비해 안전장치로 마련해둔 것이 ‘주석예비펀드’다. 사전에 계획되지 못했거나 돌발적으로 돈이 필요한 새로운 사업이나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자금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 노동당의 자금줄은 당 중앙위원회의 39호실이 담당하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핵심 측근들로 짜여진 39호실은 비자금의 조성과 관리 운영을 위해 간판급 무역기관인 대성무역총회사 같은 알짜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다.

39호실은 북한내에서 생산·수출되는 금은과 주요 외화벌이 품목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송이버섯·꽃게 같은 고가의 농특산물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39호실을 통해 독자적인 재량으로 외화를 수중에 넣어 관리하고 있으며 보다 원활한 자금 조성을 위해 금융기관과 공작기관까지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북한 현지법인인 금성은행과 마카오의 조선광명대표부가 그것이다.

금성은행은 자산규모가 1천500만 유로이며 주로 환전업무와 유럽에 진출한 북한 기업의 재정지원 등의 업무를 보는 것으로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국제정보연구원(원장 홍성봉)이 99년 발행한 국제정보총람에 따르면 이 은행은 중동 국가들과의 무기거래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자금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또 광명성대표부는 경제관련 직원과 함께 대외첩보기관인 당중앙위 조사부와 우리의 청와대 경호실 격인 호위총국, 비밀첩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우리의 국가정보원에 해당) 등의 요원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가정보원 등 정보기관은 광명성대표부가 다른 국가에서 발생한 북한의 외화수입도 총괄운영하면서 현지법인을 통해 세탁해 일정 부분을 스위스 비밀계좌로 예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보관계자는 “광명성이란 별칭이 김정일의 아호라는 사실은 이 기관들과 김정일의 관계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관심을 모으는 곳의 하나는 스위스다. 북한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이자 주석궁 직할 외화벌이 기관인 능라888무역의 부사장을 지낸 강명도 씨는 귀순 직후 “스위스 은행내의 김정일 계좌에는 20억 달러 정도의 비자금이 예치돼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특히 스위스 비자금의 관리를 위해 자신의 심복을 북한대사로 임명하는 등 신경을 쓰고 있다.

정부 일각에서는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에 건네진 수억 달러 규모의 돈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으로 쓰였을 것이란 관측을 제기한다. 또 지난 98년 11월 이후 57만 명이 다녀온 금강산 관광의 대가(입산료)도 마찬가지다. 이 돈 가운데 상당 부분이 김정일 체제의 지지기반을 다지고 권력 핵심층의 충성을 결집시키는 데 사용됐을 개연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한 노동당과 군부의 권력 핵심층이 남한의 대선자금 스캔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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