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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성경해석 방법에 성숙한 인격의 중요성
가계저주론’에 대한 정훈택교수의 결론적 반론에 대한 이윤호 목사의 주장
2003년 08월 27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들어가는 말
필자는 모두 8번의 글을 통해 정훈택교수(이하 반론자)를 포함된 비판자의 주장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필자는 본 토론을 마감하는 입장에서 반론자가 마지막 글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괄호([    ])안의 인용문은 반론자의 주장이다.

‘가계의 저주’의 강조점에 대한 입장
필자는 ‘가계의 복’보다는 ‘가계의 저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반론자의 지적을 인정한다.
사실상, 지난 번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복과 저주’의 진리는 신·구약 성경에 많이 언급됐지만, 대부분의 조직 신학책들은 이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이는, ‘가계의 복과 저주’의 신학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대부분의 신학, 특히 실천 신학은 신학의 출발점 중의 하나인 상황(context)에 따라 개발되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 역사상 어느 때 보다도 현재 가정생활과 상담이 신학의 주요 관심사가 된 적이 없었다.

‘가계의 복’에 대한 신학화도 필요하지만, 치유가 더욱 필요한 ‘가계의 저주’에 대한 신학적 임상적 규명은 대단히 필요하다. 이는, 마치 게놈 연구가 유전병과 비정상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인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필자는 현세와 후손에게 임하는 복만 강조하는 한국 교회의 입장에 대한 수정을 위해 ‘가계의 저주’에 대해 강조했음을 인정한다. 즉, 한국 교회가 내세에 받을 복과 현세, 후손 및 내세에 받을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에 대해 균형있게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또한, ‘가계의 복’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가계의 저주’를 다루는 임상적 이유가 있다. 즉, 가계의 저주를 포함한 모든 저주를 최소화시킬 때 가계의 복을 포함한 모든 복이 최대화되는 실제적 이유 때문이다.

<케네디가의 저주(The Kennedy Curse)>라는 책의 저자들은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프가 양조와 사기등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재한 탓으로 후손들이 저주를 받았다는 세간의 여론보다 한 발 더 앞서 간다. 즉, 그들은 조지프의 아버지 패트릭이 돈을 사취해서 애인과 함께 아일랜드를 탈출, 미국행 이민선을 탔다는 것을 저주의 다른 이유로 지적한다.

이와 같이 사회에서 ‘가계의 저주’가 이슈가 된다면 최소한 실천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대부분의 신학교들은 가정치유 및 가계도(genogram)에 대해 가르치지만, 이에 대한 신학화 작업은 전무한 상태이다. 반면에, 전 세계적으로 영적 전쟁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은 ‘가계의 저주’를 포함한 도시 및 국가에 임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책들은 도시, 민족 및 국가 치유의 필요성과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 행위’로서의 ‘가계의 복과 저주’에 대한 입장
필자는 첫번째 글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이미 밝혔다. 즉, 필자는 ‘복과 저주’를 인간의 순종과 결부된 하나님의 선택적 사역으로 이해한다.
사실상, 이에 대한 필자와 반론자의 논쟁은 마치 하나님의 예정(혹은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혹은 책임)와의 논쟁과 비슷하다. 반론자와 같이 ‘복과 저주’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행위로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론중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소모적인 논쟁에 빠지게 된다.

사실상, 하나님의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론이라는 두 바퀴를 가진 마차는 조화있게 잘 굴러간다. 반면에, 반론자는 [“가계의 저주는 사탄의 역사이다.” 이윤호박사의 동의를 사실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사탄의 역사”와 “하나님의 통치사역”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된다]라고 언급하면서 ‘가계의 저주’를 하나님의 전적 통치사역으로 주장했다. 과연, 반론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필자는 신명기 28장 18,32,41,46,59,62,68절들에 언급된 질병, 사고, 재정적 궁핍등의 ‘가계의 저주’는 하나님의 전적 통치사역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함으로써 범죄한 인간을 저주하는 사탄의 역사인가?라고 반론자에게 반문하고 싶다.

예를 들면, 질병, 가족들의 사망, 재정 파산등의 가정 몰락의 저주를 경험한 욥의 경우, 이를 하나님의 통치 역사인 동시에 사탄의 역사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필자는 ‘하나님의 통치역사와 사탄의 역사를 동일시하는’ 이원론(dualism)을 배격한다.

동시에, 필자는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발생하며 긍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사용된다는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을 수용한다. 이런 신학은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에 대한 성경적 과제를 푸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삿 9:23; 삼상 16:14, 18:10, 19:9; 왕상 22:22; 고후 12:7 참조)(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 165~166, 188~189면).

신약 성경이 지지하는 저주에 대한 입장
반론자는 [그것이(하나님의 사역의 한 방면인 저주) 신약 시대로 넘어오며 어떤 복된 구속적 상황으로 바뀌었는가]라고 그의 입장을 피력하면서, 구약(시대)과 신약(시대)과의 차이점을 재천명했다. 필자가 첫번째 글에서 이미 답변했듯이, 이런 반론자의 주장은 다분히 세대주의 신학인 동시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차이점이 전혀 없다”는 역사적 정통 교리와도 상반된다(<소요리 문답강해>, Volume I & II, 177~178면).

성경해석학자 버나드 램과 조직 신학자 밀라드 에릭슨은 반론자의 이런 성경해석론을 배격한다(<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103~104면; (<Christian Christology>, 69~70면). 또한 신, 구약의 모든 구절이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신학 정립의 기초로 삼는 칼빈의 신학적 확신과도 배치된다(Bernard Ra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174면 각주 7번 참조).

내담자들을 위한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의 적용성
필자는 반론자를 포함한 여러 비판자들과 직, 간접적으로 소위 ‘가계치유’ 논쟁에 참여하면서, 많은 비판자들이 필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내용을 나름대로 상상하며 비판하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혹자는 필자가 가계치유론을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의 저자인 메릴린 히키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어떤 분들은 필자가 졸업한 풀러신학 대학원에서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의 상상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실상, 필자는 인도네시아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경험을 포함한 많은 내담자들에게 내적 치유 사역을 수년간 감당하면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것을 임상적으로 깨달았고, 나름대로 신학화 작업을 시도했다.
특히, 필자의 책,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라는 책이 1992년 2월에 출판된 후 나온 여러 가지 비판에 대해 신학화 작업을 계속해 왔다.

‘변화확산 이론(diffusions of innovations theory)’이 설명하듯이,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를 주창하고 초기에 수용하는 2.5%의 소수의 사람들은 수많은 비판을 받는 모험을 감수하고 있다(Everett M. Rogers, <Diffusions of Innovations>, 37면). 반면에, 필자는 비판자들이 마음을 열고, 진지한 자세로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를 성서적으로, 임상적으로 연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 및 다른 내담자들에게 적용해 볼 것을 권면하고 싶다.

왜냐하면, 가계치유론은 21세기 사회와 교회가 직면한 가정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인 피터 와그너박사는 <가계의 복과 저주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필자의 책을 추천하면서 가계치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어떻게 복과 저주가 세대를 통해 전가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신자들에게 약속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한 획기적 단계입니다.

이윤호 박사의 책은 당신이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더러, 성령의 능력으로 가계의 복과 저주의 문제를 직면할 수 있도록 당신을 훈련시킬 것입니다.” 가계치유를 한번도 시도해 보지도 않고, 그저 비판만 하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물론, ‘문제 분석자/제기자’들을 통해 과학 및 기술 이론의 발전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 분석자/제기자’들이 자칫 잘못하면 건설적 비판자가 되기보다는 비판을 위한 비판자로 전락하기 쉽다. 따라서, ‘문제 분석자/제기자’들은 어떤 이론의 결함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대안 제시자’들로 변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 역시 그의 축사 사역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제사장 무리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라고 도전했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마 12:27; 눅 11:9).

맺는 말
필자는 이번 토론에 진지하게 임해 주신 정훈택 교수와 재미없고 딱딱한 신학적 주제(?)에 관심을 갖고 논쟁의 글들을 정독해 주신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사실상, 논쟁은 성격상 변증적이어서 유쾌한 게임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본 논쟁에 임한 것은 반론자들에게 책임있는 답변을 줄 뿐만 아니라, 또한 가계치유를 통해 치유 받아야 할 수많은 내담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필자 자신이 가계치유를 통한 축복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내담자들이 가계치유를 통한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번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성숙한 성경 해석방법과 더불어 성숙한 인격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싶다. 성숙한 성경 해석자는 ‘절대적’ 진리와 ‘비절대적’ 진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절대적 진리가 ‘either-or’의 진리라면, 비절대적 진리는 ‘both-and’의 진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는 한 개인의 구원문제와 관련된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성숙한 성경해석자는 또한 ‘절대적’ 진리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유지하는 동시에, ‘비절대적’ 진리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런 성숙한 인격을 바탕으로 한 논쟁은 늘 생산적이고 치유와 변화를 위한 디딤돌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와 <가계의 복과 저주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필자의 두 권의 책과 <목회와 신학> 2001년 6월호에 실린,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를 성서적/신학적으로 입증한다”는 필자의 글을 참조하고, 본고에 대한 토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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