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애 (빛과소금교회 최삼경 담임목사의 부인. 숙명여대 교육학과 졸업. 중·고등학교 교사 역임) 

나는 서울 촌놈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살고 있으면 서울 사람이지 서울 촌놈은 또 무슨 말인가. 서울 촌놈이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또 맞는 말이다. 어쨌든 나는 정말 서울 촌놈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을 떠나 시골에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으니 서울 촌놈 중에 원조 서울 촌놈이다. 사실 수학여행 때 서울을 떠나 본 것 외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시골에 가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쌀 나무, 다시 말해 벼는 책을 통해서만 보았고, 공부시간에 배워 안 정도였다. 지금도 과일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과일을 보노라면 서울 촌놈의 모습이 아직도 내 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느낀다. 당시 나는 바다를, 논과 밭을, 원두막을 그림과 상상으로만 경험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 촌놈으로 불편함 없이 살았다. 그런데 정말 서울 촌놈이란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된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된다.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두고, 이번 방학에 무엇을 할 것인지 들 뜬 분위기 속에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닌 시절은 지금처럼 여행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고, 수련회 혹은 MT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기였다. 더 더욱 외국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때였다. 그렇기에 방학이 되면 친척집을 방문하는 일이 가장 즐겁고 최고로 신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 중에 방학 때 방문하여 여러 날 보낼 수 있는 시골에 외갓집이나 친척집을 둔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서로서로 자기가 방문할 시골 친척집에 대하여 부풀려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도 질세라 목소리를 내어 친척집에 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그렇게 여러 날 다녀올 친척집이 없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친척은 많았지만 나의 친척들은 전부 서울에, 대체로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어 금방 다녀올 수 있었고 또 다 비슷한 환경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흥미를 유발할 그 어떤 것도 없었으니 오랫동안 머무를 구실이 안 되었다. 

한 친구가 으스대며 말한다. 자기는 시골에 과수원을 하는 외할머니 댁에 기차를 타고 다녀 올 것이라는 것이다. 고속도로가 없었고 시외버스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거리 여행엔 기차가 최고였던 때였으므로 기차를 타고 시골에 간다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동시에 서울에만 살고 있는 친척들이 원망스러웠다. 기차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기차 여행을 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내 머리 속은 온통 기차여행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께서 갑자기 기차 못 타본 사람 손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기차로 가득 차 있던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90명 남짓한 우리 반 아이들 중에 기차를 못 타본 사람이 나 외에는 하나도 없었다. 혹시 나 외에도 기차를 못 타 본 아이 중에 창피해서 손을 들지 못한 아이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방학 중에 기차 한 번 타 볼 것을 권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준엄한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를 타고 갈 곳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서울 촌놈임이 온 천하에 증명되는 역사적인 날이 되고 말았다. 

경운기도 생겨나기 전이기에 시골의 교통수단은 사람의 두 다리와 소달구지, 그리고 자전거뿐이었다. 그 때에는 자동차를 못 타본 사람을 그야말로 촌놈이라고 해야 맞는 말인데 오히려 지겹도록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내가 친구들 앞에서 완벽한 촌놈이 되고 말았다. 

정말 나는 자동차는 지겹도록 탔다. 그 이유는 학교가 집에서 멀리 있어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가끔 아버지의 출근 시간이 나와 맞을 때면 당시엔 귀한 집차(JEEP)에 몸을 싣기도 할 정도였다. 이런 서울 아이가 서울 촌놈이 되는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한 마디로 촌을 모르는 촌놈이었다. 하기야 소달구지도 말로만 들었고 그림으로만 보았으니 서울 촌놈은 촌놈임에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여름 방학이 되었다. 나는 기차를 꼭 타야만 한다고, 신생님의 숙제라고 엄마를 졸랐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엔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는 서울교외선이라는 기차가 있었다. 서울 서부역을 출발하여 신촌역을 거쳐 능곡, 일영, 송추 등을 지나 다시 서부역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철도였다. 나에게 이런 기차가 있다는 것은 황금 같은 기쁨의 큰 소식이었다. 이 열차는 마치도 나 같이 기차 한 번 못타본 서울 촌놈을 면케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부모님을 졸라 서울역에서부터 신촌역까지 기차를 타보기로 했다. 첫 경험! 무슨 경험이든 첫 경험은 설레고 기대되고, 기대 속에 두려움도 있는 것이다. 나의 기차타기 첫 경험도 마찬가지였다. 타자마자 내릴 정도의 짧은 거리이지만, 서울역에서 신촌역까지! 이것이 나의 첫 기차 여행이 되었다. 물론 기대했던 기차 안에서의 삶은 계란 등의 군것질은 희망사항으로만 존재하였다. 드디어 나도 기차를 타 보았다. 나도 서울 촌놈이 아니라고 떳떳이 말을 할 수 있는 경험을 한 것이다. 

며칠 전, KTX 를 탔다. 불현듯 서울 촌놈 딱지를 면하게 해준 나의 첫 기차 여행이 생각났다. 나는 가슴 설레던 그 때의 그 경험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50 여 년 전 일이지만 내 뇌리의 생생한 기억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리고는 느리고 소음 많고 이상한 냄새의 추억이 있는 이 고마운 서울교외선을 가만히 그려 보았다. 비록 몸은 현대식 열차에 있었지만, 마음은 조촐한 서울교외선에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