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친숙한 정연희 권사의 일곱 번째 단편집 소설 <가난의 비밀>(개미)이 나왔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소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를 만났다. 그와 대화하는 동안 고희를 맞이하는 작가의 단아함과 깊은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정연희 권사는 삶은 고통 가운데 맺어지는 열매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고통이 빚어준 보석, 그는 자신의 삶이 인생을 그렇게 규정하게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신앙과 연결된 전체였다.

"내 신앙은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생명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상명세서에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지 않고 '예수교'라고 씁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문학을 다른 장르로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모든 삶이 하나님과 연관이 있고 문학 역시 기독교적인 것과 따로 데어 놓는 것을 반대했다.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 인생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든지 깨닫지 않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관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기독교적이면서도 기독교문학의 범주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

연희는 문학을 영원의 주식이라고 했다. 그의 나이 칠십이 되도록 그의 마음을 후비 팠던 갈증, 그것을 녹여낸 것이 8편의 단편을 엮은 <가난의 비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기에는 그의 삶이 근원적인 물음과 답변이 들어 있다. 그는 이 사실을 그의 책머리에서 넋두리 하듯 "쓰일 데 없는 칼날을 갈 듯 오랫동안 숫돌만 닳게 만들며 헛헛한 세월을 흘렀습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헛헛함이 삶의 "근원적 질문에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결국 그 답을 하나님 안에서 찾았다고 고백했다.

"내 나이가 70입니다. 하지만 문학을 추구하며 살던 내가 마흔이 될 때까지 탯줄덩어리였습니다. 정신과 육체만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영적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내 인식의 창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시 채에 채여도 아픔인줄 모르면 말은 달리지 않는다. 그는 40대에 들어서면서 겪었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눈을 떴다. 중년이 되기까지의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객기였을 뿐이다. 젊은 육신과 정신으로 그는 자신 안에 갇혀 있던 자신의 영혼의 굶주림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득 그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벽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그는 인식하지 않고 거부했던 그 하나님의 체취를 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문사에서 데려갈 만큼 잘 나갔던 사람입니다. 학교가 기독교학교다보니 주변이 믿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김활란 박사, 김옥길 교수님이 나를 많이 아껴주었지요. 그분들은 내게 기독교를 권했지만 오히려 그분들의 삶이 무지해 보였습니다."

정연희의 문단 데뷔는 195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파류상>을 통해서다. <파류상>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작품이다. 그는 사십이 될 때까지 어쩌면 기독교적인 고민을 하지 않은, 혹은 반항적인 기류가 흐르는 소설을 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 가운데 침입자로 오신 하나님 때문에 삶에 새로운 인식의 창을 열게 되었다.

<가난의 비밀>은 이런 그의 고뇌의 삶을 정제한 것처럼 보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바늘밭, 낭자한 피밭'이라는 섬뜩한 표현을 한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삶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잘나가는 작가였지만 정연희의 삶은 죽고 싶도록 혹독한 시베리아의 바람이었다.

"세상을 알지도 못한 가운데 시작한 결혼 생활, 그리고 이혼, 별거 중인 남자와 사귀다 휘말려든 간통죄, 그야말로 옥죄는 사건과 불편한 시기심들, 삶은 나를 환영하지 않고 배척하고 대적하기만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맘에 드는 것 없이 모두가 나를 에워싸고 내 숨통을 조여오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비로소 나는 인간존재를 껴안고 가는 고통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그는 마흔이 되기 전에 이미 세상에서 알아주는 작가였다. 그의 소설 <목마른 나무들>, <석녀>, <소리치는 깃발>이 영화화할 만큼 인기 있는 작가였다. 그러나 인기가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인기만큼 그는 불행한 길을 걷고 있었다. 정연희의 과거는 어둠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쫓겨난 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부터 그의 출생을 반가워하지 않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서너 살이던 오빠가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라비 잡아먹고 태어난 아이'라고 나를 낙인찍었습니다. 나를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인생이, 사랑이 뭔지 모르고 태어난 자는 인생의 고난이 끊이지 않습니다."

간통죄로 잡혔다가 간첩죄로 몰려 가는 기가 막힌 상황 가운데 그가 만난 하나님,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 가운데 쇠사슬로 매인 것처럼 얽히고 고통스런 삶 속에서 비로소 고난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읽어도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예수를 믿고 마흔한 살이 되서야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인식의 창이 열리면서 그는 소설의 주제와 방향이 바뀌었다. 고통의 아름다움이 생명이 되어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삶의 외로움이 아니라 생명을 찍어서 글을 썼다. 목숨을 다한 정직성을 걸고, 내 아픔만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깎고 다듬기 위해 글을 썼다고 고백한다.

처음 그는 기도에 기가 막히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웠다고 했다. 인정하지 않았던 실체, 우주의 통치지가 살아계시고, 그분의 정확한 응답이 그를 두렵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영혼 안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면서 그는 고통을 생명으로 탄생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 가운데 내려진 고통의 선물이 자신을 얼마만큼 성숙시키는지도 배웠다. 그래서 그는 "고통 없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성숙이 없다'고 말한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귀먹은 자를 여시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했다. 정연희의 <가난의 비밀>은 자신의 고통스런 삶 가운데서 튼실하게 얻은 아름답고 비밀스런 열매를 쓴 단편들이다. 표제작 <가난의 비밀>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주인공이 남편과 함께 이혼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되고 있다. 아내 몰래 낳은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하는 심경의 변화를 추적하는 작가는 소설 가운데 등장하는 이들의 또 다른 인물의 모습을 통해 '가난의 비밀'을 '자기에게 정직할 수 없는 가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연희는 결국 영혼의 구원이라는 목표로 이끌어 간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고통 가운데 얻은 진리일 것이다. 영원을 느끼면 고통스럽고 다난한 삶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영원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비로소 인생의 자유를 알게 한다.

정연희 권사는 그런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갈망을 자신의 문학 속에서 생명으로 녹아내는 듯하다. <매화골 머슴>은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혼의 자유를 찾아 직장을 그만둔, 그 탓으로 아내와 가족과 헤어진 중년 남자가 지리산 매화골에서 암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60대의 여인을 만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줄거리다.

특히 <이치개>(이쑤시개)에서 그는 '자기 자신하고 잘 지내는 사람이 남하고 잘 지낸다'라는 진실을 이쑤시개 소동을 통해 소리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누구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정연희 권사는 자신의 영혼 가운데 "너는 내 것이다"라고 표시한 하나님의 인침이 현재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고백한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그의 이런 고백은 그가 살아온 삶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그가 최근 겪었던 노년의 명예에 대한 사람들의 시기, 그리고 그런 가운데 또 다른 연민과 사랑의 고백이다. 그는 기자를 만나러 오는 날 묵상한, 야곱이 형을 만나고 난 뒤에 겪었던 자녀들의 이방인 살육, 그리고 거기를 떠나 벧엘로 가는 길에 자기 식솔들에게 상수리나무 아래에 우상들을 묻게 하는 것처럼, 자신도 탐욕과 아집, 자아를 묻고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너무 평온한 동산입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내게는 십자가입니다. 내 것을 포기해야만 하나님 나라를 향해 부끄러움 없이 갈 듯합니다. 고통의 밧줄은 은혜의 밧줄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놓친다면 곧 나락으로 떨어진 짐승일 겁니다. 날마다 죄를 자복해도 죄를 짓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붙들려 살기를 열망하는 정연희 권사, 그는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진리의 비밀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