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원 / 미주중앙일보 기자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린다고 흥분의 열기가 휩쓸던 1988년. ‘LA의 북악산’ 그리피스 팍(Griffith Park) 골짜기 한 구석에선 난데없는 색소폰 소리가 가득 찼다.
사흘 앞으로 다가 온 재즈 페스티벌이 문제였다. 서울 올림픽을 홍보하려는 의도로 마련된 세계 재즈페스티벌이 할리우드 볼 공연장에서 열릴 참이었다.
한국을 대표해서 페스티벌에 참석할 연주자 길옥윤은 당시 대중가요 작곡가로 인기 절정에 있었다.

그러나 오랜 만에 서는 콘서트 연주를 위해 녹슨 기량을 되살릴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재즈 아티스트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사국 한국을 대표하는 자리였다.
길씨는 LA에서 미국인 연주자들과 어울려 연주 활동을 벌이는 후배 음악인 정창균을 찾았다. 아예 색소폰도 가져오지 않은 채였다.

정씨는 그리피스 팍으로 길씨를 데려가 단기간의 강도 높은 ‘특수 훈련’에 돌입했다. 무엇보다 자신감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콘서트 당일 무대에 오른 길옥윤은 거장의 뚝심을 되살렸고 청중은 기립 박수로 한국 재즈의 수준을 인정했다.

10대 초부터 밴드 생활을 하며 화려한 연예계를 맛본 정창균은 미국으로 온 뒤 비로소 거듭 나는 영적 부활을 깨달았다. 은혜의 기쁨을 체험한 그는 신앙생활을 권했지만 길씨는 요지부동이었다. 한국에라도 갈라치면 만사를 제치고 환대를 하면서도 복음에는 머리를 가로 질렀다.

그러던 길씨가 수년 후 사업에 실패하고 심한 고난을 겪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TV에 나왔다. 길씨는 이런저런 말끝에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고백을 몇 번이나 했다. 그가 누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었다.

이제 목회자가 된 정창균 목사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다시 곱씹게 된다. 믿음의 씨를 뿌리면 하나님은 언젠가 누구를 통해서든 열매를 거둔다는 확신이 더해진다.

▲ 정창균 목사가 부활절 콘서트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며 밴드를 지휘하고 있다.

부활절인 지난 16일 오후 3시 LA에 위치한 세계아가페선교교회에서는 독특한 기념집회가 열렸다. 영상과 창작 음악이 어우러진 부활절 특별 연주회가 열린 것이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이 이날 처음 선 뵌 부활절 연주곡의 이름이었다.

“이번 부활절 콘서트에서는 영화 스크린과 특별히 작곡한 창작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부활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영상은 영화 ‘예수’와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면을 편집했죠. 그리고 각 장면에 맞게 다양한 장르의 연주곡들을 작곡한 뒤 몇 달에 걸쳐 다시 편곡했습니다.”

밤을 새며 작업에 몰두하느라 입술이 부르텄지만 부활을 환호하는 기쁨의 제물을 준비한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막이 올라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는 장면이 스크린에 뜨면 음악은 크로스오버 스타일로 연주된다. 그러나 유다의 배신으로 고난을 받을 때는 잔 컬트란, 소니 롤린 등 거장이 들려준 것처럼 애끊는 색소폰 소리가 청중의 가슴을 후빈다.

이어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숨을 거둘 때는 스트라빈스키 풍의 현대 클래식이 회개의 심령을 깨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듣고 뛰어가는 제자들의 등 뒤로는 컨템퍼러리 빅 밴드 음향이 뒤따른다.

그리고 스크린 위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재회하는 순간은 팝 뮤직과 클래식으로 채워진다. 특별한 부활절 콘서트가 열린 대예배당에서 교인들은 영화와 음악이 주는 부활의 감상과 은혜에 맘껏 젖어 들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동시에 영혼을 울리는 음향이 귀를 적시는 특이하지만 은총이 충만한 경험이었다.

어느덧 색소폰을 분지 43년, 정 목사는 이민사회에 음악인으로 널리 알려진 올드타이머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부여한 음악의 은사를 바쳐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다.

지난 1999년에는 세 개의 색소폰을 동시에 연주하는 그의 사진과 함께 LA타임스와 팍스TV에 연주활동이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또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재즈 가스펠로 연주하는 장르도 그가 한인 교계서 처음으로 개척했다.

그가 이끄는 가스펠 빅밴드의 멤버들은 할리우드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백인과 흑인 프로연주자들이다. 교회에선 청소년과 청년으로 구성된 세계아가페오케스트라를 인도한다. 이번 부활절 영화와 음악 콘서트에도 교회 오케스트라와 함께 백인과 흑인 재즈 밴드 단원 여덟 명이 동참했다. 신앙을 함께 하는 동료로 기꺼이 부활의 찬양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부활의 날, 현대 문명의 영상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총동원한 ‘새 노러가 이민의 땅 한 켠에서 구세주의 승리를 선포했다. 그날 회복의 씨앗들이 우리도 모르는 새 뿌려졌다. 이제 부활의 결실이 온 누리에 영글어 매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