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수 / 목사, 변호사

연초부터 움추린 우리 경제가 한보 부도사태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큰 홍역을 치루고 있다. 검찰은 한보사태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미명하에 조기에 수사를 종결했다. 수사결과에 의하면 정치인들과 고위 관료들이 시중은행에 압력을 행사하여 부당하게 대출을 하게 했고, 몇몇 은행장들은 부당 대출을 하여 준 대가로 수억원씩을 한보로부터 받았다는 것이었다. 한보사태에 관련된 인물들을 살펴보자. 여당과 제1야당의 중진 국회의원들이 관련되어 있고, 전직 장관이 관련되어 있으며, 돈줄을 쥔 은행이라는 금융조직의 수장들이 관련되어 있다. 모두 다 자기가 속한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고, 또 자기가 속한 조직을 이용하여 다른 조직이나 개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한 조직의 타락은 조직의 뇌수들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비리가 아닌 합법적 조직이나 높은 사회적 직위를 이용하는 범죄를 우리는 화이트 칼라(white collar)범죄라고 부른다.

이러한 범죄는 개인적인 비리보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단지 운이 없이 걸려들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 나는 떡값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시킨다. 사법부조차도 이런 구조적인 비리에 대해서는 좀 관대한 경향이 있다. 국민들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범죄에 대하여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이에 반해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것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범죄를 노 칼라(no collar)범죄라고 하는데, 이들은 자기의 행한 범죄를 시인할 때는 뉘우침이 있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이러한 개인적 비리는 그 자신이나 그가 속하고 있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비리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정당, 정부조직, 은행등 소위 구조자체를 타락하게 만들고, 그 죄의 영향력은 그 구조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에게뿐만 아니라 그 곳에 속해 있지 않지만 그 조직의 영향하에 있는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여기에 구조적 비리에 대해서 우리가 분노하며 죄의 심각성을 가져야 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보사태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우리는 또 하나의 사건을 맞이해야 했다. 북한 당비서인 황장엽 씨의 망명소식이 그것이다. 그가 우리 측에 보낸 자필서에 의하면 김정일체제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는데 그는 북한 체제를 사회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라고 잘라 말했다. 주민들은 오로지 김정일을 찬양하는 생활에 묶여 다른 창조적인 생활을 할 여유도 없는 하나의 거대한 광신도 집단이라는 것이다. 김정일의 잘못된 신념 때문에 북한의 주민들은 건강한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북한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김정일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자신들의 죄성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구조 전체가 타락하면, 미치지 않는 한,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죄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어렵다. 황비서도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고 했다. 김정일은 자기의 죄 때문에 그 구조하에 있는 주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죄의식이 없는 것이다. 구조적 비리는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적 악으로 말미암은 영향은 실로 개인적 비리로 말미암은 영향보다도 훨씬 크다. 한보사태와 황장엽비서 망명사건을 동시에 대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폐단과 공산주의의 폐단을 함께 경험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구조적 비리는 매우 심각한 죄로 인식되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맥성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그 죄를 속함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종류와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특히 레위기 4장을 보면 죄를 범한 자들을 나열하고 있고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이 나열되어 있다.

첫 번째 범죄자의 군으로 나열된 자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들이다. 제사장들이 범죄했을 때의 속죄방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군으로 온 회중을 들고 있다. 여기의 회중은 단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법적인 권위와 조직을 가진 단체를 말한다. 그 조직들이 범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특이하게도 그들의 행위가 범죄인지를 잘 깨닫지 못한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죄한 죄를 깨달으면’이라고 되어 있다. 구조적 비리는 죄의식을 갖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성경은 두 번째의 범죄군으로 나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비리들이 미치는 악영향은 실로 크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족장이 범죄할 때, 네 번째로는 평민이 범죄할 때를 나열하고 있다.

이 나열된 순서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리가 미치는 악영향의 범위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등급을 정한다면 평민, 족장, 회중, 제사장들의 범죄 순이 아니라, 제사장, 회중, 족장, 평민의 죄 순이다. 구조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 그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중죄이다. 구조적 범죄에 관련된 사람들은 가슴을 찢으며 회개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런 구조적 비리가 철저하게 빛가운데 드러나 다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드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철저한 회개와 드러냄, 그것은 타락한 구조가 정결해지기 위한 최상의 길이고 백성들로부터 죄의식을 걷히어지게 하는 길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