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IMF의 한파에 온 나라가  얼어붙고 있다. 그러나 시골은 도시만큼 그 심각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고통 분담!
참 좋은 이야기이다. 예로부터 고통은 나누어질 때 훨씬 가볍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야말로  분담이 되어야지 어느 계층에 대한 일방적인 강요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Ⅰ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났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로 이제는 제법 번듯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신이 속한 곳에서는 내노라 할 만큼의 확고한 위치를 잡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간간이 듣곤 했다. 사실 서로 간에 긴밀한 연락은 없었다. 보고는 싶었지만 필자는 필자대로 친구는 친구대로 마음만큼 서로를 위해 투자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어쩌다가 고향의 부모님을 통해서나 아니면 일년에 한 번 정도 연락을 주고받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반가움이 커서 이내 예전의 동심으로 돌아가 그간의 소식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나 이전의 밝은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직장 생활에 대한 질문에는 끝을 흐리고 애써 다른 이야기로 말꼬리를 돌리려 했다. 이내 그럭저럭 시간이 흐른 뒤 친구는 술을 한잔 하고 싶다고 했다. 사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필자의 입장을 고려해 권하지는 않을테니 자리만 지켜 달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 친구는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깊은 물 속에 숨겨진 귀한 것이라도 찾아 내려는듯 열심히 술잔을 비워갔다. 그러면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경제 이야기로 말문을 열기 시작한 친구는 이내 우리 나라의 경제 파탄에 대한 꼼꼼한 지적으로 이어진 뒤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정치인과 일부 계층에 대한 서슬퍼런 독설로까지 이어졌다. 모두가 맞는 이야기였고 필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와 필자의 사이는 분명한 선이 있음을 알았다. 친구는 그 피해 당사자로서 경제파탄 회오리의 한중간에서 상처투성이로 서 있었고, 필자는 아직도 심각함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촌부와 같은 어정쩡한 모습이다. 바로 친구의 직장은 한 때 잘 나가는 기업이었으나 갑작스러운 경제적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이내 부도로 쓰러져 파산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졸지에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허무감, 장래에 대한 불안감,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 자신의 처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뒤엉켜 이내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술병들만을 나무라는듯 비우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술자리를 정리하고 나오자 친구는 노래방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오늘은 어차피 이 친구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 같아 동행을 했다. 친구는 노래라고 하기보다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흥을 찾으려 애써 보지만 흥은커녕 자꾸만 처져가는 힘없는 어깨만 눈에 들어왔다. 필자도 아득한 기억 속에 묻혀 있었던 몇 곡을 찾아내서 열심히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친구의 아픔을 달래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평소보다 밤공기가 더욱 차게 살 속을 파고 들어왔다.  불빛 또한 추위에 얼어붙은듯 그 생기를 잃고 있었다. 선뜻 말을 건네기가 두려워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만 집중하며 걷던 중에 친구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동안 10여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오늘처럼 이 하늘 아래서 마음껏 소리를 질러 본 것이 처음이다. 그렇게 소리 한 번 제대로 질러 보지 못하고 열심을 다해 회사를 위해 충성한 결과가 이것뿐이라니… 넌 목사가 되길 참 잘했다.”
친구는 이내 말문을 흐리고 말았다.

Ⅱ
평소에 존경을 하던 목사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급히 O형의 피를 수혈 받아야 하는데 수혈을 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마침 필자의 피가 일치하여 병원을 찾았다. 사실 필자의 생각에는 수혈은 아마도 교인들이 나서서 하리라 생각을 했고, 수혈보다는 환자를 뵙고 싶은 마음에 길을 나섰다.

같은 교단은 아니지만 과묵하시고, 목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남다르셔서 늘 마음 속으로 존경심을 쌓아 가고 있었다. 필자가 영월에서 목회할 때에는 교단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선교비를 보내주시며 따뜻한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다.
예전에는 고향에 재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를 개척하신 이래 지금껏 약 30년을 교회를 위해 다 쏟아 부으셔서 이제는 누가 보아도 안정된 교회를 이루시고 한참 목회에 열심을 다하실 때인데 이처럼 위독하시다니…. 병원으로 향하는 필자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교인들은 보이지 않고 사모님과 자녀들만 조급한 마음에 중환자실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필자의 피가 절실히 필요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헌혈을 위해 헌혈실로 내려가 보니 목사님의 큰딸이 먼저 와서 피를 뽑고 있었다. 헌혈을 마치고 나오니 사모님께서는 반가움과 감사함에 몸둘 바를 몰라 하신다. 목사님은 중환자실에 계신 터라 면담이 어려워 먼발치에서 호수를 꽂고 누워 계신 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사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식사를 하러 갔다. 피를 뽑은 뒤라서 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보쌈집으로 필자를 이끌었다. 사모님은 필자에게 쌓인 말문을 열었다. 그 동안의 경과와 병의 진행과정, 앞으로의 예측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하루는 장로님들이 병문안을 오셨다는 것이다. 단순한 병문안인줄 알았는데 그분들은 교회 구성원들의 뜻이라며 당회장직 사표를 내라고 하더란다. 30여 년을 온갖 정성을 다해 지켜 온 교회, 물론 자신의 소유물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귀한 교회였는데….

 이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미쳐 생각해 보지 못했었기에 당회장직 사표 요구는 크나큰 충격이 되었던가 보다. 더욱 충격이 되었던 것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병중에 따뜻한 위로의 말을 기대했는데 그와는 반대로 너무 가혹한 요구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내 사표를 내고 난 뒤 병세는 더욱 악화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 했던 지난날의 고통을 숨김없이 이야기하시던 사모님의 눈에는 액체가 가득 고여 있었다. 밥이 어디로 넘어갔는지도 모르게 식사를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필자의 손을 꼭 쥐고 몇 번이나 당부하시던 사모님의 손길과 외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박 목사님! 우리 남편 같은 목사가 되지 말고 젊을 때 건강 잘 유지하세요. 건강을 잃으니 모든 것을 잃게 되는군요. 이제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겠어요.”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