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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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마른 바람소리가 가득하다. 산 정상에서 시작된 단풍의 형형색색 뽐냄들이 이미 산허리를 지나 계곡에 이르고, 단풍이 지난 자리는 앙상한 가지를 서서히 드러내며 계곡으로부터 시작된 냇가에는 수북히 낙엽이 가득하다. 자연의 순리 앞에 모든 것이 조용히 침묵으로 순응하며 마른 바람 사이로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예년에 비해 올 겨울은 그 발걸음에 속도를 더하여 성큼성큼 가을을 밀어내며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느 해는 그 자태가 아름답던 억새풀의 환호성들이 올해에는 왠지 분위기 파악 못하는 푼수쯤으로 인식되어 해마다 필자는 이때쯤이면 가슴 가득 한아름씩 꺽어 단촐한 시골 목회자의 집을 풍요롭게 하던 일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예년과 다름없는 풍성한 들판인데도 곳곳에 묻어 있는 상흔들이 흐느끼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70년대부터 시작된 고도성장과 그것으로 인해 누리던 경제적 풍요에 어느덧 익숙해진 우리는 작년 말부터 시작된 경제난은 참으로 생소하기만 하다.  아직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경제난의 여파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이다.

특히 힘없이 쓰러져 가는 기업들과 마치 비만을 건강의 최대적이라며 고통을 감수하고 몸집을 줄여 가는 많은 사람들의 자기관리처럼 기업을 건강하게 하려면 몸집을 줄여야 한다며 구조조정에 열을 올리는 기업들의 몸부림은 필연적으로 실직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전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하는 실직의 고통은 그들의 삶의 의지마저 무너뜨려 가장(家長)으로서의 자기 역할까지 꺾어버려 그들을 거리로 내몰아 노숙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소외계층으로 이로 인해 가족해체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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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필자의 교회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목회를 하는 ㅂ목사님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분이 목회하는 지역은 도시지역이라서인지 필자가 미처 실감하지 못하는 현재의 심각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함께 공감하며 우리는 이렇게 사회적 현상 속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가 해야할 일을 이야기하던 중 ㅂ목사님은 우리 사회의 대응방식에 대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ㅂ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실직자들을 위한 대책을 교인들과 함께 준비하여 이제 실직자들을 위한 식당을 운영하기로 했단다. 그런데 시(市)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사회가 지금 우리가 당하는 경제적 고통을 받아들이기에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도의 경제성장은 물질적인 풍요에 익숙하게도 했지만 그 속에서 이기심도 함께 키워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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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어느 오후에 서재에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혀 귀에 익숙하지 않은 피아노 소리가 여리게 들려 왔다. 누군가가 교회에서 치는 소리인데 우리 교인들이 치는 소리 같지가 않아 교회에 나가 보았다. 어느 젊은 여자 분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분은 담임목사라고 필자를 소개하자 매우 당황해 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던 중에 그분의 남편이 들어왔다.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오는 길이라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역시 젊은 분이었다.

볼일이 있어서 이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고,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민박을 정했다고 했다. 생각보다 그분들의 체류는 오래되어 갔고 필자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알고 보니 사업에 실패를 하고 머리도 식힐 겸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텔레비젼 광고업을 하던 분으로 우리가 쉽게 볼 수 있었던 유명한 광고를 많이 제작했었는데 금번 경제난에 그만 사업체가 도산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교회에 출석을 했다. 언제부터인가는 새벽기도에도 참여를 해서 간절하게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의 차림새부터가 시골분위기에 전혀 맞지 않는 데다가 체류가 길어지면서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은 민박비조차 밀리고 식사까지도 해결을 못하고 있었다. 큰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가족은 그들의 식사를 돕기도 했다.
하루는 교인 한 분이 찾아와서 수상한 사람들이니까 목사님도 조심하시는 게 좋겠다는 주의를 필자에게 해주었다.

결국 민박비도 지불하지 못하고 집주인에게 수모를 당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필자의 주머니를 털어 민박비를 지급해 주고 그들은 어디론가 떠나갔다. 민박비도 지불하지 못하고 집주인에게 수모를 당하며 흘리던 눈물이 아직도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느 날 그렇게 떠나간 그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마음을 정리하고 익숙하지는 않지만 친구가 운영하는 타일가게에서 타일 나르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껏 남의 밑에서 일을 해보지 않는 데다가 육체노동은 처음이라 힘이 들지만 그래도 보람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필자를 만나면서 새롭게 사업이 바빠서 잃어 버렸던 신앙도 회복하였다면서 평생을 잊지 않겠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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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누구의 책임이냐?’ 하며 책임소재를 묻기조차 시대착오적이란 착각이 들 만큼 이 사회의 고통이 심각하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며 우리 교회의 역할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선교 1세기를 넘긴 한국교회는 사회의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성장을 거듭해 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기업처럼 자기 몸집을 부풀리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누기에 인색했던 우리 교회들은 교회 밖으로부터 교회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손가락질 당하게 되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사회가 당하는 이러한 고통 가운데에는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본다.

굶주려 있는 백성들을 보시고 이들의 요구와 필요를 아시고 먹을 것으로 이들을 채워주신 예수님(마 15:32~38)의 형태가 더욱 간절한 시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려움이 많은 이 시대는 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정신을 가득 담은 참된 선교의 기회로 활용해보자. 구원받은 성도는 사랑(요 13:34~35)과 순종(요 14:21)의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이 허하기만 한 가을 끝자락에서 사랑과 겸손을 통한 순종의 열매를 맺어보자.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