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지난 여름의 잔혹함을 생각해 보면 감히 풍성한 가을을 기대할 수 없었다. 기대 자체가 사치스러움이고 넘기 어려운 장벽 같아 보였다. IMF의 경제난에 찌들어 있는 우리의 가슴에 더할 수 없이 가혹한 시련이었다. 수마(水磨)가 할퀴고 간 그 자리에는 생명도 하나 없이 쓸려버린 듯했다.

그러나 이 허(虛)한 자리에 기적이 싹트고 있었다. 홍해를 가르던 그 기적보다 더한 웅장한 드라마가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도 생명은 이처럼 장엄한 기적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의 하나님은 이처럼 절망의 땅에 풍성한 감사의 조건들을 준비하고 계셨건만 우리의 닫힌 눈이 이것을 발견치 못하고 있었다.

가을은 목사관 뜨락을 두드리며 시작된다. 이른 아침 인기척이 지나간 뒤에 나서면 어김없이 감사의 결실이 드려진다. 소박하지만 풍성하고 고귀한 생명의 열매가 검은 비닐에 꼭꼭 숨어 부족한 필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닐을 열어보면 우리 인간이 견디어 낸 시련으로는 견주어 볼 수 없을 정도의 가혹한 시련을 견디고 인고의 덩어리로 응고된 열매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여과 없이 입을 통해 탄성으로 분출된다.
“아! 벌써 밤이 이렇게 소담스럽게 익었네.”
“아! 벌써 고구마를 캘 때가 되었네.”

이처럼 계절은 언제나 필자보다 저만큼 앞서서 달아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도 늘 한 두 걸음 뒤쳐져 쏟아놓고 만다. 타작을 위한 노동으로 흙범벅이 된 싸늘한 작업복을 다시 챙겨 입고 축쳐진 발걸음을 옮겨가는 성도들의 뒷모습에서 감당키 어려운 사랑의 무게를 발견한다.

나는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저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도 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오늘도 축축한 아침 안개를 걷어내고 살포시 내려앉아 휴식을 즐기며 따끈히 데워 놓은 해님의 미소 가득한 아침 뜨락엔 감사의 열매가 다시 풍성히 맺히고 있다.

이른 아침 아내가 황급히 부르는 소리에 뛰쳐나갔다. 조용히 필자의 손을 잡고 쓰레기장 한 모퉁이로 나를 인도한다. 그리고 아내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불그레한 빛을 띠고 있는 달걀 4개가 서로 기대고 있었다. 이미 여러 날 전에부터 이곳에 알을 낳기 시작했는가보다. 그 중에 하나는 금방 낳아 아직도 따뜻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너무도 감사하여 그것을 뺨에 대어보니 따뜻한 온기가 언 몸으로 전달되고, 끈적한 비릿내가 코끝을 자극한다.

지난 여름 이권사님이 알을 잘 낳을 것이라며 길러 보라고 폐닭을 놓고 가셨다. 멀리 달아날까 봐 비닐 끈으로 발목을 묶은 채 마당 한 모퉁이 나무에 매어 놓으셨다. 얼마 뒤 묶인 모습이 애처로와 끈을 풀어주려 했더니 비닐 끈이 살을 파고 들어가 상처가 심하였다. 얼른 풀어주었지만 그 이후로 닭은 한 쪽 다리를 절며 다녔다.

우리 식구는 그 닭의 이름을 ‘꼬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 식구로 정식으로 인정했다. 우리 부부와 아들 둘 외에 우리 식구는 4식구가 더 있다. 철배(진도개), 토돌이(토끼), 복돌이(강아지), 그리고 새로 이사온 꼬숙이까지….

지난 여름 비오는 날 12마리의 새끼를 낳고 힘에 겨워 죽어간 토순이의 빈자리가 늘 서운했었는데 이제 꼬숙이가 허한 자리를 메꾸어 줄 것 같았다. 그러나 묶인 끈을 풀고 난 뒤부터 꼬숙이는 아내와 긴장관계가 되었다. 깨끗이 청소한 뜨락에 아침이면 어김없이 똥을 싸는 꼬숙이는 빗자루로 얻어맞기 일쑤다.

필자가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오면 제일 먼저 꼬숙이가 반겨준다. 꼬옥꼬옥 소리를 내며 필자의 바짓가랑이를 쪼며 발에 밟힐 듯 걸음을 방해한다. 아마도 이러한 행동이 꼬숙이가 필자를 향한 애정표현일 것이다. 철배(진도개), 토돌이(토끼), 복돌이(강아지)까지 자신들만의 표현법으로 애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꼬숙이가 낳을 것이라던 계란은 소식도 없고 이리저리 발에 밟힐 듯이 우리 가족의 발걸음을 참견하여 미움을 받아오던 꼬숙이가 오늘 아침 이처럼 귀한 결실로 우리 가족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아내가 입을 연다.
“참으로 감사하네요. 알을 못 낳는 주제에 뜨락에 똥만  싸는 꼬숙이가 얄미워서 발로 차기도 하고, 빗자루로 때리기도 했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열매 없는 우리의 삶을 보시며 이처럼 발길질과 몽둥이질을 하셨다면 온전한 인생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에요.”

너무 꼬숙이가 대견스럽고 고귀하여 아깝게만 여기던 쌀을 한 움큼 가져다가 꼬숙이를 부르니 이내 필자의 손을 간지리며 열심히 쪼아먹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꼬숙이에게 주는 쌀이 아깝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열매로 풍성할 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실 텐데….

오늘도 필자의 뜨락엔 감사가 넘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