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어느 날, 새벽예배를 위해 강대상에 올라가니 네모난 모양으로 접어 세울 수 있는 검은색 예쁜 거울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더욱 깔끔한 예배를 위해 자신을 비춰볼 수 있도록 놓은 모양이다. 작은 것이지만 만져 보고, 세워 보고, 접어보고 하다가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쳐다보게 되었다. 문득 먼 뒤편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던 기억 하나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잠시 생각에 젖게 하였다.

하늘아래 첫동네 영월 지역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교회에 부임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교회규모에 비해서 꽤나 큰 거울 하나를 발견하였다. 어느 기관의 이름이 금색으로 서투르게 적혀 있는 것을 보아 교회 창립 당시에 접수된 선물인 듯하였다. 그러나 교회 모양과 규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탓인지 구석에 성의 없게 걸려 있는 것으로 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듯했다.

그 거울은 금새 나와 친숙해질 수 있었다. 우선은 내 몸 전체를 다 비추어 볼 수 있음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 산골까지 달려온 나의 모습을 비쳐보고 있노라니 내면 세계까지 투영되는 듯하여 잘 보이는 곳에다가 걸기로 했다. 강대상에 서서 이리저리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문득 강대상 정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예배시간에 나의 자세를 살펴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제스처를 점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언젠가 어느 선배 목사님께서 자신의 설교 원고가 완성되면 거울 앞에서 꾸준히 설교 연습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터라, 미리 거울 앞에 서서 준비는 못할지언정 예배를 진행하는 나의 모습을 살펴보고 태도에 대한 교정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강대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거울을 걸었다.

강대상에서 교회 뒤편 거울까지의 거리가 내 걸음으로 열 걸음 남짓한지라 또렷하게 필자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특별한 의미 없이 정면에 걸어둔 거울은 그 뒤에 참으로 친밀한 동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단순히 나의 모습을 비춰주는 역할을 넘어 대화의 상대가 되었고 급기야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많아야 10명, 평균 5~6명이 드리는 예배가 젊은 혈기를 가진 필자에게 힘 빠지게 하는 때가 많았다. 오랜 세월 산골동네 사람들의 삶과 함께하던 토속종교와의 갈등, 그리고 무언의 배타성 때문에 선교는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고추 추수기가 되면 이 동네는 가장 바빠진다. 동네 사람들은 어두운 새벽에 밭에 나가 어두운 밤이 되어야 집에 돌아온다. 그래서 이때엔 사람을 만나려면 밭으로 찾아 나서야만 했다. 이때가 되면 필자는 밭두렁 심방에 더욱 바빠진다.

이처럼 바쁜 어느 주일날, 마침 필자의 아내와 아이들은 집안의 큰일이 있어서 부득이 집을 떠나야 했다. 새벽부터 온 동네가 텅 빈 듯했다. 새벽예배도 혼자 드려야 했고, 아동부 예배는 겨우 2~3명이 드렸다. 주일 낮 대예배 시간이 되어 종을 치고 기다렸지만, 교회 마당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그렇게 혼자서 예배시간을 30분 넘겨 작심을 하고 강대상에 섰다.

거울과 나만의 예배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은 공허감이 더했다. 예배순서에 맞추어 혼자 예배를 드려 나갔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찬송하고, 혼자 교독문을 낭독하고…. 이제 설교시간. 본문을 낭독하고 아무도 들어줄 사람은 없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점차 설교는 힘을 잃어갔다. 어느새 뜨거운 액체가 시야를 가려서 원고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대한 꿈을 안고 시작한 목회였는데…. 깊은 산골 초라한 예배당에서 한 사람의 교인도 없이 혼자서 예배를 드리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을 못해봤었다.

이내 서러움이 복받쳤다. 설교는 어느덧 절규로 변했고, 탄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희뿌연 시야 사이로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함께 울고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강대상 뒤편에 걸어둔 거울 속에서는 또 다른 내가 힘차게 설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덧 그는 나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교회는 결코 텅 비어있지 않았다. 성령의 감동이 넘치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그날 아침, 필자는 생애 가장 감동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거울 속에 비친 또 다른 나의 모습은 이미 내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원대한 미래를 가득 담은 새로운 가능성의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가르침

그리고 또 하나의 가르침을 내게 전해 주었다. 비록 내가 준비한 설교이지만 우선 내게 은혜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또 다른 내가 은혜 받지 못하는 설교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설교는 우선 자신에게 충실해야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먼저 해야하지 않을까?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