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씨뿌리는 자의 기쁨

자기 몸 하나 잘 거두지도 못하시는 86세의 한 권사님이 검은 비닐봉지에 무엇인가를 담아 가지고 오셨다. 그러면서 아주 죄스러움이 역력한 몸짓으로 부끄럼 많은 새색시처럼 몸을 반쯤 돌린 채 고개를 숙이고는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건강하면 교회주위에 뺑 돌려 심으려 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으니 목사님께서 시간이 나시는 대로 심어 드세요” 하며 그 검은 비닐 봉지를 출입문 옆에 놓고 종종걸음으로 돌아가신다.
“권사님! 뭐예요?” 하며 그 걸음을 세워볼 참으로 물어보니 “찰 강냉이예요. 심궈놓고 애들 따먹게 하세요” 하며 재차 걸음을 돌리신다.

이미 권사님은 우리집 마당의 손바닥만한 텃밭을 그대로 놓아 두시지 않고 감자도 심어 놓으시고, 고추모도 열대궁 정도 놓고 가셔서 그것을 감자 옆에 필자가 심어 놓은 뒤였다.
적어도 한 됫박은 됨직한 옥수수는 흰색뿐 아니라 자주색도 군데 군데 섞여 있었다. 권사님 말씀대로 교회주위에 뺑 돌려 심은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비가 촉촉히 내린 어느 날 호미를 들고 나서는데 큰아들 솔이가 따라 나선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심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필자가 앞에서 비에 촉촉히 젖어 적당히 물을 머금은 땅을 적당한 간격으로 파놓으면 솔이가 그곳에 옥수수를 4∼5개 떨어뜨려 놓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뒤에 둘째 아들 찬이가 달려와 자신도 거들겠다고 해서 제법 손발이 맞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앞에서 필자가 땅을 파놓으면, 큰아들 솔이가 옥수수 씨를 떨어뜨려 놓고 그 뒤를 따라 작은 아들 찬이가 손으로 흙을 덮어 나가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그래서 교회주위를 돌아가며 담을 치듯이 옥수수를 심어 갔다. 뒤돌아보니 긴 사선처럼 우리들의 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일을 마친 뒤 며칠이 지나선가 학교에서 돌아온 솔이가 소리를 치며 아빠를 불러대서 나가보니 어느덧 며칠전에 심어놓은 옥수수가 흙을 밀어내고 새싹을 틔어 빼곡히 고개들을 들추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얼마 뒤 달려온 찬이도 신기한 듯 한참을 동경의 눈으로 옥수수 새싹들을 바라보았다. 찬이는 계속해서 믿기지 않는 듯 “아빠! 이것 우리가 심은 것 맞아?” 하며 묻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심은 씨앗이 새싹을 틔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이들에게는 그저 신기한가 보다.

교회주위를 돌아 새파란 선명한 선이 경계를 만들어 놓았다. 필자에게도 이처럼 큰 기쁨인데 아이들에게는 어떨까? 참으로 좋은 산 교육의 현장이 바로 우리집 주위에 널려 있음은 아마도 우리 아이들이 누리는 해택이 아닌가 싶다.

필자는 아울러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설명할 수 있었고 아이들은 의외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끈질긴 생명력

이처럼 경외감에 휩싸여 즐거워하는 우리에게 아내가 비닐봉지 몇개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가정이 이곳 능암으로 이사오던 해에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던 케일과 비트씨였다. 그 해에는 이사한 초기라 차마 이것을 돌아볼 겨를도 없어서 그 해를 묵히고 나니, 그곳에 과연 생명이 남아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하여 차일피일 3년을 묵혀온 씨앗들이다.

너무 오래 묵힌 것이라 필자는 그냥 내어 버리라고 했지만 아내는 한번 심어보자는 것이다. 옆에서 있는 아이들도 덩달아 그 씨앗을 뿌리자고 성화다. 할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적당한 공간을 찾아 씨앗들을 뿌려 보았다. 심으면서도 이곳에서 새싹이 나리라는 기대는 추호도 없었다. 아직까지 그곳에 생명이 남아있으리란 기대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의 기대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이렇게 씨를 뿌려 놓고 난 뒤에도 필자의 예상대로 그곳에서는 새싹이 움트질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초초한 듯 매일같이 그곳을 들여다 보며 새싹이 나기를 고대하는 눈치였다. 어쩌다가 필자를 불러 세워 새싹이 나왔다고 해서 보면 그것은 작은 잡초였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 약 이틀 동안 잔잔한 봄비가 대지를 적시고 난 뒤라 땅은 촉촉히 물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아내가 소리쳐 불러서 나가보니 아주 촘촘히 새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위에 흙더미를 이고 있었다. 이곳저곳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땅을 헤쳐보니 무수한 새싹들이 대지를 박차고 경쟁이라도 하듯이 머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새로운 기쁨에 휩싸였다. 놀라운 창조의 세계에 대한 경외감으로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없이 웃고 있었다.

생명의 신비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3년이상을 어두운 구석에 쳐박혀 말라버릴 대로 말라버린 그 씨앗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고귀함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지나친다. 지나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무수히 파괴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호흡과 생명이 존재함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의 오만방자함은 극에 달하고 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것처럼 인식하는 잘못된 창조관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땅은 투기의 대상이 아닌 생명을 잉태하는 하나님의 호흡이 왕래하는 창조의 공간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자연에 대해서만 잘못된 생명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듯싶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생명경시 풍조는 누구의 책임인가?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통한 잠재된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 또한 그들은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음을 ….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