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군을 여읜 지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도 두 번쯤은 변했을 것 같은 길고 험한 세월이었다. 한국 기독교장로회 장경환 목사의 사모. 그러나 나의 신분을 지켜주었던 그가 없는 상황에서 나는 어김없이 사모가 아닌 과부에 지나지 않았다.
무관심한 교회와 냉정한 현실과 싸우며, 남편 없는 설움을 떨쳐 버리고자 야생마처럼 앞만 보고 질주해온 나날이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이 뛰어야 했다.

간섭받지 않고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더 많은 부담을 안고 조심스럽게 살아야 했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최선의 자기 보호’라는 생각 아래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편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홀로된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하면 하와를 통해 유혹의 손길이 뻗어갔듯이 마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비단 마귀의 짓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세상으로 하여금 탈선의 다리를 놓도록 유도하는 셈이다.

홀사모 중에서도 주변의 주선에 떠밀려 재혼을 서둘렀다가 얼마 되지 않아 겹상의 불행을 당한 경우가 종종 있다. 마음이 여려진 상태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지기 쉽고, 따라서 실수를 범하기도 그만큼 쉽다. 첫 번째 당한 아픔은 불가항력이라는 동정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후로 발생되는 실수는 되물리기 어려운 고통을 담보로 한다.

내게도 재혼의 손길은 끊이지 않았다. 친정 어머니가 누구보다 적극적이었고, 홀로된 목회자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혼자서 찾아가시는 때도 있었다. 말끝마다 내 귀를 때리는 재혼 이야기는 가혹한 고문과도 같았다. 목회를 하다 사모와 사별한 목사님의 청혼을 받은 적도 있었다. 처지가 비슷하다보니 남은 인생을 서로 위로하며 목회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릎 꿇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독생하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피할 길이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셨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도록 최후의 권한을 아버지께 돌려 드렸던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깊은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나는 남편 목사님과 함께 받은 사명을 이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다른 사람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도 좋지만 자녀들이 따라주기만 한다면 내 한 몸은 희생되더라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힘껏 일하리라 다짐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결심을 환영하셨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도록 좌우에 파수꾼을 항상 세워 주셔서 힘이 부족할 때에는 부축해 주시고, 넘어지더라도 일어서도록 도와주셨다.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얼굴에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로 맺혔듯이 내 연약한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한밤을 두렵게 만들었던 큰 산도 한 품에 품을 수 있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홀사모의 무릎으로 홀사모 수양관/홀사모 선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홀사모 수양관을 개관하면서부터 철이 조금씩 들어갔다.

뒤늦게 되찾은 나의 이름 홀사모. 이제부터 나는 홀사모 외에 갖고 있던 여러 가지 직함을 다 내려놓고 홀사모로 돌아가 일하기로 다짐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남편이 지켜온 자리라는 집착을 버리지 못한 까닭일까? 좀처럼 홀사모라는 처지를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보다는 목회자로 존재하고 싶었다.
아직도 홀사모가 목회자들의 영역을 넘보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낮도 밤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통을 붙잡고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누다보면 어느새 아픔이 반으로 줄어든다. 또한 그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기도의 조력자로서 그들에게 용기와 새 힘을 주게 되어 무엇보다 뿌듯하다.
아직도 목회자의 죽음을 사모의 죄값인 양 음지에서 숨 죽이며 생활하고 있는 홀사모가 있으면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나자. 그리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명자로 다시 태어나자.


이 에스더 사모(홀사모 수양관장)
연락처: 02-391-3591
http://www.holsam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