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현대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지만 한편으론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있는데도 아까워하는 마음은 없는 듯하다. 그렇게도 약삭빠르고, 계산에 밝은 현대인들이라지만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것은 뭔가 모순이다.

하기야 필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두그룹이지 뒤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늦게나마 무심코 빼앗기고 있는 나의 소중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되찾아 가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 동안 필자가 무심코 잃어가던 소중한 것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자가용과 시간

처음 차를 얻게 되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걷는 수고가 줄어들었고, 차시간을 맞추느라 허둥대던 수고 또한 덜게 되었고, 나의 스케줄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 이 또한 자가용이 가져다준 자유였다.

하기야 영월땅 첫 목회지에서 어쩌면 자가용은 나에게 꼭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었다. 마을까지 하루 두 번 운행하기로 되어있는 버스가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으니 처음으로 타게 된 10년 넘은 중고 포니Ⅱ는 우리 가족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기쁨이었다. 고장수리로 많은 지출이 불가피했지만 우리에게도 차가 생겼다는 기쁨에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이 차에 온 가족을 태우고 자랑스럽게 처가도 방문하고 고향집도 찾았다. 모두가 근래에 보기 드문 골동품이라서 씁쓸하게 기쁨을 함께해 주었다. 어떠한 비싼 차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걷는 수고를 덜었다라고 하는 안도감 이상은 아니었다.

새로운 목회지인 능암교회에는 승합차가 있었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기쁨이었다. 우리 아이들의 기쁨은 더욱 컸다. 좁은 차에 시달리다가 넓은 차를 타게 되니까 더욱 신나는 모양이다.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우리 교회 승합차가 제일 비싸고 좋은 차인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간에도 세상은 많이 변하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늘어나는 차량으로 시골에도 구석구석이 주차장으로 변하고 있다. 처음 우리가 차를 갖게 되었을 때는 어디를 가든지 차를 끌고 다녀야 했다. 어느덧 가까운 거리도 차 없이는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마약과 같았다.

이렇게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기 시작했다. 도로사정으로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가책도 없었다. 마치 자가용을 가진 사람의 특권인양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언젠가는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차를 몰고 갔던 적이 있었다. 약속시간을 충분히 계산하고도 여유있게 출발을 하였다. 시골길을 벗어나서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이미 차는 막히고 있었다. 겨우 고속도로를 벗어나 서울 톨게이트에 들어섰을 때 이미 약속된 시간은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서울지리도 서툰데다가 복잡한 차량행렬을 비집고 다니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넓은 시골길에만 익숙한 나에게 서울운전자들의 운전은 가혹하기만 했다. 나에게 어떠한 여유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시간을 훨씬 넘기고서야  약속장소 근처에 도착했지만 새로운 장애가 도사리고 있었다. 빌딩 주차장에 들어서며 필자는 어마어마한 주차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골목길을 뒤지고 다녔지만 시골구석에서 올라온 필자를 위해 예비된 주차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다 보이는 공간에는 이미 콘크리트 덩어리로 막아 놓았고 시뻘건 글씨의 주차금지 간판이 서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존심 상하는 글씨를 벽에 써 놓아서 감히 주차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했다. 결국 헤매고 헤매다가 빌딩 주차장에 비싼 값을 치르고 차를 주차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장소에 가보니 이미 회의는 끝나고 파한 상태였다. 중간에 어디서도 전화 한 통화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니 함께 모이기로 했던 동료들은  필자의 이러한 절박한 상황을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발길을 돌려서 내려오는 길은 여전히 막히고 있었고 몸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안도감이 들면서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고 잠깐사이 졸음운전으로 대형사고까지 초래할 뻔했다.

결국 그 다음부터 멀리 타지역을 방문할 때에는 터미널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필자에게는 새로운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유스럽고, 보고싶은 책도 읽을 수가 있었고, 피곤하면 마음놓고 졸 수도 있었으며 시간과 비용까지도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가 편리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기계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얽여서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스스럼없이 헌납하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전과 대화

언젠가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아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 보니 큰아들 솔이의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언젠가 솔이에게 “엄마, 아빠 집에 계시니?” 하고 물으니 솔이의 대답이 “엄마, 아빠 지금 텔레비전 보고 계신걸요” 하더란다. 그러면서 아내는  솔이의 담임선생님이 우리 부부를 어떻게 생각하시겠냐는 것이다. 솔이의 부모는  매일 텔레비전 앞에서만 붙어사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내 아내의 제의로 필자는 우리 가족의 일과를 점검해 보았다. 필자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6시가 되면 아침종합뉴스에 시간을 빼앗긴다. 학교를 가기 위해 조금 늦게 일어난 아이들은 아침 유아프로그램에 정신을 빼앗긴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학교를 가면 잠깐이긴 하지만 아내는 아침드라마를 즐긴다.

오후 5시가 되면 필자는 아이들과 채널 싸움을 서슴치 않는다. 필자는 뉴스를 보아야 하고 아이들은 만화영화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7시가 되면 필자는 뉴스를 보아야 한다. 식사시간에도 우리 식구들은 텔레비전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9시가 되면 필자는 다시 뉴스를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나면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고 필자는 예배준비를 위해 서재로 들어가야 한다.

언제나 스스로 필자 자신을 좋은 아빠, 좋은 가장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이들과의 대화의 시간과 함께 노는 시간이 거의 전무함을 알게 되었다. 좋은 아빠, 좋은 가장이기는커녕 빵점짜리 아빠요 가장인 것이었다. 우리 가정의 대화와 교제의 시간을 텔레비전에 온통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교인들 가운데서도 텔레비전 때문에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많이 느꼈었다는 고백을 자주 듣게 된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많은 가정들이 우리와 같이 텔레비전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많은 볼거리와 빠른 정보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손익계산을 따져볼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의 소중한 시력과 정신적인 건강을 빼앗아 간다. 화목한 대화를 빼앗아 간다. 가족만의 포근한 공간에 기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며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아내와 함께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매주 수요일은 텔레비전을 켜지 않는 날!” 늦은  감이 있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텔레비전에 빼앗긴 우리의 주권을 회복해야 겠다는 절박한 생각에서였다.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때때로 절박한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현대의 물질문명은 너무도 달콤한 독으로 우리의 자리를 차고앉아서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게 한다.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야 할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