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가을이 깊어 갈수록 농촌교회의 목사관은 황금들녘의 축소판인 양 날로 풍성해진다. 아침마다 소리없이 놓여진 목사관 앞의 풍성한 결실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이 결실들이 맺힐 때까지 봄부터 이제까지 얼마나 무수히 하늘을 바라보았으며, 얼마나 긴 한숨도 많았고, 얼마나 육체의 한계와 싸워 왔을까?

이제 이 결실들이 감사의 표현으로 목사관 앞을 채워가고 있다. 어느 때에는 농산물 가게를 방불케 한다. 쌀부터 시작해서 고구마 땅콩 온갖 푸성귀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풍성히 쌓인다.

언젠가 선배 목사님이 필자에게 “농촌교회 목회하기 힘들지?” 하고 물으셨다. 그 때 필자는 “목사님, 햇쌀밥 잡숴 보셨어요?” 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선배 목사님은 소리없이 웃으시며 필자의 말의 의미를 깨달으신 듯 고개를 몇 차례 가로저으셨다. 그리고는 “맞아! 아직도 시골목회에는 정이 남아있지. 나도 시골목회 할 때가 있었지” 하시며 잠시 회상에 잠기시는 듯했다. 김서린 윤기 가득한 햇쌀밥에는 세상의 어떤 빛깔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운 빛이 가득하고, 입에 담아 몇 차례 김을 불어내고 나면 그대로 녹아버린다.

목사관 앞을 채우는 수많은 정성들은 바로 감사의 표현이기에 더욱더 소중하다. 뜨거운 물에 살짝 뒤쳐 물기를 꼭 짜서 당신의 주먹 크기만하게 덩어리를 만들어 비닐봉지에 소중히 담아 오시는 노(老) 권사님의 나물에서부터 막 방아를 찧어 방앗간에서 바로 차에 싣고 목사관에 먼저 들러 내려놓는 쌀가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그 정성은 한결같다.

감사가 가득한 가을 들녘, 그리고 감사가 가득한 교회, 그 속에서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는 농촌 목회자의 삶 또한 높고도 선명한 가을 하늘만큼이나 감사의 크기가 높아만 간다.

메뚜기 잡이와 감사

지난 주 교회학교에서는 매달 한 번씩 주일 오후에 하는 2부 순서를 특이한 내용으로 채웠다.
오후가 되자 아이들이 저마다 조그마한 양파자루들을 손에 들고 모였다. 바로 메뚜기 잡이를 가기로 한 것이다. 가을 들녘을 마음껏 누비는 동심, 그 속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도 담고 있으니 얼마나 풍성한지요.

농약 없는 권사님과 집사님의 논은 그야말로 메뚜기 천지였다.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달아나는 메뚜기들을 잡아내느라 진땀을 흘리는 동심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선물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중학생이 된 성우도 들고 있는 병에 메뚜기들을 모아 들인다. 작은 병 입구를 들어가지 않으려고 연약한 뒷발로 메뚜기들은 버티어 보지만 성우의 솜씨는 속도를 더한다. 꽤 오랫동안 잡아들인 메뚜기를 성우가 들고 자신들의 노력이 자랑스러운 듯 성우의 주위를 떠나지 못하며 서로 얽히는 발걸음도 아랑곳 않고 돌아오는 아이들의 표정은 마치 만선의 기쁨으로 돌아오는 고기잡이 배처럼 당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잡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다음에는 요리하는 순서가 남았다. 교회 뒷편에는 이미 야외용 가스렌지가 준비되어 있었고, 자그마한 솥과 양념이 준비되어 메뚜기  볶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로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말도 많고 사공도 많았지만 어느덧 노릇노릇 빛깔 좋게 먹음직스럽게 익어 있었다. 감사의 기도를 마치고 먼저 한 마리를 집어 올려 담임 목사의 입에 넣어주는 동심들…. 미처 무슨 맛인지도 모르게 입에서 녹아내리기 무섭게 이미 교사들에게 한 마리씩 돌아간 메뚜기는 아이들의 쟁탈전이 되고 만다.

모두가 돌아간 뒤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내다 보니 큰 아들 솔이가 솥 바닥에 남은 메뚜기의 다리를 긁어 먹느라 정신이 없다. 뒤에 서서 솔이에게 “그렇게 맛있니?” 하고 물어보니 솔이는 고개만 끄덕이다가 수저에 무엇인가를 담아 내 입에 갖다 댄다. 그 속에는 기름 찌꺼기와 함께 메뚜기 다리가 몇 개 눈에 띈다. 그냥 밀쳐내 솔이의 입 근처로 가져가자 널름 입 속에 넣고는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오물거린다.

풍년을 주신 이유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 더욱 풍성하다. 말 그대로 대풍이다. 집집마다 예년에 비해 몇 가마씩은 더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쌀알들도 애진엄마의 과장섞인 표현대로 손톱만할 정도로 영글기고 잘 영글었다.

얼마 전 가을 산행(山行)을 교인들과 함께 떠났었다. 당연히 대화의 주제는 올 가을의 풍년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마다 자신들의 소출을 자랑하며 이야기 꽃을 피워갔다. 문득 자신들의 대화 속에서 필자가 소외된 듯한 기분이 들었던지 권사님 한 분이 필자를 자신들의 대화 속으로 끌어 들리려 “참! 하나님 은혜가 감사해요” 하며 이야기의 몫을 필자에게 던진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함께한 필자는 세계적인 상황을 이야기했다.

사상 유례없는 세계적인 이상 기온과 자연재해…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된 흉작…. 또한 북녘 땅을 뒤덮은 사상 유례없는 가뭄과 흉년… 그리고는 필자는 혼잣말처럼 한 마디를 던졌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 나라에게 특히 남한에게만 이처럼 대풍(大豊)을 주신 까닭이 있을텐데…”

그리고는 산행을 계속했다. 기다리던 식사시간이 되었다. 식사 대표기도를 권사님에게 시켰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올해에 이처럼 대풍을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대풍을 우리만 누리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에게만 이와 같은 풍년을 허락하신 것은 분명한 뜻이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 뜻은 함께 나누라고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도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 북한 동포들과, 또한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들과 이 풍성함을 함께 나누게 하옵소서…”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