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고기반 물반 - 어라연

영월땅에는 어라연이라는 명소가 있다. 필자가 영월에서 목회할 때에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경치의 수려함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어라연은 순수 우리말로 ‘고기반 물반’이라는 뜻이란다.

우선 이 곳은 그나마 사람들의 손길을 덜 타서 훼손이 적다. 그러기까지는 이 곳의 불편한 교통편도 한 몫을 한 듯하다. 필자가 목회를 하던 문산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산을 넘어 약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라연은 남한강의 원류인 동강줄기를 거슬러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묘한 기암괴석으로 자신의 모습을 갖추고 강 한가운데 터를 잡은 작은 돌섬이다. 그래서 이 섬에 들어가려면 나룻배를 타야만 한다. 이 곳의 전설을 한몸에 안고 살아가는 넉넉한 뱃사공 할아버지의 인심과,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수많은 전설 또한 그 아름다움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라연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맑고 수려한 주변 경관이다. 맑은 물은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정도이다. 너무 맑아 사람들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듯한 바닥의 고운 모래와 자갈이 바로 코앞에 손이 잡힐 듯하여 물에 뛰어들어 보지만 수길 깊이에 아찔할 정도이다. 그리고 강 양편으로 마치 수문장처럼 둘러싼 가파른 바위산과 숲들의 조화 또한 빼어나다.
이 곳을 찾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말로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또 찾고 싶은 곳이다.

공존의 삶을 간직한 어라연

먼저 영월 문산교회 교인을 통해 들은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필자가 영월땅에 부임하기 몇 해 전에 이 어라연을 즐겨 찾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무원으로 아마도 세상살이 묻어지는 온갖 잡스러움들을 이 곳에서 씻어버리고 싶지 않았겠나 추측해 본다.

어느 날 이 사람은 홀로 이 어라연을 찾았고 그 곳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정선땅에는 아마도 많은 비가 왔었던가 보다. 그리고 나중에 이 곳에도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류에서 불어난 물이 순식간에 어라연 주위를 덮쳐 이 곳을 빠져나가기에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는 뱃사공 아저씨도 없었고, 자신이 이 곳에 들어온 것을 밖에서 알지도 모르겠고, 물은 자꾸만 불어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도 점점 줄어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배낭과 자신의 몸을 겨우 확보할 정도의 공간만이 남아 절대절명의 위기에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 좁은 공간에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처절할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뱀, 개구리, 온갖 곤충들이 생존을 위해 이 좁은 공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적관계에 있는 이들이었지만 서로 해하려고 하지 않더란다. 이 작은 공간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공존공생의 장소였다. 그 공무원도 평소같이 그들이 더럽다거나 징그럽다든지 하는 생각도 없이 한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한다. 나중에 동료 공무원의 도움으로 헬기를 통해 구출되었는데 이 사람은 아마도 이곳을 통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세범이의 눈물

이러한 숱한 아름다움과 전설을 담고 있는 이 곳을 세범이네가 찾은 것은 지난 달이었다고 한다. 세범이는 초등학교 1학년으로 서양화가인 아버지와 동양화가인 엄마 그리고 5살짜리 여동생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사는데, 함께 이 곳을 찾은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필자는 세범이 아빠와 아주 친한  사이다. 세범이 아빠는 필자가 영월에서 목회할 때에도 그 깊은 산중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격려와 힘을 주는 분이다. 일찍이 필자가 영월에서 목회를 할 때 우리교회를 방문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어라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세범이 아빠는 이번 기회에 가족을 다 데리고 이 곳을 찾은 것이었다.

그런데 세범이 아빠가 서둘러 이 어라연을 찾은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개발의 손길이 이 곳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 곳에는 영월댐이 세워질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이 어라연은 그 숱한 신비와 아름다움을 이 물속에 묻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 이상의 산길을 이 두 아이는 거침없이 달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은 그야말로 아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때묻지 않은 수많은 돌자갈과 모래들, 서러우리만치 투명한 맑은 물, 신비한 돌섬, 그리고 이 곳을 내려다보며 입을 우물거리는듯한 양편의 가파른 산…. 이 모든 신비가 특히 아이들에는 더욱 정감으로 다가오는 듯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비가 주는 그 감동 그대로 몸을 맡겨두면 그것으로 족하다. 감탄사도 입언저리에서 도는 경망스런  외침이 아니라, 쏟아 놓는 감동의 깊이가 깊어 그냥 삼키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신비의 세계에서의 2박3일을 보낸 세범이네는 이제 이 곳을 떠나야 했다. 떠나기 전에 세범이 아빠는 이제 어라연이 겪어야 할 수난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고 한다. 영월댐의 건설로 사라지고 말 어라연의 운명을….

그리고 그렇게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단다. 그런데 세범이는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엄마, 아빠의 재촉에 아랑곳하지 않더란다. 다가가 그를 바라본 세범이의 엄마,  아빠는 찡한 감동을 나누어야 했단다.
그 자리에 그렇게 서서 세범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없어져야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논쟁은 지금도 우리 주위를 시끄럽게 한다. 나름대로 각자의 주장에 정당성이 있어 늘 팽팽하기만 한다. 그러나 시름과 아픔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을 그렇게 쉽게 파괴하고 소멸시켜 버려서는 안 되리라 생각해 본다. 지금도 영원히 그 역사를 소멸시켜가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세범이와 같은 순수한 사랑으로 흘리는 그 눈물들을 어떻게 씻어 주고 보듬어야 할 것인가?

지금도 필자가 앉은 서재에서는 멀리 중장비의 파괴음이 소름끼치게 들려오고 있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