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문화적으로 소외된 시골에서 살면서도 구김살 없이 자라 주는 아이들에게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그러면서 가끔씩은 아빠라고 아이들과 제대로 한 번 놀아 주지도 못함에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적인 업무이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아빠에 대한 기대감을 적당히 저버려도 되는 양 살아온 필자는 문득 아이들의 성장을 바라보며 우리 아이들이 아빠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한 날들도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아이들에게도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중압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적어도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원망은 듣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과 고민을 하다가 문득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여름 휴가를 잘 활용하면 그 동안 진 빚을 한꺼번에 청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쁜 와중이지만 아이들과의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매년 철지난 바닷가를 찾아 해수욕도 한 번 못 해 보고 돌아오던지, 아니면 정선의 깊은 계곡을 찾곤 했었다. 당연히 농촌 산골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흥미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휴가를 가더라도 다른 목회자 가족들을 만나 어른 따로 애들 따로의 시간을 보냈었다. 돌이켜보니 이것은 아이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횡포였다. 그래서 솔이와 찬이를 모아 놓고 아이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올해 휴가는 어디로 갔으면 좋겠니?”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들은 “서울이요”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의 휴가의 목적지는 결정이 되었다.

텅빈 서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날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는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과 준비를 서둘러 휴가길에 올랐다. 기분좋은 출발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로가 주차장인양 늘어서 있었지만 우리 차는 거침없이 내달릴 수가 있었다.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서울지리에 서투른 탓에 서울 근교의 외가댁에 차를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서울에 들어서니 언제나 느끼던 서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텅빈 서울…. 그곳을 활보하는 우리 가족에게 무더위는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첫 번째 방문지는 아이들의 요구로 야구장을 가기로 했다. 지하철과 에스컬레이터는 아이들에게 큰 기쁨이었다.
말로만 듣고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보던 잠실 야구장의 위용은 아이들의 즐거움을 한껏 높여 주었다. 어느덧 해는 지고 대낮 같은 밝은 조명을 받으며 푸른 잔디 위에서 뛰는 선수들의 운동복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열광적인 응원과 짬짬이 지나다니는 장사꾼들을 통해 주어지는 간식들은 이미 아이들을 무아의 지경에 이르게 했다. 거기에다 운이 좋아 파울볼을 하나 얻게 된 찬이는 생애 최고의 날인 듯했다.

그러나 즐거운 것은 아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열광적인 분위기에 빠져 열심히 소리지르며 응원을 하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필자는 아내가 말은 안했어도 그 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꽤나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필자에게도 즐거움이었다. 외가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세상 모르고 잠에 취했지만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알라딘’이라고 하는 이이스쇼를 보기로 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큰 지출이지만 아끼지 않기로 했다. 올림픽공원내의 여러 체육관과 잘 정리된 조경 또한 아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

아이스쇼는 역시 환상적인 연출로 아이들의 감정을 사로잡고 있었다. 쇼 중간에 알라딘이 악마에게 잡혀 사슬에 묶여 구원을 호소하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틈엔가 큰 아들 솔이는 쏜살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알라딘에게 달려가서 그의 묶인 사슬을 풀어주고 왔다.  극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연출의 하나였지만 많은 아이들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솔이는 지체함이 없었다. 솔이에게서 우리 부부는 투철한 정의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솔이에게 잠재되어 있는 정의감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분명히 확신하건데 그의 자연과 함께 하는 시골 생활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다.

피자보다 밥이 좋은 아이들

돌아오는 길에 점심때도 되고 하여 아이들에게 점심은 무엇을 먹고 싶은가 물어보았다. 마침 커다란 피자집을 지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피자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에게 피자는 단순한 호기심임을 우리 부부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가게에 간 아내는 가족용이라고 가장 큰 피자 하나를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잘라 아이들에게 한 조각씩 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표정은 이내 찌그러지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피자의 맛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조각도 제대로 먹지 않고 피자에서 손을 떼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두워 있었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