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목사 / 능암교회 담임

잔잔한 변화들

큰아들 솔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가정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생활리듬부터 솔이의 학교생활에 맞추어야 했고, 큰 부담은 아니지만 교육비의 지출 그리고 솔이에게는 많은 부담이 되겠지만 그에게 집중되는 관심 등 여러 가지 잔잔한 변화가 우리 가정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의 아내는 아쉬움이 많은가 보다. 무엇보다도 도시 아이들처럼 교육의 기회를 많이 주지 못했던 것을 가장 가슴 아파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흔한 학원 한번 다녀보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 녀석이 걱정스럽기도 하면서 부로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 반성도 하게 했다.

언젠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토론의 자리에서 필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학교에 입학한 솔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곳에 함께 토론하던 사람들은 기이한 듯 우리 부자를 희귀한 골동품 정도로 취급하여 당혹스러웠던 적도 있다.

강원도 영월 산골에서의 유아기, 그리고 이곳 농촌에서의 유년기 등은 우리 솔이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우리 부부가 하게 된 것 또한 솔이의 초등학교 입학이 가져온 작은 심적 변화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솔이의 성적표

우리 솔이가 다니는 학교를 잠깐 소개할까 한다. 전체 학생수가 83명으로 열린 교육을 표방하는 전형적인 시골학교다. 솔이의 학년은 총 8명이다. 그 가운데서 한글을 완전히 익히고 들어온 아이는 2명이고 솔이를 비롯한 나머지 아이들은 한글을 모른 채 입학했으니 모두 그만그만하다. 그러다 보니까 위기감조차도 못 느끼고 지내온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지난 스승의 날 필자가 명예교사로 학교에 갔을 때 솔이네반을 방문하고는 참으로 감격스러움을 느꼈다. 8명의 학생이 ㄷ자 형태로 책상을 배열해서 앉고 가운데 선생님이 서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계셨는데, 학교라기보다는 차라리 가족과 같았다. 일일이 아이 하나하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지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도시의 콩나물 교실과 비교할 때 정말로 큰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솔이에게 이런 농담을 했던 적이 있었다.
“솔아, 너는 참으로 좋겠다. 꼴찌를 해도 8등이니까….”
진짜로 8등을 하려고 했을까? 좀처럼 솔이의 성적은 남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전혀 개의치 않으리라던 각오와는 달리 은근히 우리 부부에게 이것은 스트레스가 되었다. 잘못인줄 알면서도 부모의 입장이 되고 보니 욕심이 싹터 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휘몰아친다던 치맛바람의 열기가 그냥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솔이가 풀이 잔뜩 죽어 어깨가 축 처진 채 집에 들어섰다. 평소 같지 않은 솔이의 모습에 우리 부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다그쳐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솔이는 아무 대답도 없이 울먹이며 가방을 열어 공책을 펴서 우리 앞에 내어 놓았다.

받아쓰기 공책이었다. 빨간색연필 자국이 굵게 위에서 아래로 빗겨 쳐진, 밑으로는 번호와 함께 솔이의 연필로 써나간 작고 서투른 글씨들이 짓밟혀진 듯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맨 밑에는 더욱 선명하게 30이라는 숫자와 함께 밑에 빨간 두 줄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왜 솔이는 30점의 점수를 받고 고민을 해야 했으며 그토록 부담이 되게 하였을까? 그리고 우리 부부는 왜 솔이의 성적표를 보고 당황해야 했을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 부부는 솔이에게 물었다.

“시험이 어려웠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했니?”
역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다음부터는 더욱 열심히 해라.”하는 당부와 함께 더 이상 솔이의 성적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새로운 다짐들

솔이가 밖에 놀러 나간 뒤에 나의 아내가 제안을 했다.

“여보, 우리 앞으로 어떠한 경우에라도 솔이의 성적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고 야단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리고 다만 우리 아이가 좋은 습관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 줍시다.”

나도 흔쾌히 동의를 했다.

무엇보다도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솔이의 감성을 부담으로 짓밟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솔이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극단적인 경쟁심보다는 맑은 영혼과 건전한 생각들, 그리고 자신의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있는 따뜻한 가슴이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거기에 부모된 우리 부부의 마음의 여유가 더욱 절실했다. 삭막한 기계인간으로 키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온전한 인간으로 키울 것인가는 우리 부부의 몫이기도 하다. 솔이가 우리의 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의 소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 따름이다.

얼마 전에 솔이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교에서 대청소를 하는데, 자모들이 와서 도와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학교로 가기 전에 아내가 검은 비닐봉지를 하나 꺼내들고는 밖으로 나가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담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교인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 수확한 감자였다. 선생님에게 선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 감자도 촌지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고 말았다.

학교에 갔다온 아내는 밝은 표정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감자 선물을 받고는 너무나 좋아하더라는 이야기와 함께 솔이의 학기말 성적이 평균 94점이었다면서 흡족해 하는 것이다.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솔이와 찬이의 성장기가 도시의 아이들만큼은 풍족하고 화려하지만은 못하다. 그러나 때로는 `촌놈'일 수밖에 없는 어눌한 행동에서 우리 부부는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굳건한 확신을 갖게 된다. 분명히 솔이와 찬이는 혹시라도 고통스러웠을지라도 모를 시골에서의 그들의 성장기가 얼마나 귀중했던가를 깨달을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