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부버(1878∼1965)는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유태계 종교철학자이다. 그의 지적 배경은 독일 철학 전통과 하시딕 유대교이다. 1938년 그는 독일을 떠나서 이스라엘로 향해 은퇴할 때까지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회철학을 강의한다.

◆  나와 너  

부버가 현대사상, 특히 틸리히나 부르너 같은 기독교신학자에게 통찰력을 준 그의 책은 1923년에 쓴 <나와 너>였다. 이 책은 당시 신학뿐 아니라 사회과학과 정신치료와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는 거의 모두가 이 책을 인용해서 글을 쓰고 강의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요한복음의 변형이다. 부버에 의하면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만남이다. 아무도 그 만남을 피할 수 없다. 그때 ‘자아’ 또는 ‘나’는 다른 존재와 기본적으로 두 형태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나와 그것’ 또는 ‘나와 너’이다. 부버의 설명을 들어보자.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 가운데 그냥 물건처럼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 여러 존재, 사건, 그 가운데서 반응하고 있는 내가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감각하고 비인격적인 물건들과 사는 게 아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들과 산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통상적인 방법은 경험하고 이용함이다. 어떤 물건을 보고 조사해 본 뒤에 그것을 이용한다. 그래서 그 관계는 대상을 비인격적으로 접근해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도 그런 방법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삶에 꼭 들어가는 과정이며 오늘날 문명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상의 질서를 모두 비인격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바로 ‘나와 그것’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나와 그것’은 사람이 가질 관계가 아니다. 세상이 서로를 향해 ‘그것’으로 여겨 이용이나 하려고 할 때 그 존재들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사람은 다른 대상과 ‘나와 너’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관계라는 것이 시작된다. 참되게 존재하는 방법이다.

◆  참된 관계

‘나와 그것’의 관계가 왜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경험의 세계이다. 경험은 사람의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경험은 순전히 주관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상호성을 결여하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주체와 객체의 나눔이다.

사람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시험해서 알 수 있는가? 과학적인 대상으로 데이터에 의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성적이 얼마고 몸무게가 얼마고 돈이 얼마고 해서 그를 참으로 알 수 있는가? 부버의 대답은 ‘노’이다. 사람은 그렇게 이해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참여해야 한다. 차츰 마음을 열면서 거리감이 무너지며 감정이입과 공감을 통해서 알게 된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참된 만남과 상호성이 포함된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나와 너’의 관계이다.

억지로 한다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즉 마음 열기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직관 같은 내면이 서로 통하게 된다.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신비한 삶의 영역이다. 영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인다.

이 관계는 그냥 만들어 유지하는 정도로는 되지 않는다. 계속 의미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니 누구건 항상 ‘나와 너’의 세상에만 있을 수는 없다. 또한 누구나 ‘나와 그것’의 세상에서 그럭저럭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인간의 삶이 아니다.

현대 세상은 ‘나와 그것’ 그리고 ‘나와 너’가 혼돈 되면서 ‘나와 그것’의 관계가 늘고 있다. 사람들이 가져야 할 고유한 문화는 ‘그것’의 세상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은 진정한 관계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기에 참된 영적 삶은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  해결이 아니라 의미

‘나와 그것’의 접근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나타난다. 하나님도 ‘그것’으로 알고 추구한다. 내게 복이나 주는 대상이다. ‘나와 그것’의 의식구조로는 다른 사람을 알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은 더욱 알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열어야 한다.

그 본성상 절대로 ‘그것’이 될 수 없는 ‘너’ 즉 하나님과의 만남은 어떤 특정한 거룩한 시간이나 장소가 요구되지 않는다. 영원한 ‘너’는 일상생활에서 온전히 높여주고 모셔들임으로 일어난다. 하나님을 ‘그것’으로 이용함은 참된 관계가 될 수 없다.

이렇듯 영원한 ‘너’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충만한 현재’를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계시’이다. 이 계시를 우리는 ‘내용’으로 받는 게 아니다. ‘존재의 능력’으로 받는다. 그래서 계시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확증해주고 행동하게 한다.

하나님은 해결사가 아니다. 가까이 갈수록 평안을 느끼지만 해결책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계의 충만함을 맛본다. 그래서 삶이 쉬워지는가? 아니다. 더 짐을 진다. 하지만 의미를 가진다. 천국 같은 다른 세상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 관계 속에 갖는 의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는 것을 가지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면서 접근할 수 없다. 단지 이 계시를 나눌 뿐이다. 그래서 이 의미 있는 삶으로 불러내어 다시 그 삶을 향해 가도록 보내는 것이다. 어떤가? 부버가 보는 계시와 그의 하나님이.

이러한 가르침은 그가 속한 하시딕 유대교로부터 나온다. 부버는 매일 매일을 거룩하게 삶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에게 구원은 확실한 해결이 아니라 단지 의미였다. 그래서 주관적으로 느끼는 관계의 충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