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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된 공적자금 ‘정치 쇼’
국정조사 사실상 ‘정략적’ 무산
2002년 10월 09일 (수) 00:00:00 윤길주 ykj77@joongang.co.kr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적자금에 대한 국정조사가 사실상 무산됐다. 공적자금 국정조사가 처음부터 ‘정치 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막상 불발되고 보니 아쉬운 점이 많다. 청문회가 열리면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과는 별개로 많은 국민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지 교훈 하나쯤은 얻을 수 있었을텐데 원초적으로 그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 됐다.

공적자금 국정조사는 애초부터 정파적 이익에 따라 여야 간에 합의됐다. 한나라당은 대선을 앞두고 공적자금 비리를 파헤침으로써 현 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국정조사를 추진했다. 한나라당이 공적자금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와 처조카인 이형택씨 등을 증인으로 채택한 것만 봐도 목적의 일단이 드러난다. 반면 민주당은 공적자금을 둘러싼 국민의 원성이 자자함에도 이를 못들은 척하다 마지못해 국정조사에 응했다. 그러나 정부 기관들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정조사를 무력화시키려 했다는 비판을 자초하게 됐다.

이번 공적자금 국정조사 무산 사태는 정치권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겉으로는 국민을 대표해 공적자금의 투입 배경, 과정, 결과 등을 면밀히 따지겠다고 호언하면서도 속으로는 ‘대선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계산에 몰두했던 것이다. 정작 나라를 위해 국정조사를 한다면 증인 몇사람이 포함되고, 빠진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이들이 없어도 공적자금 부실 문제는 얼마든지 파헤칠 수 있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국회의원이 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다.

한나라당은 TV 청문회장에 거물들을 불러 한판 호통을 치는 ‘정치 쇼’를 크게 벌일 생각이었는데 별 볼일 없는 ‘증인’들만 나온다니 차라리 좌판을 걷어버린 것은 아닌가. 또 민주당은 별로 내키지 않아 증인 문제를 놓고 버티던 중 한나라당이 국정조사 포기를 선언하자 뒤늦게 혼자서라도 하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적자금은 지난 1997년 외환 위기 때 망가진 금융 시스템을 복원하기 위해 국민의 혈세로 조성해 투입한 돈이다. 그동안 156조원을 쏟아부어 그나마 외환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텅 비었던 금융기관들의 금고도 어느 정도는 채웠다. 이로 인해 대외 신인도가 높아져 외국인 투자가 활성화 됐으며 주식 시장도 되살아나는 등 경제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적자금을 둘러싼 비리도 끊이지 않았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일부 금융기관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빠져 경영개선 노력은 뒷전인 채 임직원들의 ‘돈 잔캄를 벌이는 일도 발생했다. 또 부실기업주들은 처벌을 받아야 함에도 ‘회장’ 명함을 들고 나 보란 듯이 활보하며 외국에서 카지노 도박을 즐겼다. 사정이 이러니 국민들은 공적자금 얘기만 나와도 ‘비리 냄새가 역겹다’며 진저리를 치기 일쑤고 결국 국정조사의 도마에까지 오르게 됐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공적자금에 대해 잘 이해를 못하고 있다. 언론에서 워낙 두들겨 패니까 무조건 나쁘게만 인식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이 훨씬 많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다만 급한 불을 끄다보면 물을 과도하게 쓰거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피치못할 부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또 일부는 불 끄라는 물을 다른 곳으로 빼돌려 개인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시비를 가려 법적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이지 불을 끈 행위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공적자금은 ‘비용’의 개념이다. 갑작스럽게 닥친 외환 위기로 금융기관들이 무더기로 도산하자 이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 국민 세금으로 메워넣은 것이기 때문에 100% 회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금와서 얼마를 투입했는데 얼마가 회수 불가능하다며 전체를 매도하는 논리를 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공적자금에 대한 국정조사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됐다. 공적자금이 어떤 절차에 의해 어떻게 투입되고 감독되었는지를 따짐으로써 미래에 닥칠 위기에 대한 대응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다. 또 공적자금 운용 과정에 참여한 관계기관 관계자, 부실기업 책임자 등에 대한 증언을 들음으로써 어디에서 공적자금이 과잉, 무분별하게 쓰였는지를 밝힐 수 있다. 이와 함께 공적자금 투입에 관여한 관료들이 국민의 혈세를 1원 한푼이라도 더 회수하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따져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현 시점에서 국정조사가 본래의 목적대로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도 많아 차라리 안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과거 국정조사에서 지리한 정치공방이나 인신공격, 한건주의 등이 판쳤던 점에 비춰 현실적인 판단이란 느낌도 든다.

필자는 금융감독위원회 출입기자로 공적자금 투입 과정을 지켜봤다. 때로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 임직원과 기업주들의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 차후에 공적자금 투입 과정과 부실 원인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인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치권은 국정감사를 한다고 하더니 그마저도 정파적 이익만을 앞세워 싸움질을 하다가 국정조사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정치 쇼’로 흥행만을 하겠다는 정치권이 한심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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