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반영’인가, ‘검은 장삿속’인가?

청소년의 임신과 출산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가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이처럼 잇따른 청소년 결혼 관련 영상물이 제작되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최근 30%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월화드라마 <쾌걸 춘향>(KBS2). 이 드라마는 남원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춘향(한채영 분)과 몽룡(재희 분)이 우연히 한 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며 난처해지자, 부모의 주장에 따라 ‘계약 결혼’에 들어간다.

이 드라마는 애초부터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까지 20대 이하를 겨냥한 ‘표적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타깃 층을 잡기 위해 <쾌걸 춘향>은 사건이나 이야기 대신, 재미있는 상황을 설정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주인공들의 행동, 톡톡 튀는 대사에 의존하는 시트콤적 규범을 충실히 따른다.

춘향은 “좋은 집안과 결혼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데 왜 고집이냐?”는 홀어머니 넋두리에, 몽룡은 사랑 고백을 거부하는 연상의 여인 채린의 싸늘한 태도에 손쉽게 마음을 바꾼다. 그러면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결혼을 대하는 이들 태도는, 점심식사 메뉴를 고르는 과정만큼의 고민도 수반되지 않는다.

한낱 오락거리로 전락한 청소년 결혼

“결혼은 신성한 것.”
천만의 말씀이다. 적어도 요즘 한국의 TV 드라마와 영화에서 결혼은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근래의 한국사회는 결혼한 부부의 3쌍 중 1쌍이 이혼한다. 주변 상황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우리나라 대중문화 상품들은 거기서 두 발짝쯤 더 나아간다.

 언제든 파기 가능한 ‘계약결혼’이 새로운 흥행코드로 각광받고, 파릇파릇한 중고생들은 그 당사자로 등장한다. 이들이 때로 임신하고 출산도 하는 ‘난장판’ 속에, 결혼과 10대의 성은 유희의 대상으로 대중에게 소비된다.

지난 해 12월 23일 개봉된 오덕환 감독의 <여고생 시집가기>는 16세 생일을 앞둔 고교생 남녀가 ‘합방’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신한 여고생 ‘평강’은 교실에서 양수가 터지고, 이를 본 친구는 “평강이가 오줌 쌌대요” 라며 놀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는 남녀 고교생의 구체적인 동침 장면은 묘사되지 않지만, 주인공 남녀 얼굴 모양의 두 마리 토끼를 등장시켜, 남자 토끼가 연신 방아를 찧어대는 모습으로 성행위를 비유했다.

<여고생 시집가기>는 “16세 전에 결혼하고, 1년 안에 출산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점괘를 여주인공이 어려서 받았다는 설정을 통해 ‘합방’을 합리화한다. 이에 따라 카메라는 고교생들의 고민에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평강의 온달 잡기에만 전력을 쏟는다.

이상훈 감독의 <돈 텔 파파>에는 주인공인 여고생이 화장실에서 출산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 더해 여고생이 갓 낳은 아이를 ‘퀵서비스’를 통해, 고교생 아빠가 수업 받고 있는 교실로 ‘배달’시키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직접적인 베드신 장면을 묘사하지 않아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15세 이상 관람갗 등급을 받았다.

최근 영화에서의 청소년 임신과 출산을 다룬 영상물은 문근영, 김래원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어린 신부>의 영향 때문이라는 게 영화계의 지배적인 해석. 16세 여고생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24세 대학생과 결혼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개봉 후 중·고생들의 열띤 관람에 힘입어 전국 32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근간에 개봉된 <제니, 주노>는 ‘세계 최연소 엄마, 아빠’, ‘15세 몰래 부부의 아기수호 감동프로젝트’ 등의 광고 카피를 내걸며 15세 남녀 중학생의 임신과 출산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청소년들은 실수로 임신한 뒤, 자신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부모의 반대를 이겨내고 출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블로그 게시판에는 “15세의 임신과 출산을 소재로 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돈을 벌려는 상술”, “청소년의 성행위를 미화해 청소년의 가치관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등의 비판론이 다소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이런 소재도 다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은 애 가지면 안 된다’는 색안경을 쓰고 보는 현실이 슬프다”는 등의 옹호론도 앞 다퉈 올라오고 있다.

 청소년 ‘성 관념’에 악영향 준다

이런 일련의 영상물들을 접한 까닭일까. 한국 청소년들의 성의식이 상당히 급진전하고 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지식 Q&A에 올라 온 한 청소년의 글이다.

“청소년의 성관계가 불법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저는 청소년입니다만, 주위에 성관계를 맺는 친구들이 꽤 있거든요. 그중에는 관계를 하다가 걸려서 학교에서 퇴학 맞은 애도 있지만, 법적으로 제재를 받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어요”(soulman0709).

우리나라 청소년 10명 중 4명 이상은 ‘혼전동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한국사회조사연구소가 전국의 중고생 5천13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 청소년의 삶과 의식구조”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2.3%가 ‘혼전동거를 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30.1%는 ‘해서는 안 된다’, 26.8%는 ‘모르겠다’고 답해 청소년들의 결혼관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나타냈다.

드라마나 영화 속 설정보다 놀라운 것은 당사자인 10대들의 반응이다. <제니, 주노>에 출연한 10대들의 반응은 “중학교 때 정말 임신한 애가 학교에 있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도 10대였는 걸요”, “어른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니까”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릇된 시각을 제공해 주는 청소년 관련 영상물에 대해 “상업적 목적으로 청소년들 성 관념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등의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10대들을 등장시켜 20~30대들이 주인공이었던 로맨틱 코미디의 설정을 적용시키고 있는데, 구태의연한 상황으로 ‘애 어른’을 만들어 놓고 또래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소년 문제를 빙자해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는 어른들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청소년은 가족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학교, 또래집단, 문화적 활동, 창조적 예비 노동인력, 정보화 사회 사이버 커뮤니티의 구성원이다. 동시에 청소년은 정체성이 형성되는 지점이 다중적이다. 이에 따라 어떤 사상과 생각으로 무장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미래가 결정된다. 따라서 10대의 성문제는 권리 차원이 아닌, 가족과 사회 국가 등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나무만이 사람을 숨 쉬게 하는 게 아니다. 철부지로 알았던 청소년들이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맑은 공기를 내놓고 있다. 뜨거운 눈물을 닦아주고 빈 가슴 채운다. 영화에서 설정된 어설픈 코미디식 결혼 이야기보다, 거죽만 남아 앙상한 할머니들의 몸을 닦으며 환하게 웃는 소녀의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답다. 청소년들에게 맑은 정신을 심어주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