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9월 실시된 예장합동 총회에서 총대들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임원선거를 하고 있다

황영준 목사 /  예장합동 광주동산교회

제비뽑기 원년 그 현장
2001년 9월 19일. 충현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86회 총회 이틀째. 드디어 임원을 선출하는 제비뽑기가 선포되고 선거관리위원들의 호명에 따라 노회별로 총대들이 줄을 섰다. 개회벽두 전 회기의 결의대로 제비뽑기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임원선거규칙이 개정되지 않았으니 종전대로 투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예년과 달리 임원을 뽑지 못하고 하루가 지연된 것이다.

강단 앞에 준비된 구슬통 깊숙이 오른 손을 넣었다. 두 분이 부총회장 후보로 나섰기 때문에 구슬 통에는 빨강 구슬과 노랑 구슬이 섞여 있었다.
이 제비뽑기 방법으로라도 타락선거를 피해가려고 신학적 연구와 사례를 찾아 발표하고 한편에서는 반대하기를 여러 해. 목사와 장로들이 어떻게든지 금권타락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선택한 제비뽑기. 그 원년 역사의 현장 증인이 되었다는 생각은 잔잔한 흥분마저 일으켰다. 두 분 입후보자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주여! 주의 마음에 합한 자를 세워 주옵소서. 비록 우리가 제비를 뽑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다시 시인할 수 있어서 고뇌 중에 선택한 이 방법으로 양심에 자유케 하옵소서. 좋은 결과를 주시어 이번 총회가 축제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구슬 하나를 선택했다. 빨강 구슬이다. 누구일까? 궁금해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선거관리위원장이 빨강 구슬 475개, 노랑 구슬 395개라 발표한다. 후보자 황 목사가 단상에 나와 먼저 자신이 선택했던 봉투를 개봉하니 노랑 구슬이다. 낙선이다. 섭섭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 목사의 손에 들려있는 봉투는 빨강 구슬이 아니겠는가. 총대들이 이미 감을 잡고 ‘와-’하는 탄성을 지르는데 한 목사는 봉투를 열어 빨강 구슬을 높이 들고 총대들에게 큰절을 한다. 만장의 환호가 이어지고 한 목사는 경쟁자였던 황 목사를 끌어안는다.  박수가 울려 퍼진다. 빨강 구슬의 감촉만큼 너무 기분 좋은 순간이다. 다른 임원도 이렇게 선출되었다.
‘너무 좋습니다. 서로 비방할 것도 없고, 일 년 내내 선거운동에 매달릴 필요도 없고 무리하게 돈 쓸 일도 없으니 얼마나 좋아요. 낙선을 해도 교회 앞에서나 총대들 앞에 떳떳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선택은 하나님이 하신거야. 하실 만한 분들이 됐지 않아요?’, ‘돈 쓰지 않고 임원이 됐으니 정말로 잘했어. 선출된 분이나 총대들이 부끄럽지 않으니 참으로 좋습니다.’ 임원선거가 끝나고 회의장을 나오는 총대들의 밝은 얼굴은 우리 총회의 앞날이 쾌청함을 보여주었다.

어느 일간지는 ‘제비뽑기 4익논(四益論)’이라 제목을 붙여서 “예장 합동의 총대들은 누굴 뽑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고, 무효 표가 없어서 좋고, 신속하게 진행돼서 좋고, 떨어진 사람도 깨끗하게 승복해서 좋다”고 기사를 썼다. 낙선자가 상대 후보가 돈을 뿌렸다며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이제 그런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총회 마지막 날은 제비뽑기를 못박는 규칙개정안이 통과되어서 앞으로 계속될 제도로 확정하였다. 기독 언론들은 “막상 시행해보니 임원 선거 시간도 절약되고 후보간의 충돌이나 마찰도 사라졌다는 점에서 정착될 소지가 높아졌다. 이번 총회를 치른 교단 중 가장 큰 수확을 거뒀다”고 평을 실었다. 교회에 돌아와서는 예년과 달리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총회 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제비뽑기를 위한 해산의 진통
제비뽑기를 제도화하기까지는 그 해산의 진통이 엄청 컸을 뿐만 아니라 그 기간 또한 여러 해가 결렸다. 임원선거에 들어가자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반대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작년 총회에서 결의가 되었지만 규칙이 개정되지 않았으니 법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절차에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금권타락을 막아보자는 결의 정신을 살려 어떻게든지 제비를 뽑자는 주장이 팽팽했다. 언권을 얻으려고 서로 밀치기도 하고 발언하는 이에게 삿대질을 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험악했다. 사회자를 향해서 강단까지 돌진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 아무개 목사는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금권선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몸통이 중요합니까 깃털이 중요합니까? 몸통은 금권선거를 안 하는 겁니다. 깃털은 절차입니다”하며 제비뽑기를 주장했다. 두 시간의 격론에도 불구하고 임원을 뽑지도 못하고 늦은 시간에 정회를 선포했다.

다음 날 새벽, 충현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니 이미 이른 새벽에 나온 총대들의 기도가 간절하고도 엄숙하게 들려왔다. 총회를 섬겨오며 총회를 사랑하는 목사 장로들의 눈물의 기도로 들려왔다. 간밤에도 대화는 계속되었단다. 총회에 영향력을 가진 분들이 밤을 새우며 의논하고 타협하여 이번에는 결의대로 제비뽑기를 하고 앞으로도 제비뽑기를 계속할 것인지는 본회에서 결의하자고 합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오전 9시30분에 속회를 하자 총회장이 제비뽑기 임원선출을 선포하고 질서정연하게 역사적 구슬 뽑기가 진행된 것이다.

제비뽑기를 한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올 때 후보 당사자들만 제비를 뽑아 당선과 낙선을 가리는 줄 알았는데 전 회원이 기도하고 전 회원이 제비를 뽑으니 의미가 있다는 여론이었고 그런 분위기 때문에 마지막 날 ‘임원선거는 제비뽑기로 한다’는 규칙개정안을 401대 152로 채택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6회 총회 938명 총대(목사 469명, 장로 46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석해 교회를 위해서 고민하며 지혜를 모아 가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큰 보람이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는 말씀이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제비뽑기로 벗어버린 폐단들
금년으로 3년째를 맞는다. 뒤돌아보면 선거를 겨냥하고 일어났던 여러 가지 행태들이 크게 변했다. 총대들이 끼여있는 전국적인 모임이 열릴 때마다 찾아오던 후보자들. 맨손으로 올 수 없어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봉투를 내놓았었는데 그것이 끊겼단다. 주최측은 찬조자 일부를 잃었지만 오랜 관행 하나가 깨어졌다.

후보자들도 원하든 원치 않든 시달리고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았다. 여러 지방에서 모이는 연합 행사에 어떻게든지 얼굴이라도 내놓아서 자기를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 주최측은 인사 순서에 몇 분 또 축사 순서에 몇 분을 넣어야 했는데 억지스러운 그런 모양새도 없어졌다. 일년 내내 전화통을 붙들고 있어야하고 노회를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느라 목회가 소홀해지던 폐단도 염려할 것이 없다.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총대 수를 제시하며 선거활동비를 요구하던 부담스러운 분들도 활동무대를 잃었다.

금권 타락을 개탄하고 지역 분파적인 선거문화를 보면서 마음 아파했던 일들. 총회를 염려하며 총회 장에 들어가는 총대들에게 공명선거를 호소하는 글을 배포하던 일. 총회 산하 교회가 교단의 타락한 선거 현상을 안타까워하며 기도하던 일. 입후보자들로부터 얼마 되지 않는 구린 거마비를 받고도 되돌려 주지 못하고 양심에 부끄러웠던 일. 선거가 끝난 후에도 아물지 않았던 후보자들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좌절감과 교회에 대한 부담감 같은 것은 확실하게 해소되었다.

다시 투표로 돌아가야 하는데
우리의 부끄러운 치부를 열어 보이며 금권 타락을 막는 길은 이것 뿐이라고 선택한 제비뽑기를 차선책이라고 말해도 합당할지 모르겠다. 지금도 과열 현상을 보이는 총회 상비부장이나 일부 기관까지도 제비뽑기를 도입하자는 헌의가 있고 일부 노회도 임원을 제비뽑기로 선출하려 한다는 소문이다. 그렇지만 이 제도가 언제까지 오래가서는 안 된다.

금권이나 지역성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총회로 나아가기 위해 합당한 인물을 내세우는 성총회의 성숙한 선거풍토가 조성되는 그 날이 속히 와서 무기명 비밀투표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선거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