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도는 출발점과 중간과 마지막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이와 유사한 입장은 인간의 의지나 이성에 초점을 맞춘다. 의지라 함은 자기 힘으로 의롭게 살아 인정받으려는 것이다. 이성이라 함은 과학과 철학, 소위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과 구원의 지식을 판단하는 입장이다.

둘 다 기독교의 주요 전통을 이루고 있다. 인간 자신을 구원을 이루는 주체로 삼는 이러한 입장은 구원의 도를 혼란시켜 왔다.
초대부터 이 입장들은 언제나 명백하게 구분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헬라철학에 능통한 이성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하신 일을 믿는 믿음에서만 왔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교부들의 글에는 이 두 입장이 구별된다. 예를 들어 폴리캅 같은 이들은 마치 성경구절을 연결해 놓은 것처럼 글을 써서 신앙을 전수했다. 하지만 헤르마스나 파피아스 같은 이들은 완전히 신앙을 금욕적인 삶이나 도덕으로 오해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그 출발점부터가 신앙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서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대로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는 명제를 세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어야 알게 된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일단 믿어야 깨달음이 오기 시작한다.

철학자 질송은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평했다. 이생에서는 단지 믿을 뿐이고 죽어봐야 혹시 알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말이다.
죄사함 받았음을 믿어야 죄사함의 감격을 안다. 의로워졌음을 믿어야 의의 의미를 안다. 능력 받았음을 믿어야 능력이 경험된다. 하지만 “믿기 위해 알아야 하겠다”는 입장은 절대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계시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 아퀴나스는 어거스틴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 신앙을 설명해 나간다. 즉 기초적인 범주론에서 시작하여 더 고차원적인 단계로의 합성으로 나아간다. 신앙이 이렇게 아래서부터 인식되어 올라가는 것인가?

비슷한 차이를 우리는 종교개혁시에 루터와 에라스므스에서 본다. 두 사람은 당시의 교회의 부조리나 사람들의 왜곡된 신앙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공동보조를 취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출발점이 반대였다는 것이 나중에 나타난다.
에라스므스가 볼 때 인간은 자기 자유의지로 구원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것이 인본주의 신앙이다. 그가 지적한 가톨릭의 잘못된 신앙들은 모두 이성으로 판단해 볼 때 잘못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퀴나스와 같은 입장이다.
반면에 루터는 이성이 아닌 성경과 복음에 비추어 잘못된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둘 다 비슷한 소리를 한다고 둘을 같은 입장으로 보면 안 된다.

같은 비교를 칼빈과 바르트의 비교에서 볼 수 있다. 칼빈은 성경과 복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으로 하나님을 알고 거기에 비추어 자신을 본다.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하지만 바르트는 처음부터 체계에서 시작한다. 그는 말씀이란 체계를 세우고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구원도 모두 그 체계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을 초월적으로 말한다 해도 역시 철학적인 입장에 그리한 것이다. 그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성의 자부심이 최고에 달했던 서양의 19세기 신학을 바르트는 ‘의식신학’(Bew- usstseinstheologie)이라고 정의하였다. 한 마디로 인간의 이성을 최대한 펼쳐보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반발하여 바르트가 세운 것은 ‘말씀의 신학’이었다.

신학 연구와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인간의 지혜의 말’에 그 출발점을 둘 수 없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진리의 근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세웠으니 그때까지 신학의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말씀이지 성경은 오류투성이의 종교문서였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성경을 보니 내용을 그대로 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세운 말씀의 체계에 의해 그리스도를 설명해낸다. 성경 그대로가 아니었다.
그가 만든 그리스도는 말씀의 신학이라는 그의 사상 체계에 갇혀버린 존재였다. 결국 그도 ‘인간의 지혜’와 의식신학 안에 갇히고 만다. 이렇게 본다면 바르트도 앞의 아퀴나스나 에라스므스와 비슷하게 철학을 신앙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이러한 비교는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 언제나 살펴볼 일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나온 신앙의 설명인가, 아니면 철학적인 체계에서 성경을 본 것인가? 그래서 거기 맞지 않으면 다르게 설명해야 하는가?

루터와 에라스므스의 경우처럼 겉으로 보면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에서 나온 의로운 행동과 율법이나 이성에서 나온 의로운 행동이 같이 취급된다. 그러므로 슈바이쳐 같은 이가 위대한 신자가 되는 것이다.

아퀴나스나 에라스므스나 바르트나 다 위대한 학자요 천재 중에 천재였다. 그들의 깊고 넓은 학문을 어찌 감히 몇 마디로 비판하겠는가? 하지만 신앙과 유사신앙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위대하다고 다 같은 복음운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메이첸은 헤르만에게 1년을 배우면서 큰 감동을 받는다. 완전한 자유주의자인 헤르만은 너무도 경건하게 살았다. 메이첸은 갈등하다가 깨닫는다. 헤르만의 경건과 힌두교도들의 경건과 무엇이 다른가? 복음의 진리를 떠난 인간의 경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