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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눈에 띄는 경제개혁 조치 잇따라
2002년 08월 28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평양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런 움직임의 선봉에 선 것은 경제부문이다. 의식주란 표현을 ‘식의주’라고 할 만큼 먹고사는 문제에 ‘선차(우선)적인 관심’을 보여온 북한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미 언론보도 등을 통해 전해진 대로 배급제도를 축소하거나 폐지한 데 이어 국정가격과 농민시장으로 이원화됐던 물가를 현실화했다. 또 이에 맞춰 임금도 20배 가까이 올리는 개혁조치를 취했다.

달러당 2.15원 수준이던 환율도 달러당 150원 가량으로 조정했고, 북부지역인 함북 회령 등지에서는 국영농장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개인영농제를 실시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중이 크게 실려있다. 지난해 10월 이미 간부들에게 경제개혁조치의 골간을 시달한 바 있는 그는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신사고’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8월 20일부터 러시아를 방문한 것도 직접 외부세계를 자기 눈으로 보겠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뜻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방러 기간 중 자본주의의 상징인 이그나트 쇼핑센터에 들러 “손님은 얼마나 되느냐. 이익금은 얼마나 나느냐”고 묻는 등 관심을 보였다. 이번 방문에 “1천배 만족한다”는 그의 말로 미뤄볼 때 자본주의 따라 배우기가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당국대화나 민간교류 과정에서 접촉한 북측 관계자들도 경제개혁조치에 대해 숨기거나 답을 피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 개혁 조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방향전환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 안에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라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이 두어져, 초과생산에 대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반응이 상당히 좋다고 북측인사들은 적극 설명하고 있다.

이런 북측의 변화 움직임은 남북 관계에도 나타나고 있다. 8·15민족통일대회에 참가하러 8월 14일 서울에 온 북측 대표단의 일거수 일투족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김영대 민화협 회장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과 공연예술단 116명의 3박4일 서울체류 일정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과거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거나 엉뚱한 트집을 잡아 판을 깨려 하던 것과는 확 달라졌다.

예술공연도 찬양가요 등은 전혀 없이 무용위주로 레퍼터리를 짰다. 또 북측관계자들은 양측 이견으로 일정이 지연돼도 “우리가 보기엔 남측이 잘못했지만 남측이 보면 또 우리가 잘못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면서 서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돌이켜보면 북한이 지난 7월에 취한 경제개혁 조치의 초보적인 움직임은 이미 4월말 개막한 평양 아리랑 축전때 엿보였다. 공연장인 능라도경기장 입구에는 상품판매대를 차려놓고 각 무역회사들이 술과 수예품 등 자기 회사의 물품을 판매하려고 경쟁을 벌이는 등 자본주의식의 경제양상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침 축전기간 중 평양을 찾은 기자는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리랑축전 행사장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요리사까지 채용한 피자집도 등장했다. 16달러짜리 피자를 시키자 북측 여성 지배인은 “피자에는 콜라가 제격인데 주문하지 않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시내 평양체육관 앞 광장에는 각 업체별로 포장마차 형식의 매대가 70여 개 넘게 등장했고, 고려호텔이 있는 창광거리 등에는 포장마차 형태의 술집과 아이스크림· 호떡 등을 파는 길거리 이동 판매대도 등장했다. 대동강변에 솟은 주체사상탑 바로 아래서 달러를 받고 관광객들에게 오렌지주스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다.

투숙했던 보통강 호텔은 객실에 일제 히타치 TV가 갖춰졌고 CNN과 NHK 등 위성방송도 나왔다. 또 욕실에는 일회용 칫솔과 비누도 갖춰졌다.
주민들도 이젠 이런 변화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보통강변에서 만난 한 50대 남성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정책을 비난하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끄트머리에 가서는 “우리같은 작은 나라가 강성대국이 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라며 말문을 닫았다. 특히 외국 관광객을 접촉해야 하는 이른바 대외봉사부문이나 무역일꾼들은 이미 변화에 대해 눈을 뜨고 대응하려는 모습이었다.

한 외화상점에서는 여성 판매원들이 모여있어 가까이 다가가자 뭔가를 감춰버렸는데, 알고보니 함께 영어회화를 공부하고 있었다. 누런 재생노트에 펜으로 빽빽히 적혀있었는데, 한 판매원은 “외국 손님들이 많이 오니 우리가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북한의 변화움직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정부 당국자나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도 논란이 적지 않다. 자본주의식 개혁개방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냐 아니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변화모색이냐를 둘러싼 입장 차이다. 현재까지 북한이 취한 조치나 북측인사들의 설명으로 미뤄볼 때 이를 개혁이나 체제개방을 향한 본격적인 움직임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위원장부터 “나에게서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며 사회주의 체제고수를 공언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당장 괄목상대할 변화를 기대하거나 이를 체제붕괴의 전주곡 등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분명 북한이 어떤 방향으로든 목표를 정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변화를 향한 손짓이 찻잔속의 태풍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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