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기자 / 중앙일보 통일외교팀 기자

북한 핵위기가 끝이 보이지 않는 북·미간의 정면충돌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2002년 12월 1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동결 핵시설 재가동 선언으로 본격화된 북핵위기는 북측이 단계적으로 평북 영변의 핵관련 설비의 운전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함으로써 고조됐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에서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는 도널즈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언급 등을 통해 대북 강경입장을 밝히며 압박수위를 올리고 있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어느 한쪽도 쉽게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북한의 내부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아직 1993년 핵위기 때와 같은 전시상황 돌입 준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긴장감이 감지되고 있다는 게 정부당국자와 북한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고사령관 추대 11주년인 지난 12월 24일 국방위 부위원장인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보고대회에서 “조국과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이 최악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오늘의 사태를 절대로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이튿날에는 관영매체를 통해 부시 미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이틀 뒤 김정일 위원장이 “사생결단으로 싸워 끝까지 결판을 볼 것”이라고 말한 사실도 뒤늦게 공개했다.

북핵 위기상황은 2002년 10월초 제임스 켈리 미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불거졌다. 평양에서 열린 북·미간 협상에서 미국측이 북한의 농축 우라늄을 통한 핵개발과 관련한 증거를 들이대자 북한이 핵개발 사실을 시인했다는 게 미국측의 발표내용이다. 미국 부시행정부는 북한에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준수를 요구했다.

국제사회도 북한에 대해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 계획의 즉각적인 포기를 촉구했다. 우리 정부도 10월 19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한에 대해 핵개발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뿐 아니라 국제협약의 위반임을 강조했다.

북한이 핵시설 재가동에 돌입한 2단계 북·미 갈등 상황은 대북중유지원 중단으로 촉발됐다. 대북 경수로 발전소 건설사업을 추진하는 국제기구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중유의 12월분 중단을 결정했고, 북한은 이 중유의 북한행이 사실상 어려워진 12월 중순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지난 12월 11일 인도양 상에서 발생한 북한 미사일 운반선박의 나포사건도 한 몫 했다. 다행히 미사일의 구매국인 예멘측이 미국과의 담판을 통해 ‘정상적인 거러로 인정받음으로써 북한 선박도 풀려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북한은 미국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보상을 요구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수출에 대한 미국 등 관련국의 우려를 증폭시켰다는 점에서 향후 북한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측이 예멘측의 입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미봉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을 뿐,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에 대한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북·미 관계뿐 아니라 남북관계에도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있을 게 분명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당장 북한은 미사일 수출 움직임이 극명하게 서방세계에 노출됨으로써 가뜩이나 핵개발 의혹으로 ‘불량국갗로 낙인찍힌 평양측의 앞날이 험난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런 상황으로 치닫다가는 자칫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이 현실화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새해는 남북관계는 물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중대한 시기가 될 것이라는 데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이견이 없다. 우선 지난 5년간 김대중 정부가 추진해온 대북 화해·협력정책(햇볕정책)의 지속 여부가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된다. 그동안 남북간에 추진돼온 경의선·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이 실현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포함해 교류·협력 사업이 재검토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같은 한반도 화해와 평화정착의 전기를 마련할 사안들이 계속 탄력을 받아 추진될 수 있을까 하는 점도 가닥이 잡힐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2001년 5월 요한 페르손 유럽연합(EU) 의장 방북시 언급한 ‘2003년까지 미사일 발사 유예’ 선언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만큼 이에 대한 후속조치도 이뤄져야 한다. 물론 지난 9월 북·일 정상회담 당시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기간의 연장 문제를 북측이 약속하기는 했지만 최근들어 이를 무효화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핵문제도 현안으로 떠오를 게 분명하다. 북한 당국이 우라늄 농축 핵개발에 대한 미국 등 국제사회의 압박에 정면으로 맞받아치고 있는 위기상황인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판이다. 게다가 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른 북한의 과거 핵 사찰 문제도 현안으로 떠오르는 등 북핵관련 압박은 거세질 게 분명하다. 자칫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북한에 짓고 있는 경수로 발전소의 공사 중단 여부까지 거론될 수 있다.

이런 정황 때문에 2003년 한 해의 북·미 관계 전망은 그다지 밝지 못하다. 이런 위기감 때문에 정부는 12월 26일 북핵문제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함으로써 북·미 관계 중재와 대북설득 행보도 본격화 될 전망이다. 정부가 이런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해당사자인 한국이 배제되는 상황이 재연돼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깔려 있다.

1993년 핵위기 때 김영삼 정부는 “핵무기를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며 등을 돌리는 바람에 이듬해 10월 제네바 기본합의까지 철저히 북·미간의 테이블에서 핵문제가 다뤄졌다. 이 때문에 42억 달러에 이르는 대북 경수로지원 비용의 70%(약 3조5천억원)를 떠안게 됐다. 여기에다 북핵위기가 장기화되거나 무력충돌 상황에까지 치달을 경우 김대중 정부가 공들여온 대북 화해·협력정책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절박감도 깔려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우선 1월 중순으로 잡힌 9차 남북장관급회담(서울)을 가동한다는 게 정부 복안이다. 또 노무현 당선자측의 의중이 실린 대북특사의 파견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북·일간 당국접촉이나 중국·러시아를 우회하는 방안도 고려 대상이다.

하지만 북·미간 핵 대치 정국에서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해낸다는 게 쉽지 않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현실적인 압박수단이 없는 데다 북한은 여전히 서울을 거쳐 워싱턴으로 가는 방식을 꺼릴 게 분명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복병을 앞에 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장고 끝에 어떤 결단을 내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면대결을 불사하는 뻣뻣한 태도로 나오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김 위원장이 최근 들어 취해온 일련의 개혁조치들에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북한은 2002년 7월부터 내부적으로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개혁·개방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또 9월에는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지정했고, 잇달아 금강산 관광특구나 개성공단 특구를 선보였다. 10월에는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경제시찰단 18명이 9일간 남한의 산업현장을 꼼꼼히 살펴보고 돌아갔다. 앞서 유럽연합(EU) 국가들과의 잇단 수교에서 볼 수 있는 대 서방권과의 관계개선 조치 등 정지작업도 착착 이뤄져 왔다.

핵·미사일 문제로 미국 등과 맞대응한다면 그 동안의 이런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국제사회로부터의 신인도 추락은 당장 북한 경제의 회생에 걸림돌로 작용해 권력기반마저 뒤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모양새 있게 대결국면을 마무리 하는가 하는 데 있다.

결국 2003년 한반도 위기관리의 풍향계는 북한의 합리적인 선택과 한·미 등 관련국의 대북 접근 전략이 얼마나 접점을 찾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 훈풍이 불 수 있느냐, 아니면 찬바람이 몰아칠 것이냐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바통을 이어받게 될 정부의 새로운 대북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북한도 스스로 국제사회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낼 북한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