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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전쟁 이승만, 안창호와 드류 선교사, 역사왜곡?
최은수 교수의 역사 현장 탐방
2024년 02월 15일 (목) 07:22:46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Ph.D), IME Foundation 이사장, 아르메니아 조지아 연구소(AGSI)와 남장로교 연구소(SPSI) 대표
 

최은수 교수

이단과 역사왜곡자들의 공통점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공간과 시간이 만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성경은 역사를 벗어난 신화도 아니고, 역사에 근거하지 않는 누군가의 창작물은 더더욱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이고, 그 성경에 근거하여 전개된 교회 역사도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다. 그런 성경적, 역사적 사실들을 임의로 변경하고, 자의로 조작하고, 엄연한 공적들을 폄훼하고, 긍정적인 결과에 비해서 미미하기 그지없는 과오들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여 곡해하는 일체의 행위들을 역사왜곡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과 교회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명멸해 갔고, 현재도 암약중인 이단들은 가장 치명적인 역사왜곡자들이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준으로, 그 정도에서 벗어나면 이단이 되기 때문에, 이단과 역사왜곡자들은 공동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위험성

   
<건국전쟁> 다규영화

한국을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최근처럼 사상적 대립이 극심한 적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극단적인 대립은 과연 성경적이고,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는가 에 대하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정죄하고 판단하며 심지어 원수보듯 하는 행동들이 성경의 정신대로 살고자 하는 대다수 기독교인에게 굉장히 낯설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치우친 생각은 역사적 사실조차도 무시하고 간과하며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해석하여 자기만족을 위해 오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상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그 인물의 역사적 행위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극단적인 한 진영을 위해 우상처럼 떠받드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음이다.

 

이승만과 안창호의 공통점과 다른점

그들의 공통점은, 첫째로, 넓은 의미로, 서북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을 다녔다. 이승만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감리교 계열의 배제학당을, 안창호는 언더우드가 세운 장로교 계열의 구세학당에서 공부하였다. 그들은 공히 기독교인이었다. 셋째로, 초기에 국내에서 활동할 동안, 그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공조하였다. 넷째로, 그들은 선진문물을 터득하기 위해 미국 파송 선교사들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승만이 안창호보다 세 살 많았지만, 미국 유학은 안창호가 2년 빠른 1902년에, 이승만은 1904년에 미국 땅을 밟았다. 다섯째로, 그들은 한국으로 파송되었던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에서 기반을 다지며 해외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들의 다른 점은, 첫째로, 먼저 미국 유학을 온 안창호가 본래의 목적인 학업보다는 초기 단계의 미주 한인들을 위한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반면, 이승만은 워싱턴의 정관계 인맥을 동원하여 외교적인 노력을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미국 교계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갔고, 한국 파송 선교사들의 인맥을 통해 학사, 석사, 박사까지 마치게 되었다. 둘째로, 안창호도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재미 한인들과 한국민들의 개조와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운동(필요시 무장독립운동)을 지향한 반면, 이승만은 민족 교육 활동과 더불어 미국과 일본의 관계 변화에 따른, 상황 변화에 맞추어 외교적 대응에 변화를 주는 노선을 추구하였다. 셋째로, 1908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대한제국 외교 자문인 스티븐스를 장인환과 전명운이 저격하여 제거하는 의거를 벌인 사건에 대하여, 이승만은 안창호가 주도하여 설립한 미주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가 발행하는 공립신보에 글을 실어 격하게 비판하며 반대함으로, 이 두 인물의 관계와 노선에 균열이 오게 되었다. 다섯째로, 당시 미주 기반 독립운동의 삼두체제는 박용만, 안창호, 이승만이었는데, 처음부터 줄기차게 무장투쟁을 주창했던 박용만이 암살당했고, 안창호도 미주와 한국, 그리고 중국을 넘나들면서 일제에 의해 구금되어 고문과 투옥을 당했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는데 반하여, 이승만은 주로 미주에서 활동하며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체포와 구금을 피할 수 있었고 유일하게 생존하였다.
 

드류 선교사의 시각에서 본 안창호에 대한 역사왜곡

필자는 사실 최근까지도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진영의 극우 논객들이, 아무리 이 두 사람이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견해차를 보이고 노선을 달리했었을지라도, 안창호 선생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점에서 과도하게 서술하고 평가하며 왜곡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최근에 한국과 미국에서 발표된 몇 편의 글들을 대하면서, 안창호 개인뿐만 아니라 초기 미주 독립운동에 대하여 역사왜곡이 지나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승만 자신에게 지지자들로 하여금 반대자들을 과도하게 비판하게 만드는 ‘원죄’가 있었는지, 아니면 이승만의 열렬한 추종자들이 과잉 충성을 한 것인지는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승만이든 안창호든 그 어느쪽의 지지자도 아니기 때문에, 다만 필자는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 명명백백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든 개인의 공적을 지나치게 미화해서도 않되고, 한순간의 실수와 연약한 면들을 과도하게 부각시켜서 균형잡힌 평가를 해쳐서도 곤란하니 말이다.
 

그럼 점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해외 독립운동과 연관하여, 드류 선교사는 역사왜곡의 진위를 가려줄 수 있는 기준점이 될 수 있다. 알레산드로 다말 드류 선교사는 잉글랜드의 채널 아일랜드에 속한 건지 섬에서 정통 감리교회(Primitive Methodist Church)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0살이 될 무렵인 1870년에 부친을 따라 온가족이 버지니아주 메클렌버러 카운티로 이민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밀튼 다말 드류 목사는 1876년에 미남장로교에 속한 한 장로교회의 청빙을 받아 교단을 바꾸었고, 드류 선교사는 자연스럽게 미남장로교 계열의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버지니아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그는 미 남장로교회에서 파송한 호남 최초의 의사 선교사가 되었다. 군산 선교부에 소속되어 호남 최초의 근대식 의료 활동을 펼쳤으며, 선교 현장에서 과도한 사역으로 인하여 심신이 쇠약해져서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났다. 드류 선교사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일시적인 안식년을 보내다가 1902년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만났다.
 

   
도산 안창호

사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주를 기반으로 해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기저에는 드류 선교사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드류 선교사 없이 독립운동가요 민족지도자인 도산 안창호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류 선교사는 그만큼 도산이 미주에서 독립운동가로 성장해 가는데 있어 든든한 기초석이 되었고, 안창호의 후원자이자 지지자로서 그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안창호에 대한 역사왜곡 첫 번째는 드류 선교사와 안창호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이를테면, 드류 선교사와 안창호가 갈등 관계에 있었다거나, 드류 선교사가 안창호를 하인대하듯이 하여 주종관계인양 규정했다든지, 안창호가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드류 선교사의 집에서 이른 시간에 이사를 나갔다는 등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스트 오클랜드의 셋집(렌트)에서 6명의 식구와 살고 있었던 드류 선교사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헤메고 있던 안창호 부부를 자신의 집으로 인도한 것 자체가 적지 않은 개인적, 가족적 희생을 감내한 결단이었다. 드류 선교사는 당시 한국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유력일간지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자를 불러서 안창호와 대담을 갖도록 주선했다. 그것도 이스트 오클랜드의 자신의 셋집에서 말이다. 인간의 도리를 잘 아는 안창호 부부가 무전취식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도우면서 미국 생활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드류 선교사 부부와 네 명의 자녀들도 한국어 소통이 가능했고, 신혼인 안창호 부부와 더불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상호 좋은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안창호에 대한 역사왜곡 두 번째는 지방색에 대한 오해다. 안창호의 지방색 편향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가 서북출신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특히 호남 출신들을 의도적으로 배척했다고 강변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들의 숫자가 수십 명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편가르기를 할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안창호의 은인이자 후견인인 드류 선교사가 미 남장로교 파송 호남 최초의 의사 선교사로서 호남인들과 동고동락을 했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그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안창호가 미주에서 최초로 조직했던 한인친목회도 샌프란시스코 코리아타운에서 고려 인삼 판매를 하던 한인들끼리 대놓고 싸우는 모습에 가슴아파 하며 만든 조직이었다. 이 한인친목회가 계기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한인교회가 탄생하였다. 최초의 해외 독립운동 단체였던 공립협회도 안창호가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는데 지방색 문제가 대두된 적이 없었다. 이후에 안창호가 주도한 단체에서도 지방색을 극복하고 각 지역별로 인재를 두루 배치하여 형평성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안창호에 대한 역사왜곡 세 번째는 공금유용에 관한 문제다. 필자가 드류 선교사의 샌프란시스코 활동을 연구하면서 원 사료들을 살펴본 바에 의할 것 같으면,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인하여 피해를 본 한인들을 위로하려고 고종 황제가 구호금을 드류 선교사에게 보냈다고 하는데, 그는 이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드류 선교사가 수령하지도 않은 구호금을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던 일제가 자신들의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일본 영사관을 통해 고종의 위로금을 안창호의 공립협회를 통해서 배분하려고 시도했다가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이런 일제의 간교한 책략을 간파했던 안창호와 드류 선교사는 고종 황제의 위로금을 배분하는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결국 고종의 구호금은 이름도 생소한 낙글린이라는 미국 선교사에 의해 피해를 본 한인들에게 배분되었고, 그 정확한 내용은 공립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를 통하여 투명하게 공개되었다. 드류 선교사는 한국말을 구사할 줄 알았으므로, 민간 차원에서 모금된 구호금을 배분하는 책임을 맡아서 배분 방법을 <공립신보>에 광고하였고, 배분 내용도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공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안창호가 고종의 위로금이든, 민간 차원의 구호금이든 돈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안창호에 대한 역사왜곡 네 번째는 폭력에 대한 것이다. 미주 독립운동가 중에서 처음부터 줄기차게 무력항일운동을 주창했던 인물은 박용만이었다. 이승만이나 안창호 모두 기본적으로 개조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 노선에 동의를 표했다. 물론 나중에는 이 둘의 입장도 차이를 보이면서 각자의 길을 갔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활동할 때도 안창호가 폭력에 휘말렸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미국에서 드류 선교사와 교류 하는 가운데 해외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그가 폭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독립을 위해서 적들에게 가한 폭력이 아니고,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족을 물리적으로 가해했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안창호가 미주 최초로 조직했던 한인친목회도 동족끼리 타지에서 벌였던 주먹 다툼을 만류하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안창호가 동족에게 물리적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는 주장이 참으로 억지스럽기 그지없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여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

필자가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역사적, 교회사적 인물들을 다루면서, 그들 각자가 연약한 인간임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내적 갈등을 극복해 가면서, 부족하여 어느 정도 실수를 범하며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그 중심과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견지하였던 이들을 많이 보아 왔다.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드류 선교사와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였듯이, 이승만도 더 다양한 선교사들과 교계 인사들과의 인맥을 통해 외교중심적인 자신만의 독립운동 노선을 설정하였다.


이 두 인물들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고,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각자의 노선대로 활동하였다. 이들 각자가 자신만의 노선을 지향하는 와중에서 상호에 대하여 의심을 살만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공을 공대로, 과는 과대로 온전히 감당해야 맞다. 과를 무시한 채, 공만을 심하게 부각하여 특정인을 완벽한 인물로 묘사한다거나 추앙하는, 심지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듯한 행동들은 기독교인의 올바른 태도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기독교 역사는 역사를 낳고, 생명은 생명을 낳는다

역사는 생명이기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면 즉시로 생명력을 위해 강하게 꿈틀대며 저항한다. 그래서 유사이래(有史以来)로 제아무리 왕우장상(王侯將相)이라 하더라도 역사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져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 인물에 대하여 논할 때, 그 인물의 ‘시종일관’하는 삶에 주목해야 하고, ‘사필규정’(史筆規正)의 자세로 편향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기술을 해야 역사의 생명성이 제대로 호흡을 하게 된다. 역사왜곡은 이단과 같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의 사실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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