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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와 이단의 고찰과 이단의 6가지 유형
송요한 목사의 이단분별법(4)
2024년 01월 11일 (목) 15:54:00 송요한 목사 webmaster@amennews.com

송요한 목사(중화권 선교사, 이단연구가, 백석)
 

가. 이단 사이비의 폐해

이단이 무엇인 줄 모르는 일반인들은 이단이나 정통 교회나 다를 바 없는 줄 알고 이단들이 벌이는 사회 일탈적 행위들이나 어이없는 행동들을 모두 기성교회들의 잘못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이단의 생성에는 일정부분 기성교회의 책임도 있다고 할 것이나 똑같이 취급당하는 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단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잡아먹는 이리다. 때로는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사악함에 기초한다. 겉으로는 신사적이고 윤리적인 듯 여겨지는 이단 종파들도 결국은 복음을 왜곡하거나 그 본질을 흐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기회를 뺏고 만다. 그러나 이단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들, 심지어 목사들도 이단 사이비의 활동을 그저 타 교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런 생각은 큰 오산이다. 결국 교회가 이단을 방치할 경우 심각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단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세계 초강대국이며 사회제도나 민주주의가 잘 발달해 있다는 미국에도 이단 사이비 단체들이 수없이 활동하고 있으며 적잖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Peoples Temple(인민사원)이라 불리는 사이비 단체는 1956년 교주 짐 존스(Jim Jones)에 의해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정통교단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교주 존스는 점점 이단성을 드러내었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남아메리카 가이아나(Guyana)로 신도들을 데리고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온갖 비윤리적인 행동과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는 제보를 받은 미국 정부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에 존스 측은 조사단과 이탈자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집단 자살극을 벌여 모두 917명이 죽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1978년 11월 18일의 일이었다.
 

   
<인민사원 신도들이 집단자살한 모습>

  

경제대국 일본도 사이비 종파로 인해 가슴 철렁한 일을 겪기도 하였다. 오옴진리교라는 요가에 뿌리를 둔 사이비 단체가 교주의 말이 실현됨을 보이기 위해 1995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터뜨려 12명이 죽고 5,500명이 중독되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들은 사회 불안을 조성한 다음 세상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려 하였다.
 

한국에서도 1987년 사이비 단체와 관련된 오대양이란 기업에서 32명이 변사체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한 집단자살로 결론내리고 수사를 종결지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진실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중국의 경우는 사이비로 인한 역사적 아픔이 크기도 하다.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運動, 1850-1864)은 기독교의 구세주 사상을 왜곡한 사람들이 일으킨 반란으로서 수천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청나라의 국운이 기우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중국의 신흥 사이비 집단들의 폐해도 심각하다. 사람 개개인의 생명 정도는 쉽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현 정권을 전복시키고 자기네 집단의 왕국 건설을 최종 목표로 삼아 활동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2023년 아프리카에서도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 “굶어 죽으면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교주 맥켄지 은텡게의 세뇌에 많은 신도들이 집단 아사한 사건이다. 당년 7월 현재 시신이 4백여구 이상 발견되었다. 심지어 시신에서 굶기만해서 죽지 않을 경우 타살한 정황도 보이며 장기 적출의 흔적도 있었다.
 

위의 실례들은 결국 이단 사이비들의 행태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짐작케 한다. 이단 사이비는 사람 개개인의 영혼을 파괴하며 더 나아가서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하나님의 교회까지도 파괴할 수 있는 세상의 불안요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 사이비는 철저히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명확히 주지하고 있어야 할 것은 신도가 바른 교리를 모른다고 구원을 못 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지식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단 종파에 빠져 그릇된 교리에 세뇌를 받으며, 그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구원의 가능성은 현격히 낮아진다고 봐야 한다. 이단에 빠진 사람은 그 조직과 접하면 접할수록 그 조직의 모순, 위선, 거짓과 교만을 지속적으로 목격하게 되는데, 신앙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환멸을 느껴 결국 그 멸망길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 거짓된 실체와 지속적인 타협의 과정을 거치며 끝까지 남는 자들은 그 조직의 핵심 조직원이 되어 제 갈 길로 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개인이 특정 이단 종파의 자칭 하나님, 혹은 재림주, 또는 그에 상당한다고 여겨지는 권위자를 추종하며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의 구원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 진짜를 멀리하고 가짜를 믿은 때문이다.

 

나. 이단의 6가지 유형  

1. 영지주의

2원론적인 신관념과 철학에 의거하여 무언가 영적인 지식을 소유할 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영지주의이다. 곧 이런 관념을 가진 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거나 성경을 왜곡한 무엇인가 특별하고 은밀한 것을 알거나 체험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명료한 진리를 흐리는 행동이다. 그런데 모든 이단은 이런 영지주의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억지로 객관화하여 진리인양 선포하다가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비정상적인 방법이나 비밀스러운 것을 통해 남보다 고상하고 높아지려는 영적 교만이 영지주의 이단 생성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철학적으로 영지주의의 대표적 기원은 플라톤의 2원론 사상과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에 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철학은 각종 이단 사이비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의 2원론. 플라톤(주전 427-347)은 이 세상을 현상(現像)과 이데아(Idea) 로 이해하며, 현상은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참 실체인 이데아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이런 논리에 깊이 심취하게 되면 성∙속을 극단적으로 분리하여 이해하게 된다. 오로지 영적인 것만이 가치가 있고 육체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금욕에 빠지기 쉽고 대인관계 또한 폐쇄적이 된다. 심지어 부부관계도 더럽다고 거부하고 가정을 버리거나 생업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 정도가 극에 달할 때는 심지어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여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한다.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교리를 세우고 조직을 형성할 때 하나의 이단 사이비 단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신플라톤주의는 기존의 플라톤주의에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스토아 학파 등을 통합한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일자(Hen, 一者, the One, 하나)로부터 유출되었다. 일자는 모든 존재를 초월한 신의 개념이다. 이 일자로부터 가장 먼저 유출된 것이 누스(Nous, 정신 혹은 이성)인데 일자는 누스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데,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개념으로서 모든 참된 것이 그 안에 들어있다. 그 다음에 유출된 것이 프쉬케(Psyche, Soul, 혼 혹은 영혼)이며, 맨 마지막에 유출된 것이 물질(질료)이다. 이 물질은 일자로부터 가장 멀고 불완전한 것이며 무의 경계선에 위치하는데 이것이 곧 세상이다. 혼과 물질이 합하여 생성되는 것이 생물들인데, 혼적 요소가 많을수록 고등생물이 된다. 여기서 귀천과 성∙속이 결정된다. 유출은 일자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에 멀리 갈수록 타락이요 악이다. 반대로 회귀를 통해 일자에 가까이 갈수록 구원이다.
 

플로티누스는 사람의 영혼이 엑스타시(Ecstasy)를 통해 일자에게로 회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엑스타시는 무아지경(無我之境), 황홀경(恍惚境)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기독교 외의 이교들은 대부분 이런 무아지경을 통한 구원을 추구한다. 또한 많은 기독교 이단들이 이런 플로티누스의 사상과 유사하다. 오늘날 불건전 단체들의 빈야드식 집회나 신비주의 운동도 이런 엑스타시 추구와 궤를 같이 한다. 엑스타시 혹은 무아지경이란 정신을 놓아버린 상태와 같은데 성경은 이런 것을 임의로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맑은 정신으로 기도하며 주를 섬기라고 한다(막13:35; 골4:2; 벧전5:8). 기독교는 정신을 차리고 믿는 종교이지 정신줄을 놓고 믿는 종교가 아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차용할 때 기독교의 사상들을 세속적 시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한계 또한 매우 명확한데 그것은 그 이론 자체가 범신론(汎神論)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영지주의와 밀접하기도 하다. 정통 개신교회는 범신론을 엄격히 배격한다. 그런데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이 신플라톤주의에 천착하느라 정도를 벗어난 측면이 있다.
 

2. 신비주의

특정한 영적 체험이나 직통계시, 은사체험 등에 몰입하여 성경의 가르침마저 무시하거나 그릇되게 해석하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을 신비주의 이단이라고 한다. 신비주의적 면모는 우리 주변에도 많다. 일부 목사들은 아래와 같은 형태로 말하기를 즐기는데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 기도 중에(혹은 꿈을 꾸든지 성경을 보든지 무슨 일을 하던 중에) 내게 계시하시기를 ‘……’ 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편 많은 은사 운동가들이 집회도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OO암병 환자가 있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오늘날 이런 식으로 말하며 권위를 세우는 사역자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잘못된 태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확신이 있는 깨달음이라도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당하다.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는 듯합니다.” 혹은 “기도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 이상을 넘어서는 태도는 신비주의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성도들은 ‘영적이다’, ‘영성이 있다’ 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사용한다. 그런데 그 영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마담 귀용(Madame Guyon, 1663-1727), 스웨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 등을 굉장히 영적인 사람들로 추앙하기도 한다. (이들을 영적으로 탁월하다며 추종하는 이단 종파들이 오늘날도 많은 형편이다) 이는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영성이 깊다고 할 것이 아니라 깊은 신비주의자들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그 체험들이 성경적이지 않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영성은 경건과 관련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따라 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겸손히 그분과 동행하는 삶의 방식’이 참된 영성인 것이다(미가 6:6-8).
 

그리고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나무랄 것이 아니나 은사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고함이 없다면 영적인 탐욕에 빠질 수도 있다. 은사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은사를 사모하는 이유에 대해 물으면 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한다. 과연 그런 순수한 마음뿐일까? 오히려 우리는 은사를 통해 자기 과시와 교만에 빠지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 과도한 은사 추구는 자칫하면 신비주의 이단에 빠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히 행하는 것이 모범 된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유명한 이단 사이비들은 한국 초기 교회의 신비주의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때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등으로 인해 복음이 크게 확산되었는데 1920-50년경 복음 진리를 그릇 이해한 일부 신도들이 신비주의로 흘러 큰 물의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곧 기복주의적인 토속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합해져서 황당한 주장을 하는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김성도, 백남주, 황국주 등은 이런 신비주의 운동의 효시자들이다. 성주교회를 결성한 김성도와 백남주 등은 신비 체험을 통해 인류 타락의 원인은 성적인 범죄였다고 여기며, 그것을 해결할 재림주가 여인의 배를 통해 조선 땅에 다시 올 것이라고 믿고 가르쳤다.
 

또 한편 황국주는 모습이 머리를 풀어헤치면 영락없이 성화 속의 예수님과 비슷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며 자기의 본래 목은 잘라지고 예수님의 목이 붙었다고 주장하며 많은 부녀자들을 유혹하고 간음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그 이론을 ‘목가름 교리’라고 하는데 ‘피가름’ 교리의 시조가 된다. 황국주는 피가름을 통한 영체교환 교리도 가르쳤는데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여 이론화한 것이 백남주와 그의 제자 김백문이다. 그들은 사탄과 하와의 성관계로 인해 더럽혀진 인류의 피를 재림주를 통해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피가름의 교리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김백문은 피가름 혼음교리와 김성도 등의 신비적 체험을 성경과 짜맞추어 [기독교 근본원리]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통일교 문선명의 [원리강론]과 매우 흡사하다. 따라서 문선명이 그의 스승이었던 김백문의 책을 배껴 일부 각색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김백문의 제자 중에는 후일 천부교의 교주가 된 박태선도 있었다. 그 박태선의 아류들이 결성한 것이 장막성전이며 그 장막성전의 아류들 중에는 구인회의 천국복음전도회가 있고 오늘날 가장 극성을 부리는 이만희의 신천지도 있다. 다른 크고 작은 이단들도 박태선으로부터 많이 분파되었다. 또 한편 문선명을 모방한 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정명석이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한국 이단 사이비들의 많은 수가 이 신비주의 계보로부터 분파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이 줄기로부터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신비주의 이단자들은 대부분 말씀에 대한 이해나 경건한 삶 보다는 현상에 집착한다. 무엇을 들었다 거나, 보았다 거나, 다녀왔다 거나 하며 미혹하는 것이 모두 이런 경우의 이단인 것이다. 개인이 무언가를 체험했다고 하며 그것을 기록하여 체계화해 믿을 경우 심각한 이단이 될 수 있다. 이단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람은 그 신앙이 얕은 수준에 머물게 되며 신앙이 성장한들 무속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마치 점쟁이나 무당 같은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은 빈야드식 체험주의나 그와 유사한 운동에 심취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같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신비주의적인 신앙행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며 답답하게 느껴져서 정통교회에 정착하기 어렵다. A라는 이단에 한번 빠졌던 사람이 그곳을 탈퇴하였지만 다시 B라는 또 다른 이단에 쉽게 빠지곤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적인 탐심과 영적인 허영심이 이런 경향의 근본 원인이라 할 것이다.
 

3. 기복주의

인간 탐심을 신앙에 접목하여 삐뚤어져 버린 경우를 기복주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복이 주어질 것을 가르친다. 그 복은 내세의 복이기도 하지만 이생의 복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보다 우선할 것은 내세의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은 내세의 영광을 위하여 이생의 고난과 어려움도 감내할 줄 알았다. 그리고 이생의 복에 결코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청빈을 추구하며 하늘의 소망 가운데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복주의는 복을 강조하되 주로 이생의 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물질의 복을 주는 복 방망이와 같은 존재 정도로 전락시킨다. 또한 가난은 곧 죄라는 관념을 가르치고 복을 주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갖게 한다. 그리고 자기들 무리에 들어오면 세상적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한마디로 무속적이며 샤머니즘적인 태도인데 많은 기복주의 이단들이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양은 대부분의 이단들이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생에서의 특별한 복이 자기들에게만 임한다고 가르친다.
 

정통교회 내에서라 할지라도 기복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은 가난을 죄로 여기기도 하며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심지어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도 하나님이 복 주신 때문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물론 성도가 세상적 복을 거부할 필요도 없고 물질을 죄악시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도한 집착과 그로인한 탈선에 있다(딤전 6:10; 히 13:5).
 

또 한편 형식적인 예배만 잘 드리면 모든 것이 잘 된다고 여기는 ‘예배만능주의’ 형태의 기복주의적 태도도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경우 형식적인 예배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교인들 삶에 만연해 있다. 물론 형식적인 예배도 소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제사에는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울 왕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버리셨다(삼상 13:8-14, 15:14-23).
 

기복주의 이단은 인간의 탐심이 빚은 왜곡된 신앙의 결과라 할 것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골 3:5).
 

4. 귀신파

영지주의, 신비주의, 기복주의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파생된 이단의 형태로서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많은 혼란을 주는 유형의 이단이다.
 

이들은 사탄(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 마귀)과 귀신들(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사람이 아픈 것도 사탄과 귀신 때문이요 무언가 일이 풀리지 않아도 모두 사탄과 귀신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물론 일정부분 사탄과 귀신이 작용하여 병도 주고 어려움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된 원인을 사탄과 귀신에게 돌리는 것은 본질을 크게 벗어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우려되는 것은 귀신파의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 문제의 근원을 인간의 범죄나 죄성에 두지 않고 모든 책임을 사탄에게로 돌리는 것에 있다. 원죄도 사탄 때문이요 자범죄도 사탄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파 신도들은 항상 귀신 쫓기에 힘을 쏟는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사실상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아담이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당신이 주신 여자가 그 열매를 나에게 주므로 먹었나이다”(창 3:12)하고 자기 범죄의 책임을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돌린 것과 같은 맥락을 띤다. 하와 또한 자기의 잘못을 뱀 때문이라고 변명하였다. (이렇게 변명으로 일관한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나야만 했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어야 했음을 우리는 잘 안다) 더욱이 귀신파의 책임 떠넘기기 논리는 곧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 당신이 만들어 두신 뱀이 나를 꼬이므로 내가 본심은 그렇지 않았지만 범죄하고 말았다”라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결국에는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결과를 낳는다.
 

성경의 내용을 볼 때 인류 타락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교만과 그 불순종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물론 사탄이 약간의 동기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적인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은 분명히 자연만물과 짐승들을 다스릴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창 1:28). 그런 사람에게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탄이 초자연적인 능력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아담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선악과를 먹게 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탄의 책임이겠지만 사탄은 그런 모습이 아닌 아담의 통제 아래 있는 한 마리 뱀의 모습으로서 나타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혹되어 타락했는데 이는 곧 인간이 제 스스로 꾀를 내어 타락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전 7:29). 그리고 타락 후의 아담은 자기 죄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고 하며 합리화시키는 가증함을 보인다. 이런 아담의 경향을 귀신파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탄 마귀의 처분은 주님께 맡기고, 내 죄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오로지 나에게 100% 있다고 인정하며 회개해야 마땅하다. 만약 내 죄의 책임을 1%라도 마귀에게 있다고 여지를 남긴다면 늘 내 죄책을 마귀에게 떠넘기며 합리화하려는 유혹에 직면할 것이다.
 

일단 귀신파의 논리에 빠지면 죄가 내 책임이 아니라는 일시적인 해방감(사실은 죄가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일시적인 카타르시스(정신적 만족)를 통해 기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런 방법을 내적치유(內的治癒)라는 명목으로 그릇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평안이다. 사람은 내가 악하여 지은 내 죄와 내 죄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는 참된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곧 귀신파의 논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온전한 회개가 불가능하게 한다. 회개를 한다고 한들 가벼운 것은 내 잘못이라고 하고, 큰 죄는 마귀 때문이라고 책임을 회피하기 십상이다. 또 한편 내 잘못을 전적으로 아뢰고 용서를 구하는 정상적인 회개가 아니라 내가 회개함을 통해 죄의 책임을 사탄에게 전가시킨다는 식의 왜곡된 형태의 회개가 나오게도 한다.
 

이런 모습은 기독교를 빙자한 샤머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신앙인의 모양은 취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일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더욱이 책임을 회피하며 거짓에 만족하고 살게 하므로 신앙도 거짓 신앙이 되고 만다.
 

또 한편 사람의 심령에 마귀의 유혹이 온다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의 마음에 악한 생각이 생겨난 것을 마귀가 알고 부추기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마15:19, 엡4:27-29). 귀신파는 그런 악한 생각도 모두 마귀가 주는 것으로 간주하기에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예수님을 팔 마음을 준 것도 사실 유다의 마음 속에 탐심이 있었던 것을 사탄이 더욱 부채질한 것으로 볼 수 있다(요 13:2). 성경은 유다를 본래 도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12:6).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것도 사탄이 충동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윗의 마음에 교만이 일어난 것을 보고 사탄이 그것을 부추겨 인구 조사로 몰아간 것을 말함이다. 그래서 다시 정신을 차린 다윗은 자기가 범죄했다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다. 귀신파의 논리처럼 내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사탄 때문에 범죄하게 되었다는 식의 태도는 다윗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대상 21:1-8). 그리고 사탄이 그 속에 가득하다(행 5:3)는 표현은 사람의 악한 생각이 그 마음 속에 가득함과 그것을 마귀가 부추기는 측면을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귀신들림 현상은 심령과 육체의 죄와 약함 속에 귀신이 틈탄 결과로 볼 수 있다.
 

영적 교만과 거짓에 기초한 책임회피적 자기 편리주의가 이 귀신파 출현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귀신파의 논리에 심취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속적인 신앙 태도를 보이곤 한다. 이는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에서 나타나는 경향과 다를 바 없지만 귀신을 강조하므로 더 사나운 측면이 있다. 귀신을 미워한다고 하면서 무당처럼 행세하거나 오히려 귀신들린 자들이나 취할만한 괴상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최근에 유행하는 ‘영적도해’ 이론에도 귀신파의 그런 면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세상은 특정지역마다 지역귀신들이 지배하고 있는데 이 견고한 귀신들의 진을 신도들의 땅 밟기, 대적기도, 선포기도 등을 통해 깨뜨리고 쫓아내야 영적인 승리가 달성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을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설득시키고 감화시키며 전도하고자 하기 보다는, 그 땅에 가서 땅을 밟고 ‘귀신아 떠나가라’라는 구호를 선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일을 위해 목숨을 걸기까지 한다. 현지선교사들과 싸우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면 영적인 승리가 오고, 불신자들과 이교도들이 모두 복음 앞에 무릎 꿇게 되는 것일까? 이는 한마디로 무속적이며 매우 유치한 발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마귀와 귀신을 이기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꾸준한 경건, 말씀, 기도, 성령의 은사 등을 통해 영적 우위에 설 때 가능한 것이지(막 9:26-29. 약 5:16), 무슨 특정한 구호를 외치며 땅을 밟는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행 19:11-16). 마귀와 귀신은 그렇게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벧전 5:8-10). 오늘날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은 복음이 들어가기 가장 어려운 땅이 되어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중동 땅은 예수님과 초대교회 사도들이 부지런히 밟았던 땅이건만 귀신들이 왜 아직까지 그곳에 강하게 진 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과 사도들은 땅 밟기의 실패자들일까?
 

마귀와 귀신은 영적 실체이다.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일정 지역에 특별히 강한 것이 아니라 일정 지역 사람들의 마음이 믿음과 관련하여 보다 완악하고 악령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가능할까? 그 사람들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외치면 그들이 회개하며 기독교로 개종할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도가 경건과 온유함으로 무장하고, 결과는 성령께 맡기며, 우공이산(寓公移山)의 태도로 그 불신자들에게 한걸음한걸음 다가가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합당한 해결책인 것이다.
 

한편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타락한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리고 성도는 그런 세상 속에 사는데 그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이해하면 귀신파 논리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1. 인간은 타락 후 본래의 능력을 상실하고 연약 해졌다. 그래서 타락 이전에 누렸던 탁월한 능력들(불사의 육체적 능력과 온전한 이성, 지식, 지혜, 영적인 지식, 거룩 등)을 모두 상실했다. 본래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영육이 모두 연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타락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이므로 영적 존재로서 훨씬 고등한 능력을 지닌 마귀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 사람이 마귀에 속하게 된 것은 마귀도 사람도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은 마귀의 유혹에 동조하여 하나님을 배신했다. 그러므로 한통속이 되고 말았다고 봐야 하는데 마귀가 훨씬 고등하기 때문에 사람이 그 아래 복속된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악인들의 아비 혹은 왕(요 8:44, 12:31), 혹은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마귀가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주 안에서만 역사할 수 있을 뿐이다(욥 1:6-12, 2:1-6).
 

3.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을 통해 중생한(거듭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성령은 성도 안에 영원히 내주하신다(요 14:16). 이처럼 성도는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성령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으므로 더이상 마귀의 통치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4. 성도가 범죄하는 것은 죄를 짓기 싫음에도 억지로 마귀가 죄를 짓게 한다기 보다는 자기 죄의 습관과 죄에 대한 욕망이 작용한 것이다. 곧 영적으로 구원은 받았지만 죄의 습성은 남아 있어서 죄의 달콤한 유혹에 늘 흔들린다는 말이다. 이런 마음을 본 마귀는 그가 죄를 더 잘 저지르도록 강하게 부추기므로 성도도 가끔 넘어진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갈수록 성장하며 그 유혹을 이겨 나간다.
 

5.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것은 사람 개인의 죄성과 마귀의 유혹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죄악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마귀가 역사하는 힘이 더욱 크다. 그들은 성령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기 때문에 더욱 쉽게 마귀의 조종을 받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마귀는 가끔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특정인을 도구로 삼아 주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곧 무당과 박수, 사악한 종교인, 사악한 사상가, 사악한 정치가, 사악한 기업가, 사악한 예술가, 사악한 범죄자 등이다.
 

5. 분리주의

기성교회와 자기들을 구분하여 자기들의 특별함을 강조하여 높이거나 구분 짓는 경향을 가진 모든 이단을 분리주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단들은 율법주의적이든지 율법폐기론(도덕폐기론)적이든지 둘 중의 한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전자는 자기들만이 이 시대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남은 백성이라고 일컬으며 분리를 추구하는 안식교의 율법주의적 경향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후자는 한번 구원받았으니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구원파 등의 태도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또한 모든 이단에게서 나타나는 분리주의적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기성교회는 다 멸망하고 자기들만이 구원받는다는 극단적인 관념이다. 아울러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기존의 질서나 전통을 전면 거부하는 경향도 있다. 곧 자기들이 제2의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항상 우리의 죄악과 모순들로 인해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함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개혁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뒤집어 엎는 혁명을 함부로 꿈꾸어서는 안 된다. 혁명적인 개혁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체계가 다시 정립될만한 교회의 종교개혁은 중세 1000년의 암흑기를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허락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루터도 ‘내가 이 썩어빠진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일어나리라’ 하며 계획적으로 교황권력에 맞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단 사이비들은 교회의 역사성이나 전통 등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멸시한다. 그래서 모두 뒤집어 엎어버린 새 세상 건설을 꿈꾼다.
 

한편 혹자는 정통교회도 이단들의 주장과 같이 자기들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곧 서로 같은 논리를 주고받는 것이므로 무슨 차이가 있냐고 말이다. 그러나 정통교회와 이단의 그런 주장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정통교회는 사도적 교회의 역사성과 그 역사 속에서 형성된 귀중한 신앙과 신학의 유산들-성경의 절대권위 인정, 4대신조, 종교개혁의 전통-을 믿고 중시한다. 이런 전통 위에 서 있다면 어느 정도 시각 차가 있다 할지라도 정통교회들은 서로 인정하며 상호 존중하고 있다. 실례로 오늘날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신학적 관점과 체제가 다르지만 상호 정통교회로 인정하며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단은 결성된 날로부터 교회의 사도적 역사성을 거부하거나 왜곡한다. 자기들 만이 참된 역사성 위에 서있다고 주장하든지 아니면 그런 역사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러면서 기성교회는 모두 부패하였다며 적대시하며 담을 쌓는다.
 

특히 이단과 정통교회는 교인이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기려 할 때 드러나는 태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정통교회는 일단 그 이유를 물으며 가급적 함께 하여 주기를 권하지만 신앙을 버리려 함이 아니라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가려한다면 축복하며 보내준다. 그러나 이단들은 자기들 교회만이 진리인데 떠나가면 저주를 받는다는 등 협박을 일삼으며 붙잡는다. 그리고 실재로 떠나는 사람을 죽이거나 감금, 테러하기도 한다.
 

또 한편 분리주의 이단은 지나친 권위주의나 계급주의적인 면을 띠기도 한다. 특정 지도자나 조직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어서 자기들 말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지도자가 강단에서 선포하는 내용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지도자나 조직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더 심한 경우는 자기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중 하나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 모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노골적으로 말하는 자도 있고 살짝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자도 있다. 이단 교주는 대부분 이런 카리스마로서 신도들을 단속하고 있다.
 

이런 분리주의 이단은 인간의 영적 교만과 영적 탐욕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 혼합주의

기독교의 순수성을 버리고 적당히 타협하기를 추구하여 이것저것 다른 종교의 것을 받아들이거나 그 비슷한 성향들을 받아들여 혼합하는 태도를 가진 모든 이단들을 혼합주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천주교)의 경우 혼합주의적인 면이 도를 넘어선 경우이다. 오늘날 개신교회 안에도 분별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의식이나 예전을 빙자하여 혼합주의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들어와 혼란을 초래하는 예도 있다. 그리고 정통교회 간판을 단 목회자라 할지라도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적인 사고를 가졌거나, 여타 이단들의 이론을 받아들여 적당히 섞어서 가르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모두 혼합주의적인 태도이다.
 

혼합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자기 교주나 단체의 가르침을 따라 성경을 거부하고 타종교에서나 있을법한 어떤 의식이나 행위를 반복한다. 또 하나는 특별한 교주를 따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기독교에도 구원이 있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회교나 기타 종교 혹은 이단에도 구원이 있으므로 굳이 구분하여 믿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태도이다. 전자의 경우는 확연하게 드러나는 점이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기성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되 잘 구분이 안 되게 슬그머니 들어와 있는 태도이므로 성도들은 주의하여야 한다. 이런 혼합주의가 교회에 만연하게 되면 교회는 결국 해체되고 말 것이다.
 

혼합주의가 나타나는 이유는 거짓 겸손과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는 탐심의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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