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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조선의 개척선교사들의 정착 과정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4)
2023년 12월 30일 (토) 01:01:56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백종근 목사/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은퇴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

버지니아 리치몬드(Richmond, VA)에 소재한 유니온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는 당시 콜롬비아 신학교(Columbia Theological Seminary와 더불어 남장로교를 대표하는 신학교로 원래는 햄던-시드니 대학의 신학부가 떨어져 나온 유서가 깊은 학교였다.
 

하위렴이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하던 그해(1892), 이미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는 전킨(William M. Junkin)과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야기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1891년 테네시 내쉬빌에서 열린 '전국신학생연합선교대회'에 강사로 왔던 북장로교 조선 선교사 언더우드와 조선인 윤치호가 조선 선교의 시급함을 호소할 때 큰 감동을 받고, 그길로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 선교를 지원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조선 선교사로 선발이 되어 파송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에 집회가 끝난 후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 선교를 지원한 사람은 전킨과 레이놀즈 말고도 카메론 존슨(Cameron Johnson) 그리고 맥코믹 출신의 테이트(Lewis B. Tate)등 4명이 함께 지원했다.
 

너무도 생소했던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된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후배 재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커다란 동기부여를 했을뿐더러 남북전쟁으로 분열된 채 침체를 맞은 교단에도 새로운 출구를 제시함으로써 큰 도전을 주고 있었다.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던 1894년 가을, 하위렴은 트랜실바니아(Transylvania) 노회(켄터키 렉싱턴(Lexington, KY)에 소재한 노회.)에서 안수를 받자마자 곧바로 그는 켄터키주 메이슨 카운티에 소재한 메이스 릭Mays lick 교회의 설교 목사로("Death of Rev. W. B. Harrison",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4, No. 12. Dec. 1928, pp. 252) 사역을 시작했지만, 그는 학창 시절 불태웠던 해외 선교사의 꿈을 버리지 않고 기도로 준비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96년 마침내 하위렴은 켄터키에서의 짧은 목회를 접고, 은둔의 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리고 앞서 떠났던 7인의 개척자의 뒤를 따라 단신으로 조선을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개척선교사들의 내한 여정

하위렴이 조선에 파송되기 이전에 먼저 내한했던 개척선교사들의 초기 정착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하위렴의 파송 행보와 연결된 초기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아 소개하기로 한다.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회에서 조선 선교를 결정하고 7명의 개척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하위렴이 내한하기 4년 전 1892년 2월이었다. 그들은 전킨 내외, 레이놀즈 내외, 그리고 테이트 선교사 남매와 데이비스 양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7명의 선교사는 최종적으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함께 만났다.
 

세인트루이스(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의 합류점에 위치하는 교통의 요지로 남북전쟁이 끝나고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 뉴욕, 필라델피아를 이어 미국 3위의 도시로 부상하면서 1904년에는 엑스포와 하계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는 그 당시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마더 로드(Mother Road; 1800년대 중반부터 위도 35도 선을 따라 건설되기 시작한 마찻길(Wagon Road)이었으나 후에 국도 66번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여러 갈래의 하이웨이로 노선이 갈라졌다.)로 불리던 총연장 2,500마일의 국도 66번이 지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켄터키에서도 서부로 나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일행은 테이트 남매의 모 교회인 센트럴 장로교회(Central Presbyterian Church)와 에비뉴 장로교회(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파송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장도壯途에 올랐다.
 

선교사 일행은 조선으로 귀국하는 주미공사 통역관이었던 이채연(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후에 대리공사로 재직했다.)의 부인을 우연히 만나 합류하게 되었는데 마침 미혼이던 데이비스 양이 이채연의 부인과 룸메이트가 되면서 두 사람은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코하마에 이르는 태평양의 뱃길(미국의 퍼시픽 메일 회사가 1867년 1월 1일부터 샌프란시스코-요코하마-홍콩을 잇는 정기선의 태평양 항로를 개설했다)을 항해하는 내내, 일행은 그녀로부터 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공부하며 보냈기 때문에 미지의 나라 조선으로 가는 멀고 먼 뱃길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와는 달리 전킨 부인과 레이놀즈 부인은 임신한 상태여서 2주간의 항해 내내 파도에 시달리느라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할 정도로 심한 뱃멀미로 시달렸다. 요코하마 항구에 당도할 즈음 이 두 사람은 거의 탈진상태였기 때문에 일행은 일정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데이비스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요코하마에서 당분간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일단 데이비스만 이채연의 부인을 대동하고 먼저 조선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때마침 요코하마에서 조선에 입국하려는 감리교 선교사 일행(북감리교 선교사 Arther W. Noble과 그의 아내 Mattie 그리고 Mr. Taft가 함께 승선했다.)이 있어 그들과 함께 고베를 거쳐 제물포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892년 10월 17일 제물포에 감격의 첫발을 내디딘 데이비스는 남장로교 최초의 내한 선교사가 된다.
 

스크랜튼(W. B. Scranton) 선교사 부부, 올링거(Rev. F. Ohlinger) 목사,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가 마중을 나와 환영해 주었다. 일행은 조계지 내에 이태(怡泰) 호텔이라 불리던 중국인이 경영하는 외국인 숙소(중국인 이태(怡泰)가 경영했던 호텔로 외국인들에게는 Steward's Topside Boarding House로 불렸으며 숙식을 제공하는 객잔(客棧)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객실 수는 8개로 그 당시 숙박료는 2원 정도였다. 후에 동흥루(東興樓:훗날 상호가 松竹樓로 바뀜)라는 청요리 집으로 다시 개업했다.)에다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쉬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물때를 맞추어 다시 작은 범선을 타고 한강을 10시간 정도 거슬러 마포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서둘러 여자들은 가마를 타고 남자들은 도성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이미 성문이 굳게 잠겨 있었으나 가마꾼들이 아주 익숙하게 성을 타고 올라가 성 안쪽의 높은 둔대(屯垈) 위에 서서 마펫 선교사가 준비해 둔 밧줄을 성벽 아래로 늘어뜨리자, 성 밖의 일행들은 밧줄을 붙잡고 성벽을 기어올라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성 안에 들어온 일행은 이채연 부인의 친절한 도움과 마펫 선교사의 안내로 미 공사관의 부속 의사였던 알렌의 숙소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요코하마에 남아있던 나머지 일행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한 달이 지나서였다(W.D. Reynolds, "Mr. Tate as a Pioneer" The Missionary Survey, Vol. 25, No. 10, Oct. 1929, pp. 207 제물포에 내린 것은 11월 3일 오후였다). 그들이 배에서 내릴 때는 데이비스와 달리 마펫을 비롯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조선 선교의 교두보 '딕시'(Dixie)

내한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곧바로 서소문 근처 전 독일 공사의 저택을 알렌으로부터 1,500불에 매입하고 전킨과 레이놀드 내외가 거주할 수 있도록 개조해 선교부 설치를 위한 교두보로 삼았는데 주변 선교사들은 이곳을 딕시(Dixie ; 미국 남북전쟁 때에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에 속한 11개 남부 주를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미국 남부 지방의 통칭이다.)라 불렀다.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매입했던 서소문의 독일 영사관 저택
(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상)』 서문당, 1987)

 

서소문 숙소에 7인 모두가 함께 거주하기에는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는 테이트 남매가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거주하기로 했으며 데이비스 양("Death of Mrs. H. G. Underwood" The Missionary Survey, Vol. 12, No. 4, Apr. 1922. pp. 281,. 데이비스가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민비의 주치의였던 Mrs. Underwood와 함께 간호사로서 민비를 돌보기도 했다.) 역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북장로교 독신 여선교사 숙소에서 도티(Susan A. Doty; 수잔 도티(Susan A. Doty, 1861~1930) 독신 선교사로 내한해 정신여학교 제3대 교장(1890~1904)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데이비스 보다 한 살이 더 많았으나 곧 친구가 되었다.)양과 함께 머물렀다. 무엇보다 조선의 사정에 전혀 어두웠던 선교사들은 초기 3년여 동안은 의사소통을 위한 조선어 학습에만 매달려야 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자 협력의 필요를 느낀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공의회 설치를 제안했다.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에서는 곧바로 그 제안에 합의하면서 이듬해인 1893년 1월 공의회를 설치했다. 공의회 첫날 회의에서 레이놀즈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노회가 조직될 때까지는 공의회가 개교회를 전권으로 치리할 수 있도록 결의하는 한편 잠정적으로 선교구역을 나누어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은 남장로교가 맡기로 했다.
 

남, 북장로교의 선교구역이 정해지고, 선교방침의 윤곽이 드러나자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전라감영이 있는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와, 전주를 서해로 이어주는 해상통로 군산에 지부 설치를 결정하고 레이놀드와 드루를 군산으로, 테이트 남매는 전주로 탐사 임무를 주어 내려보냈다.
 

선교사들이 전주와 군산으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지역에서 동학농민항쟁(1894)이 발발했다. 급기야 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점령되자 미국공사관에서는 이 지역 선교사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서울에 머물도록 지시를 내렸다. 1894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도 긴급하게 선교사들의 철수를 결정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곧바로 청일양국이 전쟁으로 치닫자,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도 불안한 국제 정세를 우려해 조선보다는 오히려 중국 선교를 강화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었으나, 조선 선교사들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보다 한해 전인 1893년 봄, 서울에서 태어난 전킨의 아들이(전킨의 첫째 아들 조지는 1893년 4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나 1894년 1월 30일 군산에서 사망했다. 동학농민항쟁으로 군산 선교지부 선교사들이 서울로 철수(1894.4.27)하기 3개월 전이었다.) 9개월 만에 사망하는 일이 있었고, 그해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레이놀즈가 북한산으로 피서를 갔다가 절간에서 낳은 첫아들마저 10일 만에 죽는 일이 생긴 터에, 어수선한 정세까지 맞물려 조선 선교는 처음부터 시련이었다.
 

비록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불안한 정세와 낯선 풍토에 적응하기조차 쉽지 않던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은 오히려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전킨은 서소문에서 예배 공동체를 열고 있었고, 레이놀즈와 데이비스 양 역시 인성부재(옛 중구 인현동 2가와 예관동 사이에 있던 고개. 선조의 7남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살았기 때문에 인성부재, 한자로 인성현(仁城峴)이라 하고 이를 줄여서 인현(仁峴)으로 불렀으며, 그 때문에 인현동의 이름이 생겼다. 이 근처에 북장로교 여선교사 숙소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남장로교 데이비스가 시작한 예배모임에 레이놀즈가 가세하면서 인성부재 채플로 불렸다.)에서 채플 모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후에 남장로교의 선교구역이 호남으로 결정되면서 안타깝게도 이들의 예배 처소가 조직교회로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지만,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남긴 귀중한 선교의 흔적이라 할 만하다.

   

남장로교회 7인의 개척선교시 맨 앞줄 데이비스(Linnie F. Davis) 양, 가운뎃줄 좌로부터 조선인 통역관 (장인택이란 설도 있으나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PCUSA) 문헌에는 이채연으로 되어있음), 테이트(Lewis B. Tate), 갓 태어난 아들 조지를 안고 있는 전킨(William M. Junkin), 레이놀드(William D. Reynolds), 테이트(Mattie S. Tate) 양, 뒷줄 좌로부터 전킨의 아내 메리 레이번(Mary Leyburn), 레이놀즈의 아내 볼링(Patsy Bolling).

 

백종근(白鐘根) 목사는 전북 군산에서 출생하였다. 한양대 공업화화과(BS), 동 대학원(MS), 산업연구원(KIET)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M. Div)를 획득하고 미국장로교(PCUSA) Covenant Presbytery에서 안수를 받았다.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하여 목회 사역을 내려놓았다. • 저서: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 ,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 『예수가 울다』 설교집이 있다. • Email: whitebell01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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