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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선교적 관점에서 보는 마태복음(13)
2023년 08월 01일 (화) 11:21:25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마 3:13-17

  예수님께서는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갈릴리에서 멀리 요단강까지 찾아오셨다. 비록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에 대해서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타나고 있다.1) 이 사건이 네 복음서에 모두 나타나는 이유는 ‘구원의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예비적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는 이와 관련하여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13). 이 구절에 나타나는 ‘이 때’(τότε)라는 부사는 어떤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해그너(D. Hagner)는 ‘이 때’라는 부사에 대해 “새로운 장면을 시작하면서 연결하기 위해 마태가 선호하는 단어로서 특정한 시간의 의미는 없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2)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점은 추정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 리더보스(H. Ridderbos)는 “그들은 친척이었기 때문에(눅 1:36) 요한이 예수님을 오랫동안 알았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3)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된 사건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운스(R. Mounce)는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에 대해 “복음서에 나타난 직접적으로 만난 것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라고 하였다.4) 그 당시 예수님은 무명 인사에 불과했지만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세례를 베푸는 사역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세례 요한에 대해 주목하고 관심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파송을 받은 조사단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종교 당국은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그의 정체성을 알아보기 위해 대표단을 보낸 것이다.5)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이 ‘메시야’나 혹은 ‘엘리야’ ‘그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6) 그리고 그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가 바로 ‘구원의 메시야’라는 것을 인지하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하였다.7)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구원의 메시야’이심을 세상에 분명하게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처음 만난 그 때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신 것이다(13). 이러한 요청을 듣고 그는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응답하게 되었다(14). 아마도 구원의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친히 세례를 요청하시는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므로
그의 예비적인 사역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공식적인 시작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예수님의 세례 요청에 대한 세례 요한이 이렇게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다.8) 여기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당신에게서 받아야 하는 세례’라는 표현은 아마도 11절에 언급된 ‘성령의 세례’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9) 마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요청하셨을 때 세례 요한이 ‘말렸다’라고 하였다(14a). 이 구절에 나타나는 ‘말리다’라는 동사는 ‘디아콜루오’(διακωλύω)인데 신약에서 단 한 번 이곳에 사용되고 있다.10) 이것은 ‘완강하게 혹은 철저하게 막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동사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님의 세례 요청을 받고 그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계속하여 사양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한이 이처럼 세례 베풀기를 주저했던 이유에 대해 해그너(D. Hagner)는 “예수님이 바로 그가 그의 길을 예비하였던 분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1)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카슨(D. Carson)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요청하신 것과 관련하여 요한이 망설인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그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기를 원했다”라는 것과 더 나아가 “그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회개와 죄의 고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2) 즉 그가 베풀었던 세례는 ‘죄 있는 자’가 죄를 고백하고 받는 것이기에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요청하실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제 허락하라”고 메시야의 권위로 강하게 요청하셨기 때문이다(15a).

그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해그너(D. Hagner)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그의 사역을 약속된 자에게 이어주며 그의 예비적인 사역은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는 점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것은 그의 사역의 공식적인 시작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라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13)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시고 구원의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역사적인 무대에 공식적으로 등장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그너(D. Hagner)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의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14)
 

예수님의 세례는 예언의 성취

죄 없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다.
즉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친히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 요청을 받고 완강하게 사양하는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대답하셨다(15). 여기서 예수님이 그에게 ‘허락하라’고 하시는 명령형(Ἄφες)의 어법을 사용하신 것은 ‘메시야의 권위’를 강조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5) 또한 15절에서 ‘아르티’(ἄρτι)라는 부사가 ‘허락하다’(ἀφίημι)라는 동사를 수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부사는 ‘이제’ 혹은 ‘즉시’(immediately)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즉시’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향해 아주 강한 어법으로 신속하게 세례를 베풀도록 명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했던 몇 가지 중요한 이유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했던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을 성취하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대답하셨다(15). 사실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이루다’라는 동사는 ‘플레로’(πληρόω)인데 ‘채우다’ 혹은 ‘성취하다’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성취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리스(L. Morris)는 “마태복음에서 ‘성취하다’라는 동사는 종종 예언이 성취되는 관점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여기서도 분명히 그런 뜻으로 사용되었다”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의에 대해서는 사 53:11에 나타나는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하였다.16)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11에서 장차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될 때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이러한 예언을 성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고 명하신 것이다(15a).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요청하시면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건드리(R. Gundry)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모든 의를 제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7) 이런 관점에서 카슨(D. Carson)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므로 그의 죽음을 예상하셨으며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획득하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8) 이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

죄가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그가 요구하시는 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두 번째 이유는 순종과 헌신의 모티브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을 기록한 것에 대해 모리스(L. Morris)는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사명을 위해 그 자신을 드리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9)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를 순종과 헌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순종하고 헌신하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뜻을 이루기 위한 순종과 헌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시는 차원에서 친히 세례를 받으시며 자신을 헌신하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카슨(D. Carson)은 특히 이사야서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고난의 종’으로 예언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종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고난받고 죽음으로 모든 의를 이루시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므로 그에게 주어진 사역을 성취하실 결심을 공표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20)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언급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5). 이 구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합당한’이라는 표현은 ‘프레포’(πρέπω)라는 동사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서는 이곳에서 단 한 번 사용되고 있다.

15절에서 언급된 ‘프레포’(πρέπω)라는 동사는 문자적으로는 ‘적합하다’ 혹은 ‘어울리다’라는 뜻이 있다.21) 그러나 이곳에서 마태는 ‘프레포’(πρέπω)라는 동사를 분사형(πρέπον)으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어울리는’ 혹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마태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목적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죄인들이 받아야만 하는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그가 요구하시는 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과정에 함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죄인과 동일시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시므로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하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므로
장차 그와 연합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동일시’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으시므로 자신과 그들을 동일시하신 것이라고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운스(R. Mounce)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에 대해 “백성들과의 연대성(solidarity with the people)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22)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리더보스(H. Ridderbos) 역시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에 대해 “모든 인류, 즉 죄인과의 연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3) 또한 프란스(R. France)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례를 통해 참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24) 따라서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자신과 죄인들을 동일시하시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시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운스(R. Mounce)는 15절에 나타난 ‘우리에게’(ἡμῖν)라고 하는 대명사에 대해 “예수님과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과 세례를 받으러 오는 모든 사람을 언급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회개하는 모든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25) 해그너(D. Hagner)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에 대해 “그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백성과의 완전한 동일시를 이루셨고 순종하는 자세로 이런 역할을 수행하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26) 이처럼 세례를 받으시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같은 입장이 되고 연대하시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죄인이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되는 것처럼27)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낮아지시고 세례를 받으시므로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하시고 장차 그와 연합한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 선교에 부르심을 받은 이 시대의 제자들이 어떠한 자세로 선교에 헌신해야 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례 과정을 통해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주변의 죄인들, 세리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대하거나 대립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라고 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시므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그들의 상황에 들어가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8) 이것이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건드리(R. Gundry)는 “예수님 자신이 낮아지심을 보여주시며 놀라울 정도의 겸손을 강조하신 것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29)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헌신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자신들과 선교 현장의 사람들을 동일시하는 모습으로 선교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주(註)

1) cf.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모든 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만(막 1:9-11, 눅 3:21-22, 요 1:32-34) 마태복음의 기록과는 차이점이 있다. 마가는 병행구절에서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왔다”고 하여(막 1:9) ‘나사렛’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마태는 생략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에는 요한이 세례를 주었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눅 3:1-21절의 내용을 살펴볼 때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4절과 15절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Donald A. Hagner, op. cit., 55. 
3) H. N. Ridderbos, op. cit., 58.
4) Robert H. Mounce, op. cit., 24.
5) 요 1:19,
6) 요 1:20-21.
7) 요 1:29.
8) D. A. Carson, op. cit., 107.
9) Ibid., 57.
10) ‘디아콜루오’(διακωλύω)는 ‘~을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디아’(διά)와 ‘방해하다’는 뜻의 동사 ‘콜루오’(κωλύω)의 합성어로 ‘완강하게 막는 것’을 의미한다. 
11) Donald A. Hagner, op. cit., 55. 
12) D. A. Carson, op. cit., 107.
13) Donald A. Hagner, op. cit., 56.
14) Ibid.
15) Ibid., 55.
16) Leon Morris, op. cit., 65.
17) Robert H. Gundry, op. cit., 51.
18) D. A. Carson, op. cit., 107.
19) Leon Morris, op. cit., 65.
20) D. A. Carson, op. cit.,108.
21) cf. 고전 11:13, 엡 5:3, 딘전 2:10, 딛 2:1, 히 2:10, 7:26. 건드리(R. Gundry)는 ‘프레포’(πρέπω)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18:7에 나타나고 있는 ‘필연적이다’라는 뜻이 있는 ‘아낭케’(ἀνάγκη)와 유사한 뜻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충분하다’는 뜻이 있는 ‘아르케톤’(ἀρκετὸν)(6:34, 10:25), ‘마땅하다’는 뜻의 ‘데이’(δεῖ)(18:33, 25:27, 26:54), 그리고 ‘유익하다’는 뜻이 있는 ‘숨페레이’(συμφέρει)라는 단어(5:29, 30, 18:6, 19:10)와도 유사한 뜻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Robert H. Gundry, op. cit., 51).
22) Robert Mounce, op. cit., 25. 
23) H. N. Ridderbos, op. cit., 59.
24) T. F. France, op. cit., 94.
25) Robert H. Mounce, op. cit., 25.
26) Donald Hagner, op. cit., 57.
27) 롬 6:3.
28) 방동섭, 선교 없이 교회 없습니다,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0, 105.
29) Robert H. Gundry, op. cit., 51. 건드리(R. Gundry)는 15절과 함께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묘사하는 2:23, 11:29, 21:5의 표현들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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