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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세례 요한
선교적 관점에서 보는 마태복음(12)
2023년 07월 24일 (월) 14:53:10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마 3:11-1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능력이 충만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지만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며
그 뜻을 이루시는 겸손한 종이시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사역하는 동안 유대 사회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마태는 그에 대해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그에게 나오게 되었으며”(5) 또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6).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넘어서지 않았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구속사의 위치에 대해 이사야 40:3의 예언을 인용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라고 하였다(3). 따라서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라고 할 수 있다.1)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1)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본질적인 차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본질적인 차이는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전하는 자라면
메시야는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시는 분이시며
그 나라의 주인이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철저하게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소개할 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11b). 이 구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내 뒤에 오시는 자’라고 하였다. 해그너(D. Hagner)는 ‘오시는 자’(ὁ ἐρχόμενος)라는 표현에 대해 ‘메시야’를 지칭하는 ‘전문적인 용어’라고 하였다.3) 세례 요한이 여기서 특별히 이 표현을 언급한 것은 당시 유대 백성들 가운데는 그를 ‘엘리야’ 선지자나 혹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러고 할 수 있을 것이다.4) 따라서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 단지 그를 ‘기다리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뒤에 오신 자’가 있다는 표현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둘째,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보다 능력이 많다”라고 하였다(11b). 이 구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나보다 능력이 많다”(ἰσχυρότερός μού)라고 비교급으로 표현한 것은 단순한 비교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차이가 있음을 세례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 메시야와 세례 요한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해그너(D. Hagner)는 “메시야가 가지고 올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6) 즉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사람들에게 단지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자라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그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라고 고백하였다(11b). 당시 ‘신을 드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이었으나 심지어 노예가 하는 그런 천한 일도 자신에게는 과할 정도로 장차 오실 메시야가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는 세례 요한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이 시대의 제자들에게도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영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선교 현장에서 언제나 유지해야 하는 자세가 이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키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만을 높이는 자세가 제자들에게 요구된다. 그렇게 할 때 그가 증거하는 메시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전하게 될 것이다.
 

‘불과 성령의 세례’의 의미

장차 오실 예수님이 베푸실
‘불의 세례’는 ‘심판’을 뜻하며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복’을
가져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베푸실
‘불과 성령의 세례’는
‘심판’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구원의 축복’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은 11절에서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에 대해 세례의 관점에서 언급하면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베푼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회개하도록’(εἰς μετάνοιαν)이라는 표현은 세례의 목표나 혹은 결과가 ‘회개’라는 뜻은 아니다.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 해그너(D. Hagner)는 ‘회개와 관련하여’ 혹은 ‘회개하는 것에 동의하여’라는 뜻이라고 하면서 “마태복음에만 나타나는 이 표현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고조시키고 있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7) 세례 요한은 여기서 예수님에 대해 자신과 달리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11c).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해석을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성령과 불의 세례’를 ‘심판’의 관점에서 보는 해석이 있다. 여기 ‘불’(πῦρ)이라는 표현에 대해 마운스(R. Mounce)는 “마태가 그의 복음서 전체에서 심판의 상징으로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8) 프란스(R. France)는 ‘불’에 대해 “정화하는 것이며 가치가 없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라고 하면서 “예수님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시며 불의 이러한 파괴적인 요소에 대해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하고 있다.9) 리더보스(H. Ridderbos)도 ‘불’에 대해 “여기서는 성령 은사의 상징이 아니라 심판의 불이라”라고 하면서 “불의 세례는 임박한 심판이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완전한 멸망을 가져올 것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10) 그렇다면 여기 언급된 ‘성령의 세례’도 이처럼 ‘심판’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해그너(D. Hagner)는 “세례 요한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따라서 ‘성령’은 ‘불’과 함께 작용하는 심판의 ‘바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많은 학자가 수용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11)

둘째,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에 대해 ‘정결케 하는 사역’의 개념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란스(R. France)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메시야 시대에 있을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부어주심을 바라보았다(cf. 사 32:15, 44:3, 겔 36:26-27, 39:29, 욜 2:28-29)”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불에 의한 정화도 예언자들의 소망이었다(cf. 사 1:25, 4:4, 슥 13:9, 말 3:2)”라고 하였다.12)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힐(D. Hill)도 “성령의 세례와 불의 세례는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종말론적인 임하심을 통해 나타나는 참 이스라엘을 위한 깨끗게 하심과 정화를 의미하고 있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13) 따라서 모리스(L. Morris)는 세례 요한이 언급했던 ‘성령의 세례’는 “정화(purification)를 뜻하고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일부 학자들은 ‘불’이 ‘심판’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불’이 ‘성령’과 연결된 것을 볼 때 ‘성령’이 내주하시므로 정결하게 되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14) 즉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과 불의 세례’를 ‘정결 사역’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11절에 언급된 ‘불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의 의미를 ‘심판’과 ‘구원의 복’이라는 이중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예언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메시야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심판의 영’이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들을 정결케 하시는 ‘축복의 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15) 특히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고 언급했는데(사 4:4) 이것은 장차 구원의 메시야가 오셔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그의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주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예언은 메시야가 심판과 정결의 과정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불과 성령의 세례’를 이해한다면 이것은 ‘심판’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구원의 축복’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성령의 세례’의 양면성

예수님이 베푸실
‘불’과 ‘성령’의 세례는
양면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불’과 ‘성령’의 세례는
인간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구원의 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그너(D. Hagner)는 “예수님이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라고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에 대해 “약속된 자가 오시면 회개를 촉구하는 부정적인 것뿐 아니라 긍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에 대한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6) 따라서 예수님이 베푸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 양면성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건드리(R. Gundry)는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이라는 오직 하나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지만 열매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17) 즉 ‘불의 세례’는 ‘심판’의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면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은사’의 차원을 뜻하며, ‘성령의 효력 있는 복’, 즉 ‘구원의 복’을 가져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과 성령의 세례’는 ‘심판’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시는 ‘구원의 축복’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세례’에 관한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될 것이며(행 1:5, 8), 또한 이러한 영적인 혜택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례 요한이 언급한 예수님의 ‘불’과 ‘성령’의 세례는 인간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구원의 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언급한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진술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과 ‘성령’의 ‘메시야의 세례’는 본질적으로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과 ‘성령’의 세례는 이 세상에 메시야가 오심으로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힐(D. Hill)은 11절에 나타난 예수님이 베푸시게 되는 ‘불’과 ‘성령’의 세례와 12절에 언급된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구분하면서 ‘불’과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는 “죄를 정결하게 하고 깨끗케 하는 ‘구속론적 심판’(redemptive judgment)을 뜻하고 있다”라고 하였다.18) 이러한 관점에서 따라서 프란스(R. France)는 “심판의 개념조차도 예수님 안에서는 다가오는 구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19) 즉 ‘불’과 ‘성령’의 세례는 인간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구원의 복’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심판의 주님이신 예수님

‘알곡’과 ‘쭉정이’를
정확하게 구분한 후에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게 될
예수님의 영원한 심판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본질적인 차이는 ‘심판’의 차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장차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12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키’를 들고 있는 분으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키’라는 단어는 ‘프투온’(πτύον)인데 신약에서는 단지 이곳과 병행 구절인 눅 3:17에서 두 번 나타나고 있다. 이 단어는 추수할 때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기 위해 사용하는 ‘농기구’를 뜻한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손에 키를 들고 있는 분’이라고 한 것은 그가 친히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는 ‘심판의 주님’이라는 것을 증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0)

12절에 나타나는 “손에 키를 들고 있다”라는 표현에 대해 모리스(L. Morris)는 “구분하는 과정이 시작되고 있다”라는 뜻이라고 언급하면서 특히 이 장면은 “심판이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21) 세례 요한은 심판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실행하실 심판이 장차 두 가지 단계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예수님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심판을 시작하실 것이다. 12절에 나타나는 ‘손에 키를 들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손에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정확하게 구분하실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심판의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마치신 후에 예수님은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에 태우시게 되는’ 심판의 두 번째 단계를 실행하실 것이다.22) 따라서 심판의 두 번째 단계가 심판의 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고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게 되는’ 심판은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리더보스(H. Ridderbos)는 “이 시대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의 가시적인 구분은 없으며(13:30) 최후 심판 때에 키질이 있게 될 것이다”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23) 마지막 심판 때에 ‘키질’을 통해 ‘곳간’에 들어갈 ‘알곡’과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 태우게 될 ‘쭉정이’가 분리될 것이며 이것이 심판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곳간’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들어가게 되는 ‘천국’을 비유하며24) ‘쭉정이’가 들어가게 될 ‘꺼지지 않는 불’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이 ‘종말론적 심판’의 결과로 들어가게 될 ‘지옥’을 비유하고 있다.25)


정체성이 중요하다

이 시대의 사역자들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례 요한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역자들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해 ‘광야의 소리’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마태는 이처럼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님과 세례 요한 사이에는 무한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은 그가 광야에서 특이한 삶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유지하며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갔다는 면에서 그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그너(D. Hagner)는 세례 요한의 모습에 대해 “그가 해야 하는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라고 하였다.26) 당시 많은 유대인이 세례 요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얼마든지 자신의 위치를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를 향하여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결코 자신을 들어내거나 자신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하였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시대의 제자들도 세례 요한이 걸었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교 현장에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의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만을 높이고 그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전하는 사명에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이 가야 하는 길이고 사명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제자들이 선교 현장에서 대중적 인기나 세속적인 야망을 추구하게 된다면 결국 자신의 위치를 넘어가게 될 것이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의 선교 현장에서 이러한 왜곡된 제자들의 모습이 자주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선교 현장에 파송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전하기 위해 ‘광야의 소리’가 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이 시댕의 제자들이 이러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례 요한처럼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생을 나름대로 사역하며 살았으나 마지막 때에 그 결과는 오히려 주님의 엄중한 심판에 직면하게 되어 예수님과 분리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27)

 

주(註)

1) 요 1:1, 14.
2) cf. 사 40:8. 
3) Donald A. Hagner, op. cit., 51. cf. 시 118:26, 11:3, 21:9, 23:39, 히 10:37,
4) 마태는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당시 유대 종교 당국자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조사했던 것을 기록하고 있다(요 1:19-28). 
5) 이스쿠로데로스’(ἰσχυρότερός)는 ‘능력이 있는’의 뜻이 있는 형용사 ‘이스쿠로스’(ἰσχυρός)의 비교급이다. 이 단어는 ‘강하게 하다’ 혹은 ‘능력이 있다’는 뜻의 동사 ‘이스쿠오’(ἰσχύ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6) Donald A. Hagner, op. cit., 50.
7) Ibid., 51.
8) Robert H. Mounce, op. cit., 24. cf. 5:22, 7:19, 13:40, 42, 18:8, 25:41. 
9) R. T. France, op. cit., 93. cf. 13:30.
10) H. N. Ridderbos, op. cit., 55. 
11) D. A. Hagner, op. cit., 51. ‘성령’을 ‘심판의 바람’으로 해석하는 견해의 대표적인 학자로 해그너(D. Hagner)는 바렛(C. K. Barett)을 들고 있다. 
12) R. T. France, op. cit., 93.
13) David Hill, op. cit., 94. ‘성령’과 관련하여 힐(D. Hill)은 성령의 부어주심이 일어난 오순절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성령’과 ‘불’ 양자를 ‘심판’의 모티브로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개념이 ‘쿰란’ 공동체에서도 나타나는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4) Leon Morris, op. cit., 62. 모리스(L. Morris)는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성령과 불의 세례’를 비교하며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한 것을 지적하면서(Ibid., 61)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언급한 것에 관하여 세례 요한이 “요엘 선지자에 의해 약속된 대로 성령의 부어주심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욜 2:28, 욜 2:30절에는 ‘불’이 언급되어 있음)”고 하였다. 
15) cf. 사 4:4, 겔 36:25-27, 39:29, 요엘 2:28.
16) D. A. Hagner, op. cit., 51. 
17) Robert H. Gundry, op. cit., 49. cf. 13:24-30, 36-43, 47-50, 25:31-46.
18) David Hill, op. cit., 94. 
19) R. T. France, op. cit., 93.
20) cf. 시 1:4, 사 5:24, 단 2:35, 호 13:3.
21) Leon Morris, op. cit., 62.
22) cf. 사 34:10, 66:24, 렘 7:20. 
23) H. N. Ridderbos, op. cit., 56.
24) cf. 6:26, 13:30, 눅 3:17, 12:18, 24. 
25) D. A. Carson, op. cit., 105. cf. 사 34:10. 66:24, 렘 7:20, 막 9:43, 눅 3:17, 
26) Donald A. Hagner, op. cit., 52.
27) cf. 7: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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