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훼퍼

디트리히 본 훼퍼(1906∼1945)는 루터교회의 목사요 신학자로 2차 대전 이후 각종 신학의 흐름에 출발점이 되는 통찰력을 제공했다. 천재적인 신학자로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히틀러를 반대해서 39세의 나이에 처형당한다. 1951년 옥중서한이 출판되면서부터 명성이 전세계에 알려진다.

◆ 천재의 극한상황

베르린 대학의 심리학교수의 여덟 아이들 중 하나였던 본 훼퍼는 21살에 베르린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 수학을 한 뒤에 베르린 대학에서 교목을 하며 강의를 했다. 이미 히틀러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는 고백교회의 일원이 된다.

마르틴 니묄러에 의해 이끌려진 고백교회는 독일 목사 중 1/3이 가입해 있었다. 1934년 바르멘 선언으로 나치에 대항한다. 바르멘 선언은 오직 예수와 그의 말씀만이 교회의 주가 되며 교회는 다른 그 무엇도 주로 인정할 수도 따를 수도 없음을 명백히 했다.

2년간 목회를 한 뒤에 본 훼퍼는 핀켄발데에 있는 고백교회 신학교를 인도한다. 2년 후 나치는 이 신학교를 폐쇄함과 동시에 본 훼퍼에게 출판과 강의를 금지시킨다. 1939년 미국에서 강의할 기회가 열렸지만 동료들과 고난을 함께 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간다.

반 나치 운동에 가입한 그는 히틀러의 암살음모에 가담한다. 암살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2년간을 감옥에 있다가 사형된다. 그 기간의 혹독한 영적인 시련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그때의 기록한 내용들이 후대 신학자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특별히 성숙한 세계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역할이 무엇인지의 해명은 신정통 이후의 각종 신학 조류의 출발점이 된다. 본 훼퍼는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계몽주의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인간의 이성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하나님과 성경의 하나님, 기계에서 나오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구분하면서 성숙한 세계에서 신자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사실상 감옥과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상도 극단적으로 밀려졌음을 참조해야 한다.

◆ 성숙한 세계

성숙한 세계는 계몽주의 사고의 산물이다. 칸트에 의하면 계몽주의란 인간이 미성숙에서 헤쳐 나온다는 말이다. 이와 대조적인 신앙적 단어는 대각성이다. 죽었던 영혼이 깨어나는 것이다. 중생이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하지만 계몽주의란 미신과 오류에 젖어 있는 인간 이성을 밝혀준다는 의미이다.

전통적인 신앙관에서 보면 대각성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의 영을 살리는 극적인 과정이 나온다. 중생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영적인 것을 알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는 인간에게 본래부터 이성이 있었다. 이를 계몽시켜주면 스스로 일어난다.

이 스스로 일어나는 본성을 자율성이라고 한다. 자율성은 자연은 물론 학문, 예술, 윤리와 종교의 법칙을 찾아 인류를 발전하게 만든다. 자율성이 발휘될수록 인간은 성숙한 존재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 나간다. 마치 아이들이 자라서 스스로 자기의 삶을 만듦과 같다.

기독교는 하나님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계몽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율성이 스스로 최상의 길을 찾아간다고 보았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타락했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본 훼퍼는 이러한 계몽주의 자율성이 현대에 와서 완전에 도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자율성을 회복한 만큼 하나님이 할 일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학문적인 발전은 하나님을 변두리로 밀어냈다. 이제 하나님은 죽음, 죄, 부활 등 최후문제들을 다루는 해결사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하나님은 그러한 틈을 채우는 자에 불과하기에 본 훼퍼는 성숙한 세계에서는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 문제나 해결하는 종이 아니다. 인간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사회와 더불어 가는 신이다.

◆ 종교 없는 시대의 신앙

성숙한 세계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스런 상황에 관여하지 않는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숙명이 수행되도록 버려 두신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피난처와 도피처였다. 그러나 이제는 성숙한 인간들을 고난과 죽음 가운데 버려 두신다.
하나님은 알라딘의 램프에서처럼 소원을 다 들어주는 요정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실 때처럼 버려 두신다. 그래서 우리의 숙명이 쓰고 아프게 수행되도록 내버려두신다. 여기서 성숙한 신자의 경험이 나온다.

그러니까 신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 짐을 지고 가야 한다. 요행과 도움을 바라는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도움이 없어도 그의 뜻을 깨닫고 믿는 성숙한 신앙이다. 이것이 본 훼퍼가 마지막까지 경험하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음에 내버려두셨다.

세상일로부터 물러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계 속에 함께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지시는 하나님은 강한 승리자로서가 아니라 무능한 자로서 고난받는 자로서 계신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또한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된다.

편지에 쓴 조각조각의 내용을 종합해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절규는 그 이후 자유주의자들에게 온갖 괴상한 신학을 만들어 내게 만든다. 신죽음의 신학, 세속도시, 정치신학, 과정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 각종 새로운 방향의 주제를 제공해 준 것이다.

출발은 교회적으로 전통적인 신학으로 시작하였으나 죽음 앞의 극한 상황은 이 천재를 극단으로 몰아갔다. 신정통이후 사람들의 관심은 훨씬 더 이 땅과 거기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극단적인 표현 하나하나는 여러 신학 흐름의 시발점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