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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가계저주론’ 이윤호 목사의 반론에 대한 정훈택 교수의 반박(完)
2003년 07월 02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정훈택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이윤호는 가계 저주의 종결이 신약성경의 종말론과 맞물려 있는 것처럼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신분은 변했지만 상태는 아직 변하지 않았음을 말하면서, 이것을 믿는 자들이 아직 저주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 그 저주는 가계를 타고 흘러 내려오기 때문에 본인의 신앙, 행위, 책임 등과 하등 관계없이 온갖 불행과 고통에 굴복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윤호가 개발한 가계의 저주를 추방하는 새로운 비법 즉 가계 치유론을 통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과 결합시키고 있다.

지난번에도 본인은 그의 저주 개념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통치행위로서의 저주 즉 심판과 턱없이 다름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서의 저주와 관계되어 있는 성경의 구원론, 종말론, 칭의론, 성화론, 영화론은 그의 가계 저주론과 하등 관계가 없다. 즉 구원론과 종말론이 성경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부정한 힘, 미신적 세력으로서의 저주의 계속이나 가계를 타고 흐르는 저주의 지속을 증명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윤호는 자신의 가계 저주론을 성경의 구원론, 종말론과 결합하여 놓았다.

그의 글, 특히 신자들이 온갖 저주 아래 살고 있다는 주장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다는 성경의 진술과 너무나 다르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오용함으로써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이미 영생을 가졌고 따라서 죽지 않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서 함께 하늘나라에 앉아 있다는 성경의 신비한 진술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윤호가 선과 악, 세력으로서의 축복과 저주를 서로 보완 개념으로 보는 한, 교회가 일찌감치 이단으로 정죄한 이원론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선한 세계와 악한 세계, 선한 하나님과 악한 사탄, 하나님의 축복과 사탄의 저주를 이원론적으로 결합한 것이 그의 가계 저주/치유론이다.

유효한 축복과 저주란 하나님의 통치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성경적 관점은 축복과 저주를 정반대 개념으로 보는 일원론이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하신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저주의 철회를 뜻한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의 포기를 뜻한다. 축복과 저주는 빛과 어두움처럼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의 오심, 삶,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으로 확립되고 보장되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저주는 없다. 그런 것이 가계를 타고 개인에게로 흘러온다는 주장은 설 곳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요 3:17).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고 다스리신다는 일원론적 시각에서는 구원이란 따라서 한 편의 진술로도 충분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신약시대의 선언은 사탄의 나라가 정복되었음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것이 성경이 구원론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면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가계를 타고 흐르는 저주도 추방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가장 강력하게 말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의 대속적 사역을 제한하는 것이며 그 부족분을 보충한다는 미명 하에 가계 치유론을 첨가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족성을 논증하고 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다른 것을 첨가하려고 하자 이러한 움직임을 신랄하게 책망한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이 구절은 이윤호가 말하는 가계의 저주와 관련된 그런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충족성에 다른 어떤 추가적 사항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는 단호한 진술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사 내셨다면” 이윤호가 말하는 가계의 저주란 개념은 들어설 자리도 없다. 그런데 이윤호는 신자들이 여전히 온갖 저주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저주를 신자들의 행복한 삶을 해치는 힘, 세력, 그 결과 등으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행위로서의 저주를 알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런 저주에서 우리를 “(값을 주고) 사 내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윤호가 가계 저주론을 증명한다고 설명하는 구원론이나 종말론이란 신자들에게 무엇이 나타나느냐를 설명한 부분이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은 신자들의 신분, 상태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다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부정해 버린 것이다. 즉 구속사역의 결과와 구속사역 자체를 혼동하는 길로 들어서고 있다. 결과를 가지고 구속 사역을 재해석하는 길이다. 

 칭의, 성화, 영화를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니다. 또 가계의 저주를 증명하는 것이 되지도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칭의, 성화, 영화가 가능한 것이다. 빌립보서 3장 20~21절,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 요한일서 3장 2절은 이윤호가 주장하는 “모든 저주로부터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증언하는” 구절이 아니다. 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림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 가계를 따라 흐르는 저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구절이다.

이에 반해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더 많은 구절들이 있다. 신자들은 단순히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만 말해지지 않고 완벽한 구원을 이미 얻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함께 신자들의 구속받은 신분과 상태가 과거형으로 말해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밝은 면만을 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긍정적인 부분만을 조명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부분은 사실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출현과 함께 그것은 극복된 것이며 정복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에게 현실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신자들에게 성화의 필요와 영화를 말하는 부분에서도 성도들이 땅에서 얻는 영생, 구원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이런 구절에 초점을 맞추면 이윤호의 저주론이 맞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가계 저주론과 치유론은 더욱 들어설 조그만 여백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낸 이론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을 다른 종교로부터 가져와서 기독교적 옷을 입히려는 것이다.

만약 이윤호의 주장대로라면 이 중요한 내용이 신약성경에 긍정적으로, 명시적으로 거론되지 않은 것을 오히려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예를 들어, 날 때부터 태어난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그 자신의 죄 때문인지 예수님께 질문한 부분이 있다. 예수님은 이윤호에게 필요한 답을 주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라고 대답하셨다(요 9:3). 그의 주장을 지원하는 말은 없지만 반대하는 말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즉 이윤호의 주장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천여 년 교회사의 와중에 이 때까지 알려진 적이 없던 가계저주론/가계치유론이 이윤호와 그가 지명하는 몇몇 사람들에게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새로운 계시를 받은 것일까? 이천여 년 동안 지구상을 살다가 성도들,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만큼 멍청했던 것일까? 이윤호의 학설이 갑자기 튀어나온 비기독교적인 요소라고 평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비슷한 얘기가 교회사에는 없어도 한국 민간 신앙, 무속, 미신에는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토속적 신앙을 기독교적으로 각색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는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가계저주/치유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파괴하고 있다. 다른 것과 섞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이천여 년 동안 지켜온 그리스도의 대속의 충족성을 상대화하고 제한, 축소하고 있다.

재미있는 지적을 하나 하고 싶다. 이윤호가 자신의 가계저주론 및 가계치유론을 증명한답시고 인용한 수많은 성경구절, 신학자들의 책 혹은 신앙고백집은 모두가 이윤호가 주장하는 것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85번을 인용했다. 그곳에는 신자들에게 아직 남아 있는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방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말하고 있지 이윤호의 가계저주론/가계치유론의 핵심인 “상태로서의 저주” 즉 저주받은 상태,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불행과 고통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 부분을 인용한 후 “가계의 저주를 포함한 모든 상태적인 저주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저주는 하나님의 통치사역일 뿐이고 그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하나님 스스로 저주/심판을 축복/용서로 바꾸어주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향하게 해주셨고 또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향하게 해주신 위대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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